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정부, 국회, 법원 등 국가기구에 배정된 특수활동비 예산이다. 특수활동비는 일명 꼬리표 없는 예산으로 불린다.
누가, 언제, 어떤 목적으로, 얼마를 썼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특수활동비는 구체적인 사용 내역과 영수증 증빙 없이 사용액만 국회에 보고한다. 이 때문에 역대 정권마다 부정 사용 의혹이 끊이지 않았다.
특이한 것은 특수활동비가 가장 많이 필요할 것으로 보이는 국가정보원에는 공식 배정된 특수활동비가 0원이라는 점이다.
나라 살림의 2019년 결산 내역을 보면 모두 17개 기관이 2471억 원의 특수활동비를 사용했다. 국방부(1058억 원)와 경찰청(776억 원), 법무부 및 검찰청( 217억 원)은 대통령 비서실과 국가안보실(96억 원)보다 더 많은 특수활동비를 사용했다.
이어 대통령 경호처(84억 원), 해양경찰청(82억 원), 과학기술정통부(44억 원), 국세청(34억 원), 감사원(23억 원), 통일부(21억 원), 국회(12억 원), 국무조정실 및 국무총리비서실(7억 원, 원), 외교부(7억 원), 관세청(4억 원) 등의 순이었다.
업무추진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고 약속한 문재인 정부
1698억 원.
이른바 ‘묻지마 예산’인 특수활동비 못지 않게 사용 내역이 베일에 가려진 예산은 또 있다. 예전엔 ‘판공비’로 불렸던 업무추진비다. 올해 배정된 업무추진비 예산은 1698억 원. 2019년 결산액 기준 1739억 원보다 소폭 줄었다. 2019년 당시 국방부가 가장 많은 483억 원의 업무추진비를 사용했고, 외교부(169억 원)와 대법원(135억 원), 국회(111억 원), 경찰청(86억 원) 법무부와 검찰청(77억 원), 대통령비서실 및 국가안보실(71억 원), 행정안전부 (46억 원), 중앙선관위(34억 원) 등이 뒤를 이었다.
2019 결산 기준 업무추진비 지출액을 확인한 결과 국방부가 국가 전체 업무추진비 예산의 3분의 1 이상을 사용했다.
문재인 정부는 업무추진비를 투명하게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지난 2019년 2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이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정부는 관계부처 합동으로 ‘2019 정부 혁신 종합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특히 예산과 조직 법령 등 핵심 정책 과정에 국민 참여를 확대하고, 관심 정보를 알기 쉽고 투명하게 공개하겠다고 했다. 이를 위해 업무추진비 등 예산 집행의 중점 공개분야를 선정, 상세 공개 기준을 표준화하고 일괄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실상은 속 빈 강정, 부적절한 지출 여부 검증 불가
8억 6048만 원.
정세균 전 국무총리가 2020년 한 해 동안 업무추진비로 쓴 국민의 세금이다. 지난해 우리나라 4인 가구 도시근로자 월평균 소득(622만 원)의 138배, 최저 임금으로 따지면 국민 10만 명의 한 시간 시급이다. 정세균 총리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위해 업무추진비를 사용했을까?
뉴스타파는 국무조정실 및 국무총리비서실 홈페이지와 정보공개 청구를 통해 정 전 총리의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을 들여다봤다.
국무총리비서실이 공개한 정세균 전 총리의 업무추진비 사용내역에는 현장방문 위로격려 등 4가지 항목의 총 사용 금액만 간단히 공개돼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국민들은 정 총리가 사용한 업무추진비의 세부 내역을 알 수 없게 돼 있다. 총리의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은 1년에 딱 2번 공개된다. 상반기 사용내역을 모아 8월말에 공개하고, 하반기 사용액은 이듬해 2월말 공개된다.
세부 사용 내역에 대한 정보 역시 부실하기 짝이 없다. 정 전 총리가 언제,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 어떤 목적으로 국민의 세금을 사용했는지 구체적인 집행 내역은 모두 비공개 돼 있다.
정책조정 및 현안대책 관련 회의, 민생 현장방문 관련자 위로 격려, 민의수렴 및 국정홍보를 위한 간담회, 내외빈 초청 등 관련행사. 이 네가지 항목으로 나눠 정 전 총리가 사용한 업무추진비 총액을 뭉뚱그려 놓았을 뿐이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지난해 1년간 6050만 원을 업무추진비로 사용했다. 업무추진비 사용액이 많은 10개 부처 장차관급 공무원의 평균 사용액 3829만 원보다 1.58배 더 썼다. 1건당 사용액은 평균 38만 원으로 2배 많았다.
