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이 상황이 언제 끝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내란 관련 기록의 폐기를 막고, 그것이 없어지지 않게 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작게는 내란의 증거로, 크게는 역사적 기록이라는 차원에서 기록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기록물 폐기금지’ 제도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공공기록물법 27조 3(기록물의 폐기금지)은 국가기록원장은 “국가적으로 중대한 사안으로서 조사기관 또는 수사기관의 요청이 있거나 국민의 권익 보호를 위하여 긴급히 필요한 경우 등 기록의 폐기금지를 결정하고 해당 공공기관 및 영구기록물관리기관에 통보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또 기록물 폐기금지 조치 및 관리 실태 등을 확인하기 위해 해당 기관에 대한 기록물 관리 현황조사 등을 실시하고, 필요한 경우 시정 조치를 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즉, 국가기록원장은 내란이 발생한 지금 국민 권익 보호를 위해 관련 기관에 기록 폐기를 금지할 수 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국가기록원은 지난 12월 6일 대통령실 등 비상계엄 선포 관련 기관에 계엄 관련 기록을 철저히 관리하고 만약 이를 어기면 처벌받는다는 내용의 <「2024.12.3. 비상계엄선포」 관련 기록물의 관리 철저 협조 요청>이라는 공문을 보냈다. 국가기록원이 이렇게 공문을 시행하면 그것으로 충분할까?
국가기록원, 대통령실에 "파기하면 처벌" 공문 보낸 것으로는 충분치 않아
국가기록원의 이 공문 시행은 면피성 조치이고, 여론을 호도하는 일이다. 한국기록전문가협회 등 기록관리 단체들은 계엄이 일어나자 탄핵 다음 날인 12월 4일 <반헌법적인 계엄령 선포를 역사에 기록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계엄 관련 기록을 철저히 해야 한다고 행정안전부, 국방부, 국가기록원과 대통령기록관에 공문을 보냈다. 방첩사령부에서 문서를 폐기하고 있다는 뉴스가 전해졌을 때다.
아마 그런 상황에서 국가기록원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관련 기록이 폐기될 때에 그것을 막을 법률적 조치가 있었음에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나면 내란 동조자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가기록원은 공공기록물법에에 ‘폐기금지’ 제도라는 확실한 조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그걸 시행하지 않고 형식적인 공문 시행을 하는 것에 그쳤을까?
2019년 ‘폐기금지’ 제도가 도입된 이후 두 번의 폐기금지 요청이 있었다. 채해병 사건과 관련해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이하 공수처)와 이태원 참사와 관련해 이태원참사특별조사위원회(이하 이태원특조위)가 국가기록원에 폐기금지를 요청했다. 그러나 국가기록원은 두 기관의 요청을 아직 시행하지 않고 있다.
공수처는 지난 7월 17일 채해병 사건과 관련하여 대통령실, 국방부, 경찰청의 관련 부서 기록을 재판 확정시까지 폐기금지해달라고 요청했다. 이태원특조위는 지난 10월 8일 대통령실 국정상황실, 서울소방재난본부, 서울 용산구보건소 등 21개의 기관에 폐기금지를 시행해 달라고 했다(이태원특조위 ‘10·29이태원참사 관련 기록물 폐기금지 및 보유·폐기목록 제출 요청’ 보도자료 참고).
그런데 국가기록원은 공수처와 이태원특조위의 요청을 아직 이행하지 않고 있다. 공수처의 요청은 6개월이, 그리고 이태원특조위의 요청은 2개월이 지나고 있다. 국가기록원은 “아직 실무 준비가 되지 않았다”라며 시행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고 한다. 요청에 따라 공문 시행을 하면 되는데, 2개월 이상 실무 준비를 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 국가기록원은 아마도 대통령실과 행정안전부의 처분을 기다리는 것 아닐까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아직 시행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국가기록원, 당장 폐기금지 제도 시행해야
국가기록원이 최근 시행한 “기록관리 철저하게 하고, 기록을 무단 폐기하면 처벌받는다”라고 경고하는 공문으로 충분하지 않느냐는 생각을 할 수 있다. 미디어에서는 국가기록원의 공문 시행을 잘한 일로 여겨 보도한다. 그러나 충분하고 적절한 조치가 아니다. 공문은 시행하면 끝이지만, 폐기금지 제도는 해당 공공기관에 대한 기록관리 현황조사 또는 점검을 실시하고 필요한 경우 시정 조치를 할 수 있다. 강하고 직접적인 규정이다. 폐기금지 통보를 받은 기록물을 폐기한 사람에게는 7년 이하의 징역이나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공공기관은 일정한 보존기간에 따라 기록을 관리한다. 보존기간이 지나면 기록을 폐기할 수 있다. 내란 관련 기록도 일반적인 보존기간에 따라 폐기될 수 있다. 예컨대 다른 법령이나 행정규칙 등을 근거로(또는 핑계로) 합법적으로 기록을 폐기할 수 있다. 국가기록원의 ‘기록관리 철저’ 공문으로는 이것을 막을 수 없다. 따라서 기록의 무단 폐기를 막으려면 국가기록원이 직접 개입하여 관리할 수 있는 폐기금지 조치를 시행하는 것이 당연하다.
내란 관련 기록이 종이문서라면 폐기했을 가능성 있어 국가기록원 공문만으로 역부족
한편, 내란 관련 기록이 비전자기록이라면 폐기될 가능성이 있다. 종이문서로 보고하고, 의사결정을 했다면 그 기록이 등록되지 않았을 수 있다. 그렇다면 언제라도 폐기될 위험이 있다. 국가기록원이 공문으로 생산된 기록을 등록하도록 강조했지만 실효성이 없다. 비전자기록으로 생산되었다면 사실상 국가기록원이 할 일이 없다. 그러나 폐기금지 조치를 시행한다면 해당 기관의 기록 생산과 관리를 현황조사하고 점검하며 필요한 시정 조치를 할 수 있다. 이렇게 조치할 수 있음에도 일상적인 공문처리로 그친다면 그것이 바로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고, 면피를 위해 일하는 시늉을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다.
국가기록원은 폐기금지를 시행하고 계엄 관련 주요 기록의 소재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계엄선포 전 국무회의 회의록(속기록)이 대상이 될 수 있다. 국무회의 회의록(속기록)이 작성됐는지, 작성됐다면 지금 어느 기관이 관리하고 있는지 확인하고, 존재한다면 그 회의록(속기록)을 적시하여 폐기를 금지하고, 법령에 따라 현황조사 및 점검을 한 뒤, 필요하다면 시정 조치를 해야 한다.
폐기금지가 폐기를 근본적으로 막는 조치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게 해도 고의로 기록을 없애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히 관련 기관에 경고하여 단 하나의 기록이라도 없어지는 것을 막는 조치라면 주저할 이유가 없다. 국가기록원은 지금 당장 내란 관련 기관에 폐기금지 조치를 하고 법에서 정한 일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