"기부금은 사장의 특권"... 공사의 거짓말과 무책임

2021년 08월 26일 12시 30분

뉴스타파는 '세금도둑잡아라' 등 시민단체 3곳과 함께 공공개혁 프로젝트 '낙하산이 쏜다'를 진행하고 있다. 공공기관 낙하산 임원들이 지연과 학연 같은 사적 이해관계로 얽힌 단체에 기부·후원 예산을 몰아주는 등 공공 예산의 집행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6월 뉴스타파가 전체 공공기관 350곳 중 73곳을 검증 보도한 이후,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는 감사원에 공익 감사를 청구했고, 현재 감사원은 사전 조사를 진행 중이다. 뉴스타파는 나머지 공공기관에 대한 후속 보도를 이어가고 있다. 추가 검증 대상은 환경부, 기획재정부, 고용노동부, 해양수산부, 문화체육관광부, 중소벤처기업부,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무조정실, 금융위원회의 소관 공공기관 184곳이다. - 편집자 설명
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는 15대 한국가스공사 사장을 지냈다. 가스공사는 코스피 상장사로 시장형 공기업이다. 이 교수는 2015년 7월, 박근혜 대통령에 의해 사장에 올랐다. 그는 친박 성향의 경제학자다. 2010년 박근혜의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 발기인, 2013년 박근혜 정부 출범과 함께 장관급인 녹색성장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이승훈 전 한국가스공사 사장(재임 기간 2015년 7월∼2017년 7월)
학자 출신의 이승훈 전 사장도 공공 예산의 사유화 논란에 비켜서 있지 않다. 뉴스타파 취재 결과, 이승훈 교수는 가스공사 사장 시절(2015년 7월∼2017년 7월) 본인과 사적 이해관계로 얽힌 두 단체에 공사 기부금 1억 3,000만 원을 준 것으로 확인됐다. 기부처 선정 관련, 별도의 심의 절차 없이 사장의 지시로 예산을 줬다.
이승훈 교수는 지시한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공공 예산의 사유화나 이해충돌에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반면, 가스공사는 이승훈 사장이 지시하지 않았다고 거짓 답변을 내놨다.

사적 이해관계로 얽힌 단체에 6개월마다 꼬박꼬박 예산 지급

이승훈 교수가 한국가스공사 사장으로 있던 2015년 12월부터 2017년 5월까지 약 1년 6개월 동안, 가스공사는 재단법인 한국선진화포럼에 총 6,000만 원의 기부금을 줬다. 가스공사가 밝힌 기부 사유는 ‘교육 및 학술 후원’이다.
기부금은 4차례에 나눠 지급됐다. 2015년 12월 1,500만 원, 2016년 6월 1,500만 원, 2016년 12월 1,500만 원, 2017년 5월 1,500만 원이다. 약 6개월마다 꼬박꼬박 어김없이 지급하는 방식이었다. 선진화포럼이 가스공사로부터 기부금을 받은 것은 이승훈 사장 시절, 이 네 번이 유일하다. 이 사장 퇴임 후엔 기부·후원이 중단됐다.
한국가스공사의 한국선진화포럼에 대한 기부내역 정리
한국선진화포럼은 2005년 설립됐다. 보수 성향의 지식인 모임이다. 국무총리를 지낸 남덕우 전 서강대 교수가 초대 이사장이다. 이한구 전 새누리당 의원도 이 단체의 이사였다. 그는 의원 임기가 끝나기 직전인 2016년 6월, 남은 후원금 1,500만 원을 이곳에 기부해 논란이 일었다. 이사로 있는 단체에 셀프 후원을 했기 때문이다. 
이승훈 교수도 한국선진화포럼 이사에 포함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 교수는 2006~2012년까지 선진화포럼의 등기이사였다. 등기 임원에서 물러난 후에도 꾸준히 활동했다. 2015년 6월 그가 한국가스공사 사장에 임명되자, 선진화포럼 홈페이지엔 ‘우리 이사님의 사장 임명을 축하한다’는 게시글이 올라왔다. 
한국선진화포럼 홈페이지 캡쳐 화면
뉴스타파는 한국선진화포럼을 찾아가 당시 기부금을 어떻게 받게 됐는지, 또 어디에 썼는지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포럼 측은 답변을 거부했다. 이승훈 교수에게 연락해 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는 자신이 기부 과정에 관여했고, 직접 지시했다고 말했다. 
내가 (선진화포럼) 이사로 있었지만 그 단체의 그 프로그램은 괜찮다고 해서 (기부금을) 준 거예요. 주라고 그랬어요. 내가 지원할 만한 프로그램이라고 판단했어요.

