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타파, 한국전쟁 영상 등 해외수집 사료 공개...공익목적 무료 이용 가능

2022년 01월 27일 15시 28분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대전 형무소는 제노사이드, 즉 집단 학살의 현장이었다. 1950년 전쟁 직후부터 한  달사이에 대한민국 군과 경찰에 의한 첫 학살이 일어났고, 두 달 뒤인 9월 25일에는 북한인민군에 의해 두 번째 학살이 자행됐다. 증오와 공포가 낳은 학살이 또다시 보복으로의 학살로 이어진 참혹한 현장이었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북측에 의해 저질러진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인터뷰 영상을 미국 국립문서보관청(NARA)에서 입수했다. 이 영상은 뉴스타파가 2019년부터 ‘해외 소재 현대사 사료 수집 프로젝트’를 추진하며 확보한 8천여 건의 영상 자료 중 하나다.
미 국방부가 촬영한 이 인터뷰 영상의 제목은 ‘KOREAN ATROCITIES, TAEJON’이다. 풀이하면 ‘대전에서 일어난 한국의 잔혹 행위’다. 10여분 분량의 인터뷰는 1950년 11월 2일 35mm 필름으로 촬영됐으며, 촬영자 이름은 ‘BURT’로 돼 있다.
이 영상에는 모두 3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먼저 나오는 사람의 이름은  조봉제(Cho Pong Je)다. 그는 양복 차림에, 안경을 썼다. 촬영자는 그를 술 판매업자(wine merchant)라고 기록했다. 조 씨는 당시 학살 현장에서 생존자를 구조해 운반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사람을 두 명씩 묶어 놨기에 포승줄을 칼을 가져와 끊어 빼내 왔습니다. 그 옆에 눕혀 놨는데 다리가 뻣뻣했습니다. 피가 통하지 않아서 그랬던 모양입니다. 다리를 주물러 주고 있으니까 옆에서 또 소리가 나서 가보니까 또 사람이 하나 살아 있었습니다. 그 사람을 보니까 도끼로 몸이 찍혔는데 입술이 시퍼랬습니다. 그 사람을 또 빼냈습니다. 잠시 후 서너 명이 모였습니다. 가마니로 들것을 만들어서 옆집 빈 집을 빌려서 들어다 놨습니다. 바로 이 집입니다.

조봉제 
▲ 당시 상황을 증언한 조봉제와 박동근
조봉제의 인터뷰가 끝나자 옆에 서 있던 박동근(Park Tong Kyn)의 인터뷰로 촬영이 이어졌다. 그는 한복 차림에 갓을 썼다. 박동균은 피난을 갔다가 집에 와 보니 사람들이 생존자들을 자신의 집으로 옮겨놓은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이 집이 제 집입니다. 9월 28일 날 아침에 경찰서 앞에서 무슨 소리가 났었어요. 거기를 들어가 보려다가 괴뢰군이 겁이 나서 못 들어가고 피난을 갔었습니다... 피난을 가서 이삿짐을 두고 돌아왔습니다. 저의 집에 들어왔을 때가 10시 남짓 됐을 때였어요. 사람이 여럿 모여 있었는데 제 동생도 거기 있었습니다. 물어보니까 둘을 방에 다 뉘고 제 이부자리들을 가져다 깔고 덮고 둘을 뉘어 놓고...

박동근
마지막 인터뷰로 등장한 천영덕(Chun Yung Duck)은 당시 학살 현장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다. 짧은 머리에 양복을 입었으며, 중절모와 코트를 손에 들었다. 그는 우선 자신을 전직 경찰관이라고 소개했다.  
나는 1939년에 충청남도에서 충청남도 경찰관을 한 사람입니다. 계속해서 충청남도에서 근무하던 중 1947년부터 충청남도 부여, 충청남도 당진 경찰서장을 겸했습니다.

