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그램 마약방] ④ “내가 ‘마약왕 박왕열’ 상선”...'마약 네트워크' 추적기

2021년 02월 05일 17시 01분

'텔레그램 마약왕'으로 불린 박왕열(닉네임 '전세계')에게 마약을 공급해 온 사람을 뉴스타파가 추적했다. 박왕열을 중심으로 한 마약 조직, 일명 '전세계 그룹'에 대한 수사를 진행하고 있는 경찰도 쫓고 있는 사람이다. 뉴스타파 확인 결과, 그는 1974년생 베트남 마약상 '김형렬(열)'이었다. 김 씨는 메신저 프로그램인 텔레그램에서 '사라 김'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동남아 등지에서 들여온 마약을 국내에 유통해 왔다.  
뉴스타파는 지난해 9월 텔레그램에서 '마약왕'으로 불리고 있는 닉네임 '전세계'가  박왕열이라는 사실을 공개한 바 있다. 보도 한 달쯤 뒤인 지난해 10월 28일, 박왕열은 필리핀 현지에서 경찰에 검거됐다.
뉴스타파는 박왕열이 검거된 뒤부터 본격적으로 박왕열을 중심으로 한 일명 '전세계 그룹'에 마약을 공급해 온 상선을 찾는 취재를 시작했다. 박왕열의 범죄를 잘 아는 사람들이 보내준 여러 건의 제보가 큰 도움이 됐다.   
메신저 프로그램인 텔레그램에서 '전세계'라는 이름으로 활동해 온 박왕열.

'탈옥수' 박왕열은 어떻게 '텔레그램 마약왕'이 됐나

'전세계' 박왕열은 2016년 필리핀에서 3명의 한국인을 살해했던 범죄자다. 범죄 직후 필리핀 현지 경찰에 체포됐지만 두 번이나 탈옥에 성공했고, 2019년 말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탈주 몇 달만인 지난해 초, '전세계'라는 이름을 쓰며 갑자기 텔레그램 마약 세계에 나타났다.  
박왕열이 만든 마약 유통조직, 일명 '전세계 그룹'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이 가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왕열이 머물던 필리핀은 물론 국내에도 수십 명의 총책과 판매책이 활동 중이다. 경찰에 이미 붙잡힌 '전세계 그룹' 관련자들만 20명이 넘는다.   
최근 '전세계 그룹'의 국내 총책인 이 모 씨(닉네임 '바티칸 킹덤') 일당을 검거한 경남지방경찰청에 따르면, '전세계 그룹'이 유통한 마약의 규모는 확인된 것만 49억여 원 정도다. 하지만 적발되지 않은 것이 훨씬 많다는 게 경찰 측 설명. 최근 필로폰 투약 혐의로 구속된 황하나 씨도 '전세계 그룹'의 국내 총책인 '바티칸 킹덤'을 통해 마약을 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하나 씨는 '전세계 그룹'의 국내 총책인 닉네임 '바티칸 킹덤'을 통해 마약을 공급 받았다. 
그럼 박왕열은 어떻게 필리핀 감옥에서 탈주하자마자 텔레그램 마약계에서 거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취재진은 이 궁금증을 풀기 위해 먼저 박왕열과 '전세계 그룹'을 잘 아는 다수의 마약상을 접촉했다. 그 과정에서 "박왕열에게 마약을 공급하는 사람, 즉 '상선'이 따로 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취재진은 지난해 초 마약 유통 혐의로 구속된 K 씨와 송 모 씨, 속칭 '지게'(국경을 넘어 마약을 옮기는 운반책) 역할을 했던 두 사람의 사건 기록에도 주목했다. K는 박왕열의 공범이 박왕열에게 보낸 편지에도 등장했던 인물이다. 편지에는 "K가 박왕열의 과거 행적을 경찰에 진술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K와 송 씨의 판결문에 따르면, 두 사람은 지난해 2월 인천공항을 통해 베트남산 필로폰 1KG을 밀반입하려다 검거됐다. 판결문에는 K가 필로폰을 운반하기 전 필리핀에도 여러 번 다녀 왔다는 내용도 들어 있었다. 필리핀은 전세계 박왕열이 거주하며 마약을 거래하던 곳이다.
베트남에서 인천공항을 통해 필로폰을 들여오려다 적발된 K의 1심 판결문. 판결문에는 베트남 마약상 '김형렬(열)'이 마약 운반을 지시했다고 나와 있다.
그런데 K의 판결문에서 낯선 이름 하나가 발견됐다. 바로 K와 송 씨에게 마약 운반을 지시했다는 베트남 마약상 '김형렬(열)'이었다. 아래는 판결문 내용 중 일부. 
피고인과 공범 송ㅇㅇ은 베트남 호치민에 있는 김형열의 주거지에서, 김형열이 가져온 시가 1억 7백만 원 상당의 필로폰 973g을 비닐랩 등을 이용해 포장한 뒤 미리 준비한 구슬 줄로 여러 번 감고, 필로폰을 분홍색 캐리어에 숨겼다.

