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29일 토요일 서울 용산구 이태원동 119번지 일대. 핼러윈 데이를 앞둔 주말, 이날 이태원역에는 약 13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지난 5년 동안 가장 많은 인원이 모인 날이었다. 이태원역 1번 출구에서부터 세계음식문화거리로 이어지는 좁은 골목길. 가장 번화하면서도 비좁은 이곳은 3년 만에 해제된 사회적 거리두기로 오랜만에 축제를 즐기려고 모인 사람들로 일찍부터 붐볐다.
참사를 막을 수 있는 순간들은 있었다
▲ 이태원역 1번 출구. 지난 10월 29일 하루 13만여 명이 이 역을 이용했다.
사람들이 특별히 많이 모였다고 사고가 날 일은 아니었다. 거리에서 목숨을 잃을 일은 아니었다. 참사 당일 시민들은 수십 차례 정부에 비상신호를 보냈다. 구조 신호를 보냈다. 정부의 재난 안전 관리 체계는 먹통이었다. 재난을 예방하고 시민의 안전을 책임져야하는 주요 지휘자들은 그날 자리에 없거나, 너무 늦게 상황을 파악했다.
3년 만에 축제를 즐기려고 거리에 모였던 158명은 그렇게 목숨을 잃었다. 왜 이런 일이 발생했을까. 왜 정부는 3년 만에 방역 지침의 빗장을 풀어놓고는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을까. 왜 시민들이 보낸 위험 경고를 무시했을까.
뉴스타파는 그 이유를 알기 위해 이태원 참사 전후의 타임라인을 촘촘히 그려봤다. 지금까지 정부가 발표한 자료와 국회를 통해 입수한 사건 관련 기록들, 다른 언론의 보도와 뉴스타파가 입수한 CCTV 등을 모두 종합해 이태원 참사 전후의 타임라인을 재구성했다. 그 결과, 이태원 참사를 막을 수 있었거나 피해를 줄일 수 있었던 기회들이 여러차례 보였다. 그런 기회들 가운데 7번의 결정적 순간을 꼽아봤다.
결정적 순간 1. 대책 없던 대책 회의
첫 번째 결정적 순간은 이태원 참사 나흘 전인 10월 25일부터 10월 27일까지의 시간이다. 3년 만에 거리두기가 해제되고 맞이하는 핼러윈 데이. 이날을 미리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진작부터 나왔다. 이 기간 용산구청과 용산경찰서 정보과, 이태원 파출소에선 ‘참사 당일 인파가 대거 몰릴 것이다’, ‘안전 대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무시됐다.
▲참사 발생 나흘 전, 이태원 일대를 담당하는 이태원 파출소장은 서울경찰청에 교동기동대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말했다. 참사 당일에는 용산 경찰서 경찰관도 오후 7시 30분부터 교통기동대 투입을 요청했다. 실제 교통기동대는 1개 제대 20명이 참사 발생 45분 전에야 투입됐다.
용산구청은 핼러윈을 앞두고 세 번이나 대책회의를 열었지만, 안전 대책은 마련하지 않았다. 박희영 용산구청장은 세 번의 회의에 모두 참석하지 않았다. 용산경찰서는 핼러윈을 대비해 경찰기동대를 지원하는 등 경력 200여 명을 투입하겠다고 보도자료까지 냈지만, 이 계획은 지켜지지 않았다. 참사 당일 투입된 경력은 137명에 불과했다. 인파가 몰리는 곳의 혼잡경비를 할 수 있는 기동대는 단 1개 부대도 배치되지 않았다. 이유가 뭘까. 경찰의 관심은 시민들의 안전보다는 다른 곳에 집중돼 있었다.
결정적 순간 2. 참사 전날도 사람이 넘쳤다.
참사 전날인 10월 28일 금요일 이태원역의 이용객은 5만 9000여 명으로, 지난 5년 중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언론에서는 ‘10월 29일 이태원 일대에 구름 인파가 몰릴 것이다’, ‘도로 혼잡이 우려된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참사 하루 전날만이라도 경찰 지휘부가 이태원 인파를 대비한 경비 계획을 세웠다면 어땠을까.