천영덕
▲ 충남 부여경찰서 역대서장 프로필 중 ‘천영덕' 1947.3.8 - 1947.7.26
현재 충남 부여 경찰서 홈페이지 역대 서장 소개란에는 5대 서장에 천영덕이란 이름이 있으며, 영상에서 언급한 재직기간도 일치한다. 
천영덕은 9월 25일 대전 형무소에서 서쪽으로 500미터 떨어진 천주 교단 뒤에서 오후 9시경부터 11시경까지 총살이 집행됐으며 본인이 그 속에 있었다고 증언했다.
9월 25일 수용자들은 전부 형세를 알지 못했으나 그들이 패망을 앞두고서 수용된 애국자를 전부 총살하기 위해서 사건을 냈습니다. 본인은 9월 25일 약 70명과 같이 대전 형무소에서 서방 약 500미터 떨어진 천주 교단 뒤에서 오후 9시경부터 오후 11시경까지 총살을 집행했는데 그 속에 있었습니다.

천영덕
그는 학살 과정도 상세히 증언했다. 
 저는 제일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 따발총을 맞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죽은 자 같이 머리를 땅에 대고서 앉았더니 일일이 앞에서부터 죽었나 안죽었나 하나씩 하나씩 검사를 했습니다. 나한테 와서는 제일 먼저 총대 머리로 머리를 때리고 총 끝으로 허리를 찔러보면서 죽지 않았나 확인을 했습니다... 그들이 무참하게 일곱 번을 제 배를 찔렀습니다. 그래서 나는 전신에 혼돈이 와서 뒤로 자빠졌습니다. 그랬더니 그놈들이 '이놈은 죽었다' 그러면서 아래 파여있던 구덩이로 나를 굴렸습니다.

천영덕
뉴스타파가 발굴 수집한 한국전쟁 당시 영상들은 대부분 소리가 없는 무성 필름이다. 일부 오디오가 포함된 영상도 상당수는 촬영 때 동시 녹음된 것이 아니라, 뒤에 내레이션과 효과음을 덧입혀 제작된 것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1월의 긴박한 상황에서 미군이 영상 촬영과 녹음 장비를 동시에 갖춰 대전에 가서 인터뷰를 진행했다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다. 이는 미국 측이 이 인터뷰 영상을 심리전에 활용하기 위해 상당히 공을 들였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국전쟁은 세계전쟁사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많은 민간인 학살 사건을 초래했다. 좌우 양측의 학살 만행은 다시 양측이 서로를 비난하는 심리전과 선전 선동의 소재로 활용됐다. 실제 미군은 북한인민군에 의한 대전형무소 학살 현장을 촬영해 선전 영화 제작에 적극 활용했다. 
광고와 협찬을 받지 않고 시민 후원으로 운영하는 비영리 독립 탐사보도매체 뉴스타파는 2012년 1월 27일 첫 보도를 한 지 10년을 맞아, 지난 3년 동안 해외 각지의 공공 기록관 등에서 발굴·수집한 현대사 영상과 사진 자료 등을 시민과 공유하는 사이트(뉴스타파 공공아카이브)를 만들어 공개한다. 뉴스타파가 해외에서 공들여 발굴한 자료를 공개하고 공익 목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후원회원의 회비로 수집한 이 자료가 우리 사회의 공적 자산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 뉴스타파 공공아카이브 사이트 첫화면
이번에 뉴스타파가 1차로 공개하는 영상은 해제 작업을 완료한 87건으로 대전 민간인 학살 관련 영상 등 한국전쟁 시기 영상뿐만 아니라, 전두환의 NHK 인터뷰 영상, '일본군 위안부' 관련 영상 등도 포함돼 있다. 유튜브 기반의 ‘뉴스타파 공공아카이브’ 사이트는 영상을 검색하고 열람할 수 있는 기능뿐 아니라 공익 목적으로 영상을 사용하려는 경우 자료 신청 기능도 제공하고 있다. 
제작진
자료수집전갑생 전문위원
디자인이도현
발행허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