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 / 전 한국가스공사 사장 
이런 식의 셀프 기부 집행이 공직자의 이해충돌이나 예산 사유화에 해당한다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이승훈 교수는 “동의할 수 없다”고 답했다. 그는 공기업 기부 예산은 경영진이 판단해 원하는 곳에 줄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원이 바뀔 때마다, 그 임원이 잘 아는 사업이 지원을 받게 된다고 하는 것은 나는 ‘불가피하구나’라고 보고 있어요. 뭘 걱정하는지 이해하는데, 공공기관의 공공성·공익성 사업 지원 예산이라고 하는 것은 가스공사의 주업이 아니라 아주 지엽적인 활동이기 때문에, 모든 단체에게 (기부금을) 신청할 기회를 주고 이렇게 하면 전국의 모든 단체가 신청하겠죠. 그걸 가스공사에서 감당하겠어요?

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 / 전 한국가스공사 사장
'공기업 기부 예산 사유화' 논란에 대한 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의 해명
이승훈 사장 시절 가스공사의 기부 예산을 사유화한 사례는 더 있다. 한국경제학회에 대한 기부·후원이다. 2016년 1월 28일 가스공사는 경제학회에 현금 3,000만 원을 기부했다. 그런데 가스공사의 기부 직후인 그해 2월 17일, 경제학회는 서울대에서 경제학 공동 학술 대회를 열었다. 경제학회가 주관하고 국내 60개 경제학 관련 학회가 망라해 참가하는 대규모 행사였다.
서울대에서 이틀간 열린 학술 대회에서 하루 간격으로 번갈아 기조 발제가 있었다.  그중 첫째 날 행사의 문을 여는 발제자가 이승훈 교수였다. 당시 안내 책자를 보면, ‘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가 한국가스공사 사장 자격으로 기조 발표를 한다’고 적혀 있다. 다음날 두 번째 기조 발제자는 조순 전 부총리였다. 

기조 발제 직전, 가스공사 ‘대외 협력관계’ 사유로 주관 학회에 후원 

결국, 이승훈 사장이 학술 대회의 기조 발제자로 나서기 직전에 가스공사가 주최 측에 수천만  원을 기부한 것이다. 가스공사가 경제학회에 기부금을 준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더구나 후원 명목도 이상하다. 가스공사는 후원 사유로 ‘교육, 학술 후원’ 외에 ‘대외 협력관계 업무 추진’이라고 써놨다. 학회에 기부를 하면서 ‘대외 협력관계’를 내세운 것이다. 이듬해인 2017년 1월, 가스공사는 경제학회에 또다시 현금 3,000만 원을 기부했는데 그때도 ‘대외 협력관계 업무 추진’이 기부 사유였다. 이승훈 사장 임기 중 가스공사가 경제학회에 준 기부, 후원은 모두 3차례, 금액으론 7천만 원으로 확인된다.
한국경제학회가 2016년 펴낸 행사 안내 책자, 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가 기조연설을 한다고 돼 있다.