마약 유통책 K 1심 판결문 (2020.9.11) 
취재진은 현재 구치소에 구속 수감돼 있는 K와 공범 송 모 씨에게 편지를 보내 베트남 마약상 김형렬이 누구인지, 박왕열과는 어떤 관계인지 등을 물었다. 편지를 보내고 1주일 뒤 K가 먼저 답장을 보내왔다. 
베트남 마약상 김형렬의 지시를 받고 국내로 마약 밀반입을 시도하다 검거된 K가 취재진에게 보내온 편지.
K는 편지에서 "2020년 2월 김형렬의 지시로 필리핀이 가서 박왕열을 만난 적이 있다. 아이패드, 트레이닝복, 휴대폰 2대, 명품 옷과 신발, 통장 2개 등을 필리핀에 가져다 주면 왕복 항공권과 숙박비, 그리고 50만 원을 준다고 했다. 박왕열이 살인자이고, 인터폴 적색 수배자인지는 당시에 전혀 알지 못했다"고 밝혔다. K는 이어 "베트남 마약상 김형렬과 박왕열은 매우 긴밀한 사이로 김형렬을 통해야만 박왕열을 만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형렬의 사주로 K와 함께 필로폰 밀반입을 시도하다 구속된 송 씨도 지난달 뉴스타파에 편지를 보내왔다. 송 씨는 '전세계 박왕열의 윗선이 바로 김형렬'이라고 주장했다. 다음은 송 씨가 보낸 편지 내용 중 일부. 
박왕열은 김형렬의 직원입니다. 마약한 지 얼마 안 됐어요. 광고 사진들도 김형열 작품이고요. 제가 다 실물로 봤어요.  

마약 유통책 송 모 씨가 뉴스타파에 보낸 편지 (2021. 1.) 
취재진은 자세한 얘기를 들어보기 위해 구속 수감돼 있는 K와 송 모 씨에게 접견을 신청했다. 하지만 코로나19 여파로 접견이 전면 중단되면서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다.  

뉴스타파에 들어온 추가 제보...'사라 형님'의 실체

베트남 마약상 김형렬에 대한 추적이 진행되던 지난 1월, 뉴스타파에 박왕열의 추가 범죄를 고발하는 내용의 제보가 들어왔다. 박왕열의 마약을 국내 총책 '바티칸 킹덤'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던 운반책 H에 관한 내용이었다.
제보 문서에는 총 3개의 서류가 들어 있었다. 박왕열의 마약 운반책 H에 대한 검찰 공소장, H가 누군가에게 쓴 편지, 한 남성의 여권 사진 3장(한국 여권 2장, 인도네시아 여권 1장)이었다. 
취재진은 먼저 H의 검찰 공소장을 읽어봤다.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피고인은 박왕열로부터 '바티칸 킹덤 이ㅇㅇ에게 케타민과 엑스터시를 판매하고 대금을 받아오라'는 지시를 받고, 2020년 10월 22일 이ㅇㅇ 일행이 타고온 승용차에 탑승해 마약을 은닉한 장소로 이동한 다음, 엑스터시 985정 등을 찾아 이ㅇㅇ에게 건네주고, 대금 명목으로 합계 1억 2천 6백만 원을 받았다.

마약 운반책 H에 대한 검찰 공소장  (2020.12.23)
H가 쓴 편지는 '사라 형님'이라는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아래는 편지 내용 중 일부. 
사라 형님.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막상 징역에 들어오고 재판을 앞에 두니 갑갑한 마음입니다. 공소 내용은 저와 전세계가 공모해서 바티칸에게 마약을 팔았다는 것인데, 저는 전세계의 협박에 못 이겨 심부름을 했을 뿐인데 억울합니다. 재판에서 다투려면 검사 출신 변호사가 꼭 필요할 것 같단 생각입니다. 형님 좀 도와주십시오.  

마약 운반책 H의 편지 (2021.1) 
제보자는 여권 사진 3장이 모두 같은 사람, '사라 형님'이 쓰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3장의 여권에 적힌 이름과 생년월일, 국적은 제각각이었지만, 모두 같은 사람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중 한 여권에 '1974년생 김형렬'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K의 판결문에서 확인했던 베트남 마약상 김형렬이었다. 마약왕 박왕열의 상선으로 지목된 김형렬의 얼굴이 처음 확인된 것이다.
뉴스타파가 제보받은 여권 사본 3장. 생년월일과 이름은 모두 달랐지만, 같은 사람의 사진이 붙어 있다. 맨 오른쪽 한국 여권에는 김형렬이라고 적혀 있다.
마약 유통조직 '전세계 그룹'의 조직도. 박왕열에게 마약을 공급해 온 상선 '베트남 마약상 김형렬'의 존재가 뉴스타파 취재로 새롭게 확인됐다. 

