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정동 성공회빌딩 1층 구석에 있는 뉴스타파 대회의실.
말이 대회의실이지만 10여 평 가량의 이곳은 뉴스타파 후원회원 초청 시사회, 기자회견, 탐사보도와 데이터저널리즘 교육, 시민사회단체 회의 등 매우 다양한 용도로 사용된다. 양진호 사건 공익신고자 기자회견장으로 사용됐을 때는 방송사 카메라 10여 대와 취재진 수십명이 모여 그야말로 발디딜 틈이 없었고, 한겨울이었지만 땀 냄새가 진동했다.
양진호 사건 취재 회의와 자료 분석, 그리고 기사 작성 등도 대부분 여기서 진행됐다. 뉴스타파와 셜록, 프레시안의 기자들이 지난해 늦가을부터 지금까지 머리를 맞대고 씨름한 곳이다. 양진호 회장이 첫 재판을 받던 날, 박상규 진실탐사그룹 셜록 대표기자와 그 공간에서 다시 만났다.
우리가 이번에 양진호 보도를 여기서 준비했잖아요. 이 공간에서 회의도 하고, 기자간담회도 했고요. 뉴스타파, 프레시안과 같이... 셜록은 사무실이 없어서 항상 커피숍 같은 곳을 전전하며 일했는데, 그때는 뭔가 출근하는 맛이 있더라고요.(웃음)
서로 다른 배경과 취재, 제작 시스템을 가진 3개 언론사가 내놓은 양진호 사건 ‘공동보도’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협업의 판이 깨질뻔한 위기가 여러 번 있었다. 기사의 방향과 보도 시점을 두고 협업팀끼리, 심지어 공익신고자와도 얼굴을 붉혀가며 토론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무려 21건에 달하는 ‘공동보도’가 생산됐다. 한국언론사에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 전혀 성격이 다르고 성장환경도 달랐던 세 매체가 특별한 약속을 하고 시작한 것도 아닌데 손발이 잘 맞았어요. 어떻게 그게 가능했다고 생각해요?
“서로가 사적인 욕심을 버리고 ‘좋은 기사를 쓴다’는 목표 하나만 가지고 있어서 가능한 일 아니었을까요? 하여튼 마음이 잘 맞았던 것 같아요. 약속 잘 지키고 엠바고 안 깨고, 최소한 우리끼리는 누가 장난칠 거라는 걱정은 없었잖아요, 믿었으니까.”
- 나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런 말 많이 했잖아요. ‘좋은 선례를 남기자’, ‘처음과 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자’. 저는 그 말이 좋았어요.”
3개 매체의 ‘공동보도’로 폭행과 각종 엽기행각이 드러난 뒤, 양진호 회장은 구속됐다. 우리 사회가 외면해 왔던 이른바 ‘웹하드카르텔’ 문제가 사회적 화두로 떠올랐다. 정책이 바뀌고 법개정이 추진됐다. 언론의 협업이 세상을 보다 나은 방향으로 가게 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덕분에 ‘그 날의 일’도 좋은 추억으로 남게 됐다.
‘공동보도’를 시작하고 얼마 안 된 어느 날, 위기가 찾아왔다. 한 달 넘게 동거동락한 공익신고자가 “더는 못하겠다”며 주저 앉았다. 판이 깨질 위기였다.
‘그 날’ 아침 7시쯤 뉴스타파 회의실에 공동취재팀 기자들과 공익신고자가 모였다. 분위기는 싸늘했다.
- 그 날은 잊지 못하죠.
“중간에 공익신고자가 멘탈이 붕괴된 순간이 있었잖아요. 그 때 아침 7시 반이었나? 기억나요?”
- 지하철 타고 오면서 별생각을 다 했어요. 오늘 만나면 무슨 일이 생길지 빤히 예상됐잖아요. 그래서 가자마자 소리부터 지르고 의자를 들었다 놨다 하고…(웃음) 그 때 내가 했던 말도 기억나요. 두가지였지 아마?. 하나는 ‘우리를 믿어라’, 그리고 두번째는 ‘우리는 당신과 끝까지 간다’.
“그렇지. 그런데 난 그 말보다 더 웃겼던 건 선배가 제보자에게 ‘바보같은 사람들 얘기듣고 와서 무너졌다’고 소리 질렀던 거...그런데 공익신고자가 선배보다 나이가 많잖아요. 내가 그 말 듣고 ‘와, 졸라 세다. 저 사람 진짜 막 던지는구나’ 그랬다니까.(웃음) 선배가 고독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한국기자협회는 3사의 ‘양진호 공동보도’를 ‘이 달의 기자상(340회)’에 선정했다. 회원사가 아닌 뉴스타파와 셜록은 특별상을 받았다.