심사나 심의 절차는 따로 없어... 두 단체 모두 퇴임 후, 공기업 후원 끊겨 

결국, 사장과 사적인 인연으로 얽혀 있는 두 단체에 각각 6천만 원과 7천만 원씩 모두 1억 3,000만 원의 예산을 셀프 후원한 것이다. 한국선진화포럼의 경우처럼, 한국경제학회도 이 사장이 퇴임한 후엔 기부금 지급이 끊겼다. 기부 집행 과정에 심사나 심의 절차는 따로 없었다. 이승훈 사장의 지시로 집행됐다. ‘공공 예산의 사유화’ 말고, 달리 설명할 방법이 또 있을까.
이승훈 교수는 자신이 기부를 지시했다고 시인했다. 하지만 가스공사의 기부와 자신의 기조 발제는 별개의 사안이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기조 발표를 한 것은 내가 경제학자로서 학계에 명성이 그만큼 있었던 것”이라며 “전혀 연관이 없다”고 주장했다. 
국회 국감장에서의 이승훈 전 가스공사 사장(서울대 명예교수) 뒷 배경은 사장 시절 한국가스공사 기부 후원내역
뉴스타파는 이승훈 교수에게 다시 물었다. “공기업 기부금을 이사 등 특수 관계인 단체에 준 것이 과연 공정하고 정의로운 처사인가요?” 이 교수는 사장과 잘 아는 단체에 기부금을 줄 수밖에 없다며 이렇게 항변했다. 
(공기업 기부금으로) 장학금을 우리가 줄 때도 대한민국의 모든 학생들을 대상으로 ‘어떤 학생이 장학금을 받아야 공정하게 장학금을 주겠는가’라고 모든 학생을 다 고려해서 ‘가장 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학생을 찾아서 주는 거다’라고 해야 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안 되죠.
기:  그러면 가스공사 사장과 같은 영향력이 있는 이런 사람들과 가까워야만 기부금을 받을 수 있다는 논리로밖에 안 들리는데요.
그러면 가스공사 사장이었던 사람이 모르는 단체를 어떻게 지원해 주죠?

이승훈 서울대 명예교수 / 전 한국가스공사 사장

"공기업 기부·후원 수혜가 낙하산 사장의 배려로 인식돼선 안 돼"

기부금 지급을 둘러싼 공정과 공평의 원칙은 뒷전으로 밀리고 '현실의 불가피성'을 앞세운 군색한 논리다. 5년 전, 이승훈 교수가 가스공사 사장 자격으로 학술 대회에서 기조 발제하면서 이런 발언을 남겼다. “복지 수혜는 수혜자의 권리일 수 없고, 정당하게 취득한 소득을 출연하는 경쟁 승리자의 배려로 인식하는 것이 옳다” (‘자유, 사적 소유, 경쟁’ 시장의 자원배분 발제문 중) 
그가 지시한 기부·후원 방식을 그의 발언에 빗대 이렇게 비유해 설명하면 지나친 억측일까. “이 교수는 박근혜 정부를 대표하는 낙하산 인사로서, 가스공사 사장 경쟁에서 승리자다. 공사 기부금 수혜는 수혜자의 권리일 수 없고, 경쟁 승리자인 사장의 배려로 인식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사장이 잘 알고 있는 특정 단체에 공사 예산으로 기부금 수혜를 베푼 것이다. 

가스공사는 사장 지시 없었다고 거짓 해명

이런 생각의 편린도 문제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가스공사의 무책임한 태도였다. 이번 취재 과정에서 가스공사는 거짓 해명으로 일관하며 예산 집행의 책임을 회피했다. 뉴스타파는 가스공사에 이승훈 사장의 후원 지시나 요청이 있었는지 여러 차례 물었지만, ‘해당 사항이 없다’고 거짓으로 답했다. 
한국가스공사가 뉴스타파에 보낸 서면 답변서 중 
또한 따로 정해진 심사 절차 없이 1억 원이 넘는 기부금을 집행한 사실이 밝혀졌는데도 가스공사는 해당 기부가 정당했다고 주장했다. 가스공사는 서면 답변에서 “공사와의 업무 연관성이 있다고 판단되어 기부금을 집행하였다”고 밝혔다. 
한국가스공사가 뉴스타파에 보낸 서면 답변서 중 
최근 5년 동안 가스공사가 집행한 기부 후원 예산은 850억 원이 넘는다. 인천국제공항공사와 함께 한해 100억 원이 넘는 예산을 쓰고 있다. 하지만 기부심의위원회 설치 등 제도 개선을 약속한 다른 공공기관과 달리, 가스공사는 지금까지 아무런 방지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제작진
영상취재신영철, 최형석
CG정동우
디자인이도현
웹출판허현재
공동기획세금도둑잡아라,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함께하는시민행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