하지만 대검찰청이 공개한 자료에는 윤 전 총장이 언제, 어디서, 몇 명을 만나 업무추진비를 사용했는지에 대한 세부 정보가 빠져 있어 부적절한 지출 여부를 검증할 수 없다.
노무현 정부 시절. 초대 국무총리를 맡은 고건 전 총리는 자신의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을 공개했다. 고건 총리는 또 공개 요청이 있을 경우 구체적인 사용 내역을 밝힌 지출품의서와 영수증 등 증빙서류 일체를 모두 공개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위해 국무총리 훈령 제442호를 제정, 행정정보 공개의 확대를 위한 지침을 마련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2012년 이 훈령을 폐지했다. 명목상으로는 사문화된 총리 훈령을 공공기관 정보 공개에 관한 관련법에 통합했다는 것. 그러나 통합 과정에서 지출품의서와 영수증 등 업무추진비 지출 내역을 검증할 수 있는 원문공개 조항이 사라졌다. 공무원들이 일방적으로 전달한 정보를 곧이곧대로 믿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됐다.
문재인 정부는 지난 2019년 2월 ‘정부 혁신 종합 추진계획’을 통해 장차관에서 실국장까지 업무추진비 공개 대상을 확대하고 공개 기준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실제 제도 도입에는 1년이 넘게 걸렸다. 강화된 공개 기준이 시행된 것은 2020년 3월.
업무추진비 공개 기준에 사용일자와 시간, 장소를 추가하고, 공개 대상에 기존 장차관과 청장, 기관장외에 본부 실장 및 국장급 공무원을 포함하도록 했다. 공개 주기도 기관 자율에서 매월 또는 분기로 강화됐다.
사용내역 공개된 업무추진비, 전체의 8.5% 불과
국민의 알권리는 얼마나 충족됐을까?
뉴스타파가 정부 부처와 위원회 48곳의 업무추진비 사용실태를 전수 조사한 결과, 공직사회 코로나 19 방역 대책이 강화된 지난해 11월 23일부터 연말까지 국장급 이상 공무원 698명이 모두 6,355 차례 총 9억 4천여만 원의 업무추진비를 사용했다. 1년간 매달 동일한 금액의 업무추진비를 사용했다고 가정하면 실국장 이상 고위공무원들의 업무추진비 사용액은 113억 원 안팎. 2019년 결산 기준 정부 각 부처가 사용한 업무추진비 1332억 원의 8.5%에 불과하다.
강화된 정보공개 기준도 유명무실했다. 업무추진비 사용인원을 제대로 표시하지 않은 공무원은 127명. 경찰청 소속이 24명으로 가장 많았고, 행정안전부(23명), 검찰청(22명), 국가보훈처와 식품의약품안전처(각 9명) 등의 순이다.
업무추진비 사용 시간을 누락한 공무원은 310명, 사용장소를 밝히지 않은 공무원은 48명이었다.
이른바 힘있는 기관들은 정보공개 확대 시행 대상에서 아예 제외됐다. 대통령비서실과 국가안보실, 대통령경호처, 국무조정실 및 국무총리비서실, 감사원 등이 대표적이다. 또 청 단위 기관으로는 유일하게 대검찰청이 수혜를 입었다.
대검찰청은 “업무추진비 세부 내역에 수사 업무 관련 사항 등이 포함돼 있어, 이를 공개할 경우 직무 수행을 현저히 곤란하게 할 우려가 있다”고 해명했다.
몇 시에, 어떤 장소에서, 몇 명과 함께, 업무추진비를 사용했는지를 공개하는 게 직무 수행에 차질을 준다는 검찰의 주장은 납득하기 어렵다. 해양경찰청은 국실장 이상 고위 공무원들의 업무추진비 세부 내역을 모두 공개하고 있고, 경찰청 간부들 역시 사용인원과 장소를 대부분 공개하고 있다.
정보공개 확대해 업무추진비 집행 투명성 확보해야
업무추진비 사용 시간과 장소, 사용인원 수를 공개하는 것은 업무추진비 집행의 투명성 확보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뉴스타파는 지난 2월 강은호 방위사업청장의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을 분석, 강 청장이 서울 용산의 한 한정식집에서 기자들에게 1인당 6만 원이 넘는 음식과 술을 접대해 김영란법을 위반한 사실을 밝혀냈다. 또 전현희 국민권익위원장과 공정위 국장들의 김영란법 위반 의혹과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의 코로나 19 방역수칙 위반 의혹을 제기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국가 예산은 투명하고 공정하게 집행되야 한다. 정부는 국민의 알권리 충족과 예산 집행의 투명성 제고를 위해 업무추진비 집행 내역을 빠짐없이 공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