▲당일 이태원에 배치된 경찰 현황. 전체 투입 경력 137명 중 사복 경찰이 69명이었다. 혼잡 경비를 담당할 기동대는 배치되지 않았다. (출처 : 전용기 의원실이 용산경찰서로부터 받은 자료)
하지만 참사 전날에도 경찰 지휘부의 관심은 마약 단속과 집회 관리에 있었다.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은 이날 전 지역 경찰서에 ‘핼러윈 데이 대비 마약류 범죄 예방·단속을 위한 특별형사활동계획’을 하달했다. 서울청 경력운용계획에 따르면, 서울경찰청장이 운영할 수 있는 기동대의 절반 이상(48개 부대)이 용산 대통령실 인근 집회 관리에 배치됐다. 서울청이 미리 세운 참사 당일 서울청 경비 계획에 이태원은 없었다.
결정적 순간 3. 위험 경고
10월 29일 참사 당일. 이날 이태원에 몰린 인파가 심상치 않다는 건 이날 오후 6시대부터 감지됐다. 이날 이태원역 하루 이용객(13만 명)의 절반 가량인 6만 3000여 명이 저녁 6시부터 밤 10시 사이에 집중됐다. 시민들은 오후 6시 34분부터 비상 신호를 보냈다. 112에 전화를 걸어 “압사당할 것 같다, 통제가 필요하다”고 11차례나 신고했다.
▲참사 당일 이태원역에 모인 13만 명 중 절반 가량(6만 3000명)이 오후 6~10시 사이에 몰렸다. 오후 8~9경이 최고조로 몰린 시간대로 1시간에 1만 7000여 명이 이태원역을 이용했다.
현장 경찰관도 추가 경력 투입의 필요성을 느꼈다. 오후 7시 30분경 현장에 있던 용산경찰서 경찰관이 용산서 교통과에 혼잡한 이태원 일대 교통을 관리할 교통기동대를 파견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이번에도 “집회 관리를 해야 한다”는 이유였다.
결정적 순간 4. 긴급 상황 ‘코드 0’
참사 발생 2시간 전인 저녁 8시 30분 경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 집회가 마무리됐다. 이날 저녁 8시부터 9시, 이태원에는 사람들이 최고조로 모이고 있었다. 이때라도 집회에 동원됐던 기동대를 급히 이태원에 투입했다면 어땠을까.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 집회 장소와 이태원 사고 현장까지는 1.4km 불과했다. 하지만 이때도 이태원에는 기동대가 투입되지 않았다. 집회에 동원됐던 5개 기동대는 이태원에 투입되는 대신 원래의 근무지로 복귀했다.
▲이태원 참사 당일 112 신고 녹취록
같은 시각, 서울청 112종합상황실에 ‘사람들이 길바닥에 쓰러지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서울청 112상황실은 곧바로 이태원 파출소에 ‘코드1’ 지령을 내렸다. ‘코드 1’은 생명과 신체에 위험이 임박한 경우에 내리는 우선 출동 명령이다. 20분 뒤인 8시 53분 다시 한 번 “압사당하고 있다, 아수라장”이라는 신고가 접수됐고, 7분 뒤인 9시, “대형사고 일보 직전”이라는 신고가 추가로 접수됐다. 이 신고에 112상황실은 ‘코드 0’를 지정했다. 코드 0는 코드 1 중에서도 가장 시급히 출동해야 하는 강력 범죄나 긴급 상황에 해당하는 사건에 붙는 지령이다.
경찰청 112 신고 접수 매뉴얼에 따르면, 대형 재난이나 재해 등 동시 다발 신고가 예상되는 경우 접수자는 상황실 팀장에게 보고하고 상황팀장은 이를 모든 근무자에게 공유해야 한다. 코드 0과 같은 긴급사건의 경우 상황실 판단에 따라 서울청에서 다른 경찰서에 출동 지원을 지시할 수 있고, 가용경력을 총 동원할 수 있다. 하지만 매뉴얼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렇게 참사의 징후가 시민들의 코 앞에 다가왔다.
결정적 순간 5. 참사 발생
▲참사 발생 시각 이전에 걸려온 119 신고 전화 녹취 내용
10월 29일 오후 10시 12분. 경찰이 아닌 서울소방방재센터 119종합상황실에 "숨이 막힌다"는 신고 전화가 처음 걸려왔다. 그리고 3분 뒤인 10시 15분. "압사 당하게 생겼다"는 두 번째 신고가 접수됐다. 이 신고를 받고 용산소방서 119구조대가 출동했다.
