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언론실천선언 50년⑱] 고단한 시대에 희망을 말했던 대기자, 송건호

2024년 07월 19일 18시 00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습니다. 이 선언으로 당시 동아일보에서 130여 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강제 해직당했습니다. 일터를 잃은 언론인들은 출판,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언론 현장을 떠난 그들 개개인의 삶은 남모를 설움과 고달픔에 시달렸습니다. 뉴스타파는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이들 해직 언론인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지난 50년에 대한 소회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해직 이후의 생활 등을 담습니다. 이 릴레이 회고록은 기자협회보와 동시에 게재됩니다. 열여덜 번째 글은 김언호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한길사 대표)이 썼습니다. - 편집자 주   
송건호 선생 댁은 서울 은평구 역촌동이었고 우리 집은 불광동의 산동네 독바위골이었다. 나는 시내에 나갔다가 집으로 가는 길이면 으레 댁으로 가서 선생을 뵙곤 했다.
1978년 추석 전날이었다. 선생은 그날 대문을 나서는 나의 손에 5만 원을 쥐여 주셨다. 그땐 한길사가 펴낸 리영희 선생의 『 우상과 이성』,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 등이 잇따라 판금 되면서 신간을 내는 것은 물론이고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도 힘든 시절이었다. 시내에 조그만 사무실을 운영하기가 힘들어서 그걸 철수하고 우리 집 작은 거실을 편집실로 쓰던 때였다. 그날 선생은 아이들에게 과자라도 사주라는 말씀으로 나의 등을 밀었다. 그땐 선생의 생활도 퍽 어려운 시절이었다.
선생은 나를 늘 ‘김형’이라고 불렀다. 다른 그 무엇보다도 책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는 말씀으로 격려해 주셨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에 송건호 선생과 진행한 이런저런 일들을 되돌아보면 나는 목이 멘다. 고단한 시대였지만 선생은 나에게 늘 희망을 말씀했다.
나는 선생에게 우리 현대사에 대해서 물었고 선생은 자신의 경험과 공부와 생각을 이야기했다. 선생의 글과 책은 이 민족 성원들에게 민주주의와 통일에 대한 희망과 신념을 고무시키는 정신이었다.
△ 1975년 3월 15일 『동아일보』 편집국장을 사임하면서 송건호 선생은 “자유언론운동에 나선 젊은 기자들 해고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젊은 기자들의 목을 칠 수 없다

1974년 10월 24일 동아일보사 기자들은 역사적인 ‘10·24 자유언론실천’을 선언한다. 자유언론의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천’에 조직적으로 나선다. 보도가 일정 부분 개선된다. 이에 박정희 유신권력은 광고주에게 압력을 가해 광고 없는 신문이 발행된다. ‘백지 광고’가 그것이다. 그러나 독자들의 격려 광고가 줄을 잇는다. 거대한 광고민중운동으로 진전된다.
박정희 정권은 동아일보사의 신문・방송・잡지・출판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실천운동에 본격적으로 대응한다. 회사에 압력을 가한다. 회사는 젊은 기자들의 자유언론운동이 회사의 위계질서를 무너뜨리고 경영난을 불러온다면서 앞장선 기자들을 해직시킨다. 기자들은 제작 거부 농성에 들어간다. 각계의 민주인사들이 격려차 방문한다. 그러나 1975년 3월 17일 새벽, 회사는 폭도들을 동원해 언론인들을 강제 축출한다. 결국 130여 명이 해직된다. 해직 언론인들은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긴 여정의 자유언론운동에 나선다.
1974년 가을부터 75년 봄까지 동아일보사 언론인들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의 중심에 언론인 송건호가 서 있었다. 74년 5월 편집국장에 취임하여 젊은 기자들과 호흡을 맞춘다. 금기시되던 사건들을 보도하기 시작하면서 동아일보는 자유언론실천의 새로운 장을 연다. 독재자 박정희는 자유언론을 두려워하고 사갈시(뱀이나 전갈을 보듯) 했다. 자유언론과 권위주의 권력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편집국장 송건호는 회사의 젊은 기자들 해고에 동의할 수 없었다. 75년 3월 15일 스스로 편집국장직을 던진다. 
“부하 기자들의 목을 치면서 더 이상 자리를 지킬 수 없다. 자유언론운동에 나선 젊은 기자들 해고는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편집국장 사직은 아직 학교에 다니는 여섯 자녀를 둔 송건호 그 개인에겐 고단한 삶의 시작이었지만, 언론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재야운동가·역사저술가로서 역사적인 과제들이 그에게 주어졌고 그것을 해내게 된다. 
“언론은 그 어떤 정치적인 개인이나 세력, 어떤 기업으로부터 영향받지 않는 독립된 자세로 보도하고 비판해야 한다. 나는 언제나 기자다. 어떤 권력과도 관련 맺지 않는다. 언론인이 어느 한편에 들면 그 생명은 그날로 끝장난다.”

