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파스]잊혀진 이름, 여성독립운동가 4편 : 항일의 불꽃, 박차정

2016년 01월 08일 18시 47분

동래일신여학교 재학 당시 차별적인 식민 교육에 항거해 동맹 휴학을 주도하는가 하면 항일여성운동의 전국적 조직인 ‘근우회’에서 활동하며 개혁적인 여성해방과 민족해방의 길을 모색했던 박차정. 서울지역 11개 여학교의 대표들을 만나 시위 방법을 논의해 1930년 1월 대규모 학생시위를 주도한 박차정은 이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한 박차정은 1930년 의열단에 합류했고, 이를 이끌던 독립운동의 거두 김원봉과 결혼해 사랑과 혁명의 길을 함께 걷는다. 1935년, 의열단 등 좌우 독립운동단체 5개를 통합한 조선민족혁명당이 창당되자 박차정은 남경조선부녀회를 결성해 조선 여성들이 총단결해 민족독립과 여성해방 쟁취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

우리 조선 부녀를 현재 봉건적 노예제도 하에 속박하고 있는 것도 일본 제국주의이고 또 우리를 민족적으로 박해하고 있는 것도 일본제국주의이다. 우리들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지 않는다면 우리 부녀는 봉건제도의 속박 식민지적 박해로부터 해방되지 못한다.

-남경조선부녀회 선언문 中-

1938년 조선의용대 창설 후 부녀복무단 단장으로 활약하며 항일투쟁의 선봉에 선 박차정은 1939년 2월, 곤륜산 전투에서 총상을 입고 그 후유증으로 1944년 34살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그토록 꿈꾸었던 독립을 한 해 앞두고 숨을 거둔 것이다.

연합국의 힘으로 해방된 한국의 남쪽은 사실상 미군정의 지배 하에 들어간다. 소용돌이치는 해방정국 안에서 독립운동가 김원봉은 친일경찰 노덕술에 체포돼 참을 수 없는 수모를 당한다.

분단과 이념의 대립 속에서 지워진 역사. 박차정은 사후 50년이 지난 1995년에서야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 받았고, 김원봉은 광복 70주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남과 북 그 어느 곳에서도 독립운동가로 살았던 삶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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