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거기가 지금 무슨 작업하는 곳인가요? 티브이에서 뭐 유해 발굴한다고 하는 거 봤네요. 그게 언제 일어난 일이에요?”
“1950년에서 51년 사이요. 6·25전쟁 터지고 며칠 안 지나 바로 일어났으니까 70년 전이죠.”
“아이고, 너무 오래됐구나. 그런 일이 있었다고 얘기만 들었지 잘 몰랐는데 덕분에 여기라는 걸 처음 알았네요. 이 길을 지나가면서도 그냥 모르고 지나칠 뻔했어요.”
대전 토박이라는 60대 택시 운전기사조차 지나다니기는 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던 곳. 이곳에선 한국전쟁 때 벌어진 민간인학살의 희생자 유해 발굴 작업이 30일 넘게 진행 중이다.
대전 골령골 제1학살지, 깊게 파인 구덩이 안에서 굴곡진 현대사의 그늘에 묻혔던 희생자들의 흔적이 이리저리 뒤엉켜 드러난다.
유해 발굴 현장 자원봉사자 참여
오랫동안 흙 속에 묻혀있던 뼈들은 말이 없다.
‘챙, 챙’ 호미 날이 돌무더기에 부딪치며 정적을 깬다. 70년의 깊은 잠에서 뼛조각들을 깨운다.
‘탁, 탁, 탁’ 나무 스패출라가 뼛조각 주변의 굳은 흙덩이를 부수고, 부드러운 솔은 ‘슥슥’ 소리를 내며 뼛조각을 어루만진다.
발굴 작업이 30일째 진행 중이던 11월 5일. 기자는 10월 23일에 이어 2번째 이곳을 찾았다. 발굴 24일차였던 첫 번째 방문 때보다 구덩이가 더 크고 깊어졌다. 이번에는 기자도 자원봉사자로 지원해 유해 발굴에 참여했다.
▲ 11월 5일 방문한 골령골 제1학살지는 앞서 10월 23일 뉴스타파가 동일한 현장을 방문했을 때보다 더 넓고 깊게 파인 상태였다.
“조회합시다.”
오전 9시가 조금 지나자 발굴 현장에서 총괄 진행을 맡은 안경호 4·9 통일평화재단 사무국장이 시민단체로 구성된 발굴단과 일반 자원봉사자 20여 명을 불러 모았다. 안 사무국장 뒤로는 가로 14m, 세로 20m에 계단식으로 점점 깊어지는 큰 구덩이가 있다. 구덩이 여기저기 하얗게 석회가루로 표시된 곳들은 유골이 나온 지점들이다.
“이번 발굴이 42일 일정으로 진행되니까 오늘로 작업의 4분의 3이 마무리되는 겁니다. 어제 수습한 아래쪽 E-4 구역에서는 스무 분 정도가 확인됐습니다. 오늘도 여기를 계속 수습하고, 동시에 언덕과 맞닿은 윗부분도 더 확장해서 나갈 겁니다."
짧은 조회가 끝나자마자 발굴단과 자원봉사자들은 특별한 지시 없이도 목장갑을 끼고 구덩이 위아래 구역으로 흩어졌다. 할 일이 산더미다. 아니, 여기서는 ‘흙더미’다.
골령골 발굴 현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수작업을 통해 이뤄진다. 먼저 지난밤에 떨어진 낙엽을 걷어냈다. 낙엽이 정리되자마자 발굴단은 호밋자루를 손에 쥐었다. 윗구역에서는 표토층을 벗겨내는 작업이 시작됐다.
▲ 11월 5일 뉴스타파 이명주 기자가 골령골 유해발굴 자원봉사자로 참여했다.
흙, 자갈, 돌멩이는 파내는 족족 쓰레받기로 쓸어 담은 뒤 빨간 고무 양동이에 붓는다. 양동이가 반 정도 차면 잽싸게 비워야 한다. 양동이 운반은 ‘인간 컨베이어벨트’ 팀의 몫이다.
네댓 명이 한 줄로 늘어서 양동이를 전달하면 맨 끝 사람이 구덩이 밖 흙더미에 내용물을 쏟아붓고 빈 양동이를 다시 돌려보낸다. 전날부터 성미산학교(서울 마포구) 고2, 고3 학생과 교사 10여 명이 자원봉사로 일손을 보탠 덕에 양동이 회전율이 빨랐다.
분주한 것은 아래 구역도 마찬가지다. 가장 깊숙이 판 곳의 깊이는 4m. 이 구역에서는 유독 두개골이 많이 나왔다. 흙과 뒤범벅돼 있기는 해도 치아까지 멀쩡한 두개골이 눈에 띈다.
유골이 나온 구역에서는 발 디디는 것조차 조심스럽다. 발굴단은 쪼그려 앉은 채로 조각가가 정을 치듯 크고 작은 뼛조각을 정교하게 골라냈다. 뼛조각들은 수습되기까지 일단 알루미늄호일로 감싸 그 자리에 둔다.
▲ E구역에 노출된 두개골과 그 위, 좌우로 무질서하게 널브러진 뼛조각은 당시 학살 방식과 시신 방치를 증명한다.
발굴단은 시간과 다퉈야만 한다. 햇빛에 노출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유골의 부식 속도가 빨라지기 때문이다.