‘대기자’ 송건호

한길사는 1977년 9월 송건호 선생의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를 ‘오늘의 사상신서’ 제1권으로 펴내면서 출판을 시작했다. 한길사는 1990년대 초까지 192권의 ‘오늘의 사상신서’를 펴내게 되는데, ‘언론인 송건호’와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는 한길사의 지향과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 권의 책이었다.
1976년 12월 24일에 출판 등록을 한 한길사는 우리의 민족문제와 민주주의 운동, 민족사를 중요한 주제로 삼았다. 『여론』이란 고전적인 책을 저술한 미국의 언론인 월터 리프먼의 칼럼 ‘오늘과 내일’이 있었지만, 나는 오늘과 오늘의 사상을 중시하는 출판을 하고 싶었다. 우리 국가와 사회가 어디로 지향해야 하는가를 책을 통해 전망해 보고 싶었다.
한 지식인의 인식 체계란 그가 살아가는 그 시대의 역사적 삶의 실천과정에서 거듭 태어날 것이다. 지식인이란 그가 살아가는 그의 공동체적 상황에 가혹하게 내던져짐으로써 그 시대와 상황의 현실과 구조를 더 분명히 인식하게 되고, 그 상황과 현실을 극복하는 사상과 논리를 체득하게 될 것이다. 그해 동아일보사를 스스로 퇴사한 그 이후 일련의 역사적 실천과정 속에서 언론인 송건호의 논리와 지성은 한층 심화·발전하는 것이었다.
언론사의 현직에 몸담고 있지 않으면서도 송건호는 ‘대기자’ 또는 ‘참언론인’으로서 언론 일을 하게 된다. 1975년 현직을 떠남으로써 오히려 더 본격적이고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펴게 되고, 민족과 현실의 문제를 구조적이고 치열하게 인식하려는 독자들에게 주목받는다. 1970년대와 1980년대라는 역사적 상황은 문제 저작을 써내는 ‘저자 송건호’를 탄생하게 했다. 한 권의 책이란 어느 날 느닷없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그에게서 다시 확인하게 된다.
△ 한국현대사 저술가이기도 한 송건호선생은 “언론인은 뚜렷한 역사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언론인은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오늘에 살아 있는 역사를 다루어야 한다.”
1978년에 나는 15인의 에세이집 『어떻게 살 것인가』를 기획했다. ‘어떻게 살 것인가’는 그 시대 우리들의 화두였다. 나는 김수환 추기경, 법정스님, 송건호 선생, 박경리 선생, 고은 선생, 신경림 선생 등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를 물었다. 송건호 선생은 ‘상식의 길: 한 언론인의 비망록’이라고 제목 붙인 글에서 분단시대를 사는 언론인으로서 스스로의 삶의 자세를 말했다.
“민족언론은 민족의 자주·자립을 주장하며 강한 민족적 긍지와 자존심에 불타 있어야 한다. 민족언론은 사회과학적 이론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사회과학이 바탕이 된 언론만이 민족의 현실을 옳게 인식할 수 있고 옳은 길을 걸어갈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언론인은 사상가가 되어야 한다. 신문기자라고 해서 한낱 재능인으로서, 어느 때는 이런 글을 어느 때는 저런 글을 쓰는 대서소 서기와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선생은 분단시대의 민족언론은 통일을 위한 르네상스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창했다. 민족정신을 각성시키는 민족언론이 선생의 언론관이었다.
“이 땅의 언론은 국제냉전의 하수인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민족의 생존을 위하고 민족의 이익을 옹호해야 한다. 이데올로기가 다르고 체제가 달라도 우리는 같은 민족이며, 동질성은 본질적이고 이질화는 일시적이며 표면적이고 부분적이라는 민족 본래의 자각을 불어넣어야 한다. 같은 동족끼리 외세의 하수인이 되어 무엇 때문에 언제까지 반목하고 경원시해야 하는가.”