텔레그램 닉네임 '사라 김'이 마약상 김형렬?...오랜 추적 끝에 전화 연결

취재진은 곧바로 마약왕 박왕열의 상선으로 추정되는 김형렬에 대한 추적에 나섰다. H의 편지에 등장하는 이름 '사라'가 텔레그램 닉네임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 여러 텔레그램 마약방에 잠입해 '사라' 혹은 '사라 형님' 같은 이름을 쓰는 사용자를 찾아봤다. 며칠간의 탐문 끝에 '사라 김'이라는 이름의 마약상을 찾을 수 있었다. 
'사라 김'의 텔레그램 프로필에는 김형렬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진 베트남 호치민시의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사라 김'이 올린 마약 홍보 글에서는 박왕열이 쓰던 텔레그램 아이디 'callme4989'도 발견됐다. 또 '사라 김'이 수년 전 트위터 등에 올린 글에선 글을 쓴 사람의 사진이 한 장 발견됐다. 여권에서 확인했던 김형렬의 얼굴이었다.
'사라 김'이 인터넷에 올린 마약 홍보 사진.'전세계'라는 글자와 함께 전세계 박왕열의 텔레그램 아이디인 'callme4989'가 적혀 있다.

'내가 전세계 상선'이라던 김형렬...'중개만 해줬다' 말 바꿔

취재진은 '사라 김'이 박왕열의 해외 상선으로 지목된 김형렬이 맞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마약 판매상으로 위장, '사라 김'에게 접근해 대화를 시도했다. 대화는 수일에 걸쳐 이어졌다. '사라 김'은 자신이 베트남 호치민시에 살고 있으며 '전세계 박왕열의 상선'이 맞다고 밝혔다. "필리핀 감옥에서 박왕열을 처음 만났고 탈옥한 박왕열에게 마약을 대량으로 공급해 줬다"는 주장이었다. '사라 김'은 또 "코로나19 문제가 해결되면 한 달 최대 50kg의 필로폰을 공급할 능력이 있다"고 자신의 능력을 과시했다. 
며칠 간의 문자 메시지 대화를 진행한 뒤, 취재진은 '사라 김'에게 직접 텔레그램으로 전화를 걸었다. 텔레그램 계정을 바꿔가며 여러 번 통화를 시도한 끝에 전화가 연결됐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한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는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와는 달리 박왕열에게 마약을 공급했다는 의혹, 텔레그램 마약방에서 필로폰을 판매한 사실을 모두 부인했다. 김형렬은 전화 통화 이후 취재진이 보낸 문자에서도 "박왕열에게 마약을 공급한 사실이 없고 마약계 큰 손과 박왕열을 중개해 주는 역할만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뉴스타파 취재진이 텔레그램 마약상 '사라 김' 김형렬과 주고받은 텔레그램 문자. 

마약 사건 전문가들 "상선 못 잡으면 마약 유통 못 막는다"

박왕열을 중심으로 한 '전세계 그룹'을 수사 중인 경찰은 박왕열의 해외 상선으로 지목된 김형렬에 대해서도 수사를 확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취재진은 전세계 박왕열의 국내 총책인 '바티칸 킹덤'을 수사했던 경남지방경찰청에 연락해 관련 수사상황을 물었다. 경남지방경찰청 측은 "바티칸 킹덤 등 전세계 일당이 다른 조직과도 연결돼 있다는 정황을 파악해 수사를 확대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마약왕 박왕열의 실체를 확인해 보도했던 뉴스타파가 박왕열의 상선을 찾는 취재를 진행한 이유는 하나다. 우리 사회에 마약을 공급하는 최초 공급자를 잡지 않으면 마약 유통을 근절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마약 사건을 다뤄온 법률 전문가들의 생각도 같았다. 전문가들은 특히 "텔레그램 같은 SNS를 통해 마약 유통과 마약 조직원 모집이 이뤄지고, 마약 대금을 비트코인 같은 가상화폐로 결제하는 상황에서 마약 유통을 근절하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한 텔레그램 마약방에 올라온 조직원 모집 홍보 글.
예전엔 국내에 공급 사범들이 어느 정도 조직이 있었고 자기들끼리 전국적인 유통망을 갖추고 있어서 직접 만나서 거래하는 방식으로 했습니다. 지금은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SNS 마케팅만 잘하더라도 얼마든지 마약을 공급·매매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예전과 다르죠. 소위 말해서 이제 언택트 시대로 간 거죠, 컨택트에서. 그렇게 추세가 변화하고 있는 겁니다.  

김희준 변호사(전 마약 전담 검사)
자신은 잡히지 않고, 국내에서 잡힌 사람들을 배척하고 또 다른 사람들을 유입하는데, 실은 '전세계'가 잡혔다 하더라도 또 다른 마약 공급선은 계속 만들어질 수밖에 없어요. 이미 그거로 돈을 버는 구조를 알았기 때문이죠. '전세계'가 잡히더라도 전세계 밑에서 배운 사람들이나 검거되지 않은 다른 사람들은 또 '전세계'의 역할을 아마 또다시 할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서 발본색원을 해야 되는 것이고 수사기관에서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 노력을 더 기울여야 되는 것이죠.  

박진실 마약 범죄 전문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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