발굴 현장에 M1, 카빈, 45구경 권총 탄피도 무더기로 발견
유해 사이로 녹슨 총알 탄피도 종종 발견된다. 학살이 총살로 이뤄졌다는 단서다. M1, 카빈, 45구경 권총 탄피가 주를 이룬다. 당시 M1은 형무소 특별 경비대, 카빈은 경찰, 45구경 권총은 헌병대가 사용했다. 학살 주체를 보여주는 증거다.
유골은 각 발굴 구역이 표기된 쟁반에 담겨 세척장으로 옮겨진다. 화학 약품 냄새가 코를 찌르는 곳이다. 세척장에서는 유골에 붙은 흙, 먼지, 식물 뿌리를 깨끗이 털어낸 뒤 습기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유골을 2~3시간 동안 아세톤에 담가뒀다 말리는 작업이 이뤄진다.
▲ 통풍이 잘되는 야외인데도 아세톤 냄새가 코를 찌르고 차가운 액체에 계속 손을 담가야 해 세척은 유난히 고된 작업이다.
세척 및 건조 과정을 마친 유골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 단장 박선주 충북대 명예교수의 작업실로 옮겨졌다.
“보통 크고 단단한 허벅지 뼈를 기준으로 수습자 수를 세고 있습니다. 어제까지 100여 구 유골이 확인됐고요.” 이리저리 유골을 살피던 박 단장이 말했다.
“증언자들에 따르면 여기서 죽은 사람들을 땅에다 눕혀놓고 총을 쐈다고 하는데 그 증거를 찾는 거예요. 여기 머리 뒷부분에 총탄 자국이 있는 걸 봐선 그런 증언이 사실이었다는 게 밝혀지는 거죠.”
▲ 왼쪽 아래 놓인 두개골 조각에 총알이 관통한 흔적이 보인다. 가운데는 발굴 현장에서 나온 미성년자의 치아다.
“그 옆에 치아들 있죠. 증언자들이 미성년자가 여기서 여럿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증언만 있었지 증거가 별로 없었어요. 보세요. 치아 뿌리가 완전히 자라지 않은 미성년자 아이들이 여기서 죽었다는 게 사실인 거죠.”
이날도 세 명의 유족이 발굴 현장 주변을 몇 시간 동안 서성였다. 대전에 사는 윤정희 씨도 그중 한 명이다. 윤 씨는 당시 충남 논산에 살던 아버지가 도장 하나 잘못 찍어서 대전형무소로 잡혀갔고,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뼛조각이 가득 찬 구덩이를 내려다보던 윤 씨의 눈시울이 어느새 붉어진다. “여기 와보니깐, 얘기만 들었지 정말 이럴 줄은 몰랐지.”
▲ 골령골 민간인학살 피해자 유족들은 거의 매일 현장을 방문해 목을 빼고 발굴지를 살핀다.
민간인 집단학살 희생자 7천여 명, 70년의 기다림
대전 골령골은 한국전쟁이 터진 직후였던 1950년 6월 말부터 1951년 초까지 대전형무소 수감자와 지역주민 등 최대 7천명이 학살당한 곳이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단지 ‘적으로 의심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수천 명의 민간인 등을 법적 절차 없이 집단 학살한 뒤 방치했다. 당시 대전형무소에는 제주 4·3사건 및 여순사건 관련자들, 남로당원, 국민보도연맹 관련자들이 대거 수감돼 있었다.
가해자는 충남지구 방첩대(CIC), 제2사단 헌병대, 지역 경찰 등으로 골령골 1km에 걸친 총 8개 구역에서 학살을 자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골령골이 ‘세상에서 가장 긴 무덤’이라고 불리는 이유다.
▲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학살은 모두 8구역에서 이뤄진 것으로 추정된다. 2020년 유해발굴이 진행된 곳은 위 지도에 빨간색으로 표시된 제1학살지다.
앞서 2007년 진실화해위원회는 골령골에서 34구의 유해를 발굴한 바 있다. 2015년에는 민간인으로 구성된 공동조사단이 제1학살지에 대한 공동조사를 벌여 20명의 유해를 발굴했다.
그리고 5년만인 지난 9월 20일 제1학살지에 캠프가 설치됐고, 25일부터 대전 동구청과 공동조사단의 공동주최로 본격적인 발굴 작업이 시작됐다.
작업일 기준으로 42일 동안 진행되는 이번 유해 발굴은 제1학살지에 집중해 11월 21일에 종료된다. 발굴 작업을 통해 수습된 유골은 2022년 국가단위 추모위령시설이 골령골에 건립될 때까지 세종시 추모의집에 임시로 안치될 예정이다.
▲ 뉴스타파 취재진이 10월 23일 골령골을 방문했을 당시 A-0-6구역에서 유해가 무더기로 나왔다.
▲ 구덩이 군데군데 보이는 흰 석회 가루 표식은 유해가 발견된 구역을 뜻한다. 얇은 경우 15~20cm만 복토층을 거둬내도 유해가 노출되는 곳이 있다.
▲ 발굴단이 조심스럽게 솔질을 하며 유골에 쌓인 흙을 털어내고 있다.
▲ 노출된 유골들 아래 M1 탄피가 발견됐다.
▲ 현장 콘테이너 박스 안에 꾸며진 유해 감식실에서 박선주 단장이 발굴된 유골을 살펴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