‘지금 이곳'의 역사에 대한 관심

한 언론인으로서 자신에게 요구되는 당위를 성찰하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송건호는 이 땅의 현대사를 읽고 연구한다. 그의 언론관에 일관되어 흐르는 바가 바로 ‘언론의 역사성’이다. 현실과 유리되어 있는 박제된 역사가 아니라 오늘에 살아 있는 역사다.
“언론인이 주어진 사실의 그 전모와 의미를 보도하려면, 뚜렷한 역사의식에 입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의 주체적 입장, 민족적 입장에서 보도해야 한다. 역사의식에 투철한 사람일수록 민족의식이 뚜렷하며 후퇴 아닌 전진적 자세를 취한다. 뚜렷한 역사의식은 지금 생성하는 오늘의 사실에 대한 해석·평가의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지나간 사실들에 대한 해석·평가를 찾는 가치기준이 되고, 시대에 대한 전망에 있어서도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다.”

‘지금 이곳’에 대한 관심이 그를 현대사 연구 및 저술에 나서게 했다. 그는 언론인이라는 자유분방함으로 학계의 금기 구역에 뛰어들었다. 일제강점기의 민족사·민족운동사를 다룬 『한국현대사론』의 저작은 그 일환이었다. 1930년대와 1940년대의 일제 통치사에 대한 서술조차도 하나의 금기에 속했던 것이 해방된 이 땅의 현실이었다. 그러나 그는 '민중을 주체로 하는 역사'로서, 이 시기의 민족사・민중항쟁사를 과감하게 써낸다. 한국신학연구소 안병무 선생의 요청과 지원으로 저술한 이 책의 서론에서 선생은 현대사 연구의 당위성을 천명한다.
“신생국 사학계는 국사 연구의 첫 과제가 자기 민족이 어찌하여 이웃 나라의 식민지로 전락했으며, 식민지로서 어떠한 통치를 받아왔으며, 자기 민족이 외세통치에 어떤 저항을 했고, 또 한편 민족 속에서 누가 동족을 배반해 식민종주국에 충성을 바쳤으며, 그들이 왜 민족구성원으로서의 구실을 못 하고 외세에 영합하게 되었는가, 신생국으로서 낡은 식민주의 잔재를 청산하는 길은 무엇이며, 식민주의 잔재가 오래도록 남아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이며, 그 잔재와 싸우는 길은 무엇인가 등이 연구되지 않으면 안 된다. 신생국으로서 진정 자주의식에 불타 있으면 근대·현대사 연구의 필요성을 더욱 느끼게 된다.”