“한국기자협회가 만들어진 이후 여러 언론사의 ‘협업 기사’에 상을 준 게 이번이 처음이라고 하더라고요. 기분이 좋았어요.”
-축하합니다. 악수나 한번 합시다.(웃음)
진실탐사그룹 셜록은 박상규 대표를 포함해 기자가 3명이다. 사무실도 없다. 커피숍이나 남의 사무실 등을 전전하며 취재-보도를 이어간다. ‘왓슨’으로 불리는 회원들의 후원 외에는 수익모델도 없다. 시민후원에 기반한다는 점은 뉴스타파와 같다.
양진호 사건을 취재할 때, 뉴스타파 회의실은 셜록의 안정적 편집국 역할을 했다. 노출 되지 않기를 원하는 공익신고자를 만나서 장시간 인터뷰를 하고 매우 민감한 내부 자료들을 검토할 때 보안이 유지되는 장소였다. 콘텐츠만큼이나 공간이 힘을 발휘한 순간이었다. 한 공간에서 3사는 시너지 효과를 냈다.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살리며 협업하고 서로 배울 수 있었다. 기사와는 별도로 얻은 수확이었다.
개인적으로 큰 성과 중 하나는 선배의 모습을 본 거 였어요. 어렵고 복잡한 상황에서 팀장 그리고 선배는 어떤 역할을 해야 되는가 하는 걸 보고 배웠죠. 결단할 땐 결단하고 때로는 의자를 집어 던지는 듯한 분노도 해야 한다는 걸 느꼈죠.
경쟁보다는 연대가 더 큰 공익을 낳는다는 것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박상규 기자는 양진호 사건 보도를 통해 연대와 협업 공간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다윗 같은 조그만 언론사들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선 반드시 공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큰 제보를 받거나 어려운 사건을 접했을 때, “짐을 혼자 감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안정감이나 “협업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원천이 어쩌면 공간인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박 기자는 뉴스타파가 막 시작한 독립탐사보도 협업 공간 구축 프로젝트, ‘세상을 바꾸는 공간, 짓다’ 프로젝트에 큰 기대를 건다고 말했다.
‘사무실을 만들어야 하나’ 고민이 많았는데, 이제 그 고민이 사라졌어요. 뉴스타파가 준비하는 협업공간이 마치 내 공간처럼 느껴지거든요. 뉴스타파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시민들을 위한, 또 탐사보도를 이어가는 기자들을 위한 하나의 진지라는 생각이 들어요.
양진호 사건 공동취재, 보도의 거점, 그리고 공익신고자가 기자간담회를 한 뉴스타파 회의실. 이 공간의 한 쪽 벽에는 뉴스타파 달력 모델로 참여한 후원회원의 인터뷰 사진이 빼곡히 걸려 있다. 저마다의 사연으로 뉴스타파와 인연을 맺고 있는 시민들이다. 박 기자는 “이 공간이 너무 좋았다”고 말했다.
“처음 여기에 모여서 양진호 보도를 준비하던 날, 제가 가장 눈여겨 본 게 바로 이 사진들이었어요. 모두 뉴스타파를 후원하는 분들이잖아요.”
- 어떤 점이 좋았어요?
“대부분 언론사에는 기업 광고가 붙어 있잖아요. 그게 매체를 지탱하는 광고주고 힘이니까. 그런데 뉴스타파는 시민과 후원자들이 힘이잖아요. 그런 점이 다른 거죠. 새롭게 만들어지는 공간에도 이런 사진들이 걸리면 좋겠어요.”
- 당연하죠. 그때는 박 기자도 꼭 달력 모델로 인터뷰를 해 주세요. 뉴스타파 회원이시니까… (웃음)
“꼭 해야죠. ‘세상을 바꾸는 공간, 짓다’ 프로젝트에도 이미 참여했으니 자격이 있잖아요(웃음).”
박상규 기자의 바람처럼 뉴스타파가 시민들과 함께 지으려는 ‘새 공간’은 독립언론인들과 탐사보도 기자들, 1인 미디어들에게 보다 나은 방향으로 ‘세상을 바꾸는 진지’가 될 것이다. 독립언론이 모여 공익을 위한 아이템을 논의하고, 더 나은 사회를 고민하는 협업 공간, 시민과 소통하고 네트워킹하는 공간, 소속 회사나 사주에게 이익이 되는 콘텐츠가 아니라 우리 사회와 자라나는 후세에 기여하는 콘텐츠를 만드는 공간이 목표다. 박 기자의 말처럼 “아무 것도 안 하면, 아무 것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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