이 때부터 119종합상황실에 신고 전화가 빗발쳤다.
“숨이 막힌다”, “죽을 것 같다”, “압사당할 것 같다”, “살려달라”...10시 12분부터 30분간,약 30초 간격으로 54건의 119 신고 전화가 쇄도했다. 결국 참사가 발생했다. 하지만, 참사가 벌어진 후에도 정부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참사 직후, 국가의 재난 안전 책임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결정적 순간 6. 멈춘 지휘부
참사 발생 이후, 기동대 투입은 1분 1초를 다툴 정도로 시급했다. 하지만 기동대를 투입할 권한을 갖고 있던 주요 지휘부들은 참사 이후에도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경찰기동대 운영규칙에 따르면, 전국의 기동대 파견 권한은 윤희근 경찰청장, 서울 전역의 기동대 파견 권한은 김광호 서울경찰청장에게 있다. 이임재 용산서장은 서울청에서 배속받은 용산 관할 기동대만 파견할 수 있었다. 기동대 출동 권한을 쥔 경찰 지휘부들은 그날의 상황을 보고 받지 못했거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한 주요 지휘부의 사고 인지와 현장 도착, 첫 지시 시점
행정당국도 이날의 이태원 거리에는 관심이 없었다.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에 따른 보고 체계는 무너졌다. 이 법 제20조(재난상황의 보고)에 따르면, 재난이 발생했거나 발생할 우려가 있는 경우 지자체장은 행안부 장관에게 지체없이 보고해야 하지만, 서울시장과 용산구청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재난문자 발송 권한이 있는 행안부와 서울시, 용산구는 참사 발생 1시간 후인 자정 경에야 '용산구 이태원 해밀톤 호텔 앞 긴급사고로 현재 교통 통제 중. 차량 우회바랍니다'라는 재난 문자를 발송했다.
결정적 순간 7. 뒷북 지시
참사가 발생하고 심정지 환자가 15명 이상 나온 11시 경. 이 때라도 정부가 신속하게 대처했다면, 그래서 응급구조와 중환자 병원 이송이 원활하게 이뤄졌다면 피해를 조금은 줄일 수 있지 않았을까.
이상민 행안부 장관보다 20분 먼저 참사 발생 사실을 보고 받은 윤석열 대통령. 윤 대통령은 밤 11시 01분 사고 사실을 보고 받고 오후 11시 21분 “행정안전부 장관을 중심으로 신속한 구급과 치료가 이뤄질 수 있도록 해달라”라는 지시를 행안부에 전달했지만, 현장에서 별다른 효력이 없었다.
그 시각에 참사 현장은 구급대 진입조차 어려운 상황이었다. 무엇보다 경찰 기동대 투입이 절실했지만, 경찰 지휘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경찰 기동대는 참사 발생 1시간 25분이 지난 11시 40분이 되어서야 처음 사고 현장에 도착했다.
▲참사 당일 소방 무전 녹취록. 참사 발생 이후인 오후 11시대에도 소방 쪽에서는 현장 통제를 위한 경찰 투입을 독촉했다.
이미 아비규환 상황이었던 이태원 일대는 그 이후로도 한동안 통제되지 않았다. 소방 무전 녹취록을 살펴보면, 서울 전역에서 이태원을 향해 출동한 응급구조대들은 도로 상황 때문에 사고 현장에 제때 도착하지 못했고, 뒤늦게 도착한 뒤에도 진입로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소방당국은 10시 15분부터 1시간 사이 경찰 출동을 20차례나 독촉했다. 천금같은 골든타임이 사람들 틈 사이로 흘러갔다. 서울경찰청이 출동을 지시한 마지막 기동대는 참사 발생 다음 날인 오전 1시 33분에 도착했다. 이미 대형 재난을 알리는 소방대응 3단계가 발령되고,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후였다.
이태원 참사 전후의 타임라인을 따라가다 보면, 시간을 다시 돌리고 싶은 안타까운 순간은 위에 언급된 시점 외에도 너무나 많다. 뉴스타파가 재구성한 자세한 타임라인은 참사의 진상에 관심을 가진 모든 시민들이 참고할 수 있도록 별도의 특별 페이지를 통해 공개한다.
📰 <이태원 참사, 부재의 시간> 특별 페이지 바로 가기 https://pages.newstapa.org/n2211_time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