우리 민족의 현대사 또는 민족운동사는 해방이 되었지만 민족과 국토의 분단과 이데올로기의 갈등으로 그것에 대한 정당한 인식과 타당한 서술을 어렵게 했다. 분단의 비극은 우리의 현대사 서술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이러한 제약조건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초·중반부터 그것에 대한 정당한 인식 작업이 이 땅의 뜻있는 지식인들과 젊은 연구자들에 의해 시도되었다. 정치적 상황의 악화 속에서 오히려 더 진지하게 연구되기 시작했고 일정한 성과를 거두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의 역사뿐만 아니라 해방 전후의 역사인식으로 진전하고 있었다.
△ 한길사는 ‘오늘의 사상신서’ 제1권으로 1977년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를 펴냈다. 그 이후로 나는 송건호 선생을 매일 만났다. 우리의 약속 장소는 인사동 고서점이었다.
『한국민족주의의 탐구』를 출간한 이후 나는 송건호 선생을 거의 매일 만났다. 선생과의 만남은 곧 어떤 책을 펴낼 것인가를 토론하는 것이었다. 유신권력이란 궁극적으로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나는 1978년부터 한 시대를 뒤흔드는 한 권의 책, 『해방전후사의 인식』을 기획하게 된다. 1979년 10월 15일, 대통령 박정희가 부하 김재규에 의해 시해되는 10·26정변이 일어나기 11일 전에 ‘역사적인 한 권의 책’ 『해방전후사의 인식』 제1권이 탄생한다. 8·15해방이 되었지만 통일된 민족국가로 자주독립하지 못하고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전쟁까지 하게 되는 비극의 역사를 겪는 우리 현대사에 대해 나는 묻고 싶었다. 왜 분단되었을까? 외세에 의해 분단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랬을까? 분단되지 않고 자주독립할 수 없었을까?
나는 동시대의 지식인들에게 이런 문제를 함께 규명해 보자는 주제를 던졌다. 송건호 선생에게 말씀드렸고 선생도 정말 좋은 구상이라면서 직접 한 편을 쓰겠다고 했다. 선생의 ‘해방의 민족사적 인식’은 이렇게 해서 집필되는데, 1979년 7월 초순에 선생의 이 글을 받아 읽고 나는 이런 수준과 내용의 글들이라면 책이 자신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송건호 선생의 많은 논설·논문 가운데 ‘해방의 민족사적 인식’이 대표적인 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제국주의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해방된 것은 틀림없었으나 해방의 날이라고 하는 바로 8월 15일을 계기로 남에는 미군이, 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여 국토와 민족의 분열이 시작되었다. 이 분열로 6·25라는 동족상잔을 겪고 그 후 30년간 남북 간의 대립은 날로 심화되어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막강한 군사력으로 상호 대립하여, 언제 또 6·25보다 더 파괴적인 동족상잔이 빚어질지 모르는 불안하고 긴장된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이 통에 민주주의가 시련을 겪고 민족의 에너지는 그 대부분이 동족상잔을 위한 새로운 군사력을 위해 소모되고 있는 암담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것이 이른바 ‘해방된’ 이 민족의 현실이다.”

민족의 가능성을 압살한 이승만과 친일파

민족의 해방과 통일은 송건호의 주제였다. 민족의 자주적인 힘에 의해 해방되지 못함으로써 그 이후의 민족사가 왜곡되고,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도 시련을 겪고 있다는 것이 그의 실천적 역사인식이었다. 선생이 발표한 글 대부분이 민족의 자주와 해방과 통일을 주제로 삼고 있다. 해방 전후사와 해방 이후사에 대한 논술에 그는 민족주의 사관을 철저하게 적용시키고 있다. 그의 역사논술은 따라서 과학으로서의 역사라기보다 가치로서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지난날이나 오늘날이나 자주적이 못 되는 민족은 반드시 사대주의자들의 득세를 가져와 민족윤리와 민족양심을 타락시키고, 민족 내분을 격화시키고 빈부격차를 확대시키며 부패와 독재를 자행하여 민중을 고난의 구렁으로 몰아넣게 된다. 민족의 참된 자주성은 광범한 민중이 주체로서 역사에 참여할 때에만 실현되며, 바로 이러한 여건 하에서 민주주의는 꽃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미 30년이 지난 8·15의 재조명은 바로 오늘을 위한 연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8·15 직후에는 분단이 고정된 것도 아니고 어떤 주의가 지배적인 것도 아니었다는 것이 선생의 역사인식이었다. 우리 민족은 무한한 가능성 앞에 놓여 있었다. 이 민족의 가능성을 무산시킨 가장 큰 요인을 언론인 송건호는 냉전에 편승한 이승만 노선과 친일 지주세력으로 이루어진 한민당 노선에서 찾고 있다.
“외세를 배경으로 한 냉전 편승세력은 민족 일부에서 싹트기 시작한 민족주의 운동을 궁지로 몰아넣어 설 땅을 잃게 하고 1948년 8월 마침내 단독정부를 세워 이들 자주세력을 남북으로 흩어지게 하고 혹은 좌절시키기도 했으며, 그 후에는 존재조차 사라지고 만다. 냉전에 편승하여, 친일 지주세력의 엄호 하에 권력을 잡은 이승만과 그 추종자들은 ‘민족의 자주·통일정부 수립’이라는 위대한 명분을 내걸고 몸으로 실천하는 김구를 1949년 6월 26일 한 현역군인을 시켜 숨지게 했다. 김구의 비극은 냉전파에 의해 무참히 쓰러지는 민족자주세력의 비극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 준비위원회 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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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진
원고김언호 동아투위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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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허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