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시민들의 노력과 희생을 기리기 위해 지금까지 10개의 민주화운동을 지정·기념하고 있다. 이 10개 민주화운동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기에 벌어진 반독재 민주화운동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었지만 독재로 흐른 이승만에 저항했던 시민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2.28 대구민주화운동, 3.8 대전민주의거, 3.15의거, 4.19 혁명
쿠데타 직후 민정이양을 약속했지만 역시 독재의 길을 간 박정희에 저항했던 시민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6·3 한일회담 반대운동, 3선개헌 반대운동, 부마항쟁, 유신헌법 반대운동
군사반란에 이어 무고한 시민들을 짓밟고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에 저항했던 시민들.
6.10항쟁(왼쪽), 광주민주화운동(오른쪽)
대한민국의 현대사는 독재 권력의 폭압 통치와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민중의 처절한 저항으로 점철돼 있다. 국가와 민족에 헌신한 사람에게 바치는 최고의 영예가 훈장이지만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훈장은 주로 독재자의 수중에 있었다.독재 권력은 틈만 나면 자기들끼리 훈장 잔치를 벌이면서도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한 국민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대다수 국민들은 평생 훈장 받을 일이 없지만 권력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훈장을 많이 받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렇다면 권력의 정점에 있는 대통령은 얼마나 많은 훈장을 받을까?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또는 임기 중에 대통령에게 수여되는 무궁화대훈장을 받는다. 따라서 모든 대통령은 훈장을 한 개 이상 받게 된다.
뉴스타파 취재진이 이승만부터 박근혜까지 11명의 전,현직 대통령의 서훈 내역을 확인한 결과 최다 수훈자는 박정희로 나타났다. 박정희는 일생 동안 모두 14개(훈장 13개, 포장 1개)의 서훈을 받아 대통령들 중에서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전체에서 가장 많은 훈포장을 받은 사람으로 확인됐다.
박정희 서훈의 첫 번째 특징은 무공훈장이 많다는 점이다. 모두 7개의 무공훈장과 1개의 무공포장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무공훈장은 다섯 등급으로 태극부터 을지, 충무, 화랑, 인헌 순이고, 그 아래 무공포장이 있다. 박정희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부터 1957년까지 거의 매년 무공훈장을 받았다. 모두 7개다. 등급별로 보면 화랑 1개, 충무 4개, 그리고 을지가 2개였다. 여기에 1956년에는 무공포장을 하나 더 받았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1963년 12월 17일 대통령 취임식 당일 대통령에게만 수여되는 무궁화대훈장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보국훈장 통일장을 동시에 받았다. 보국훈장을 받은 사유는 다음과 같았다.
“5·16 군사혁명을 영도하여 사회 각 분야의 구악을 일소하고 제반 시책을 수행하는 등 복지국가 건설과 백년대계를 위한 재건사업에 공헌”(1963.12.17. 보국훈장 통일장)
그런데 박정희는 취임 1년 후인 1964년 12월 17일 태극무공훈장을 자기 자신에게 수여했다. 훈장의 사유는 1년 전 보국훈장의 사유와 사실상 같았다.
“군사혁명을 영도하여 국가안전보장에 공헌”(1964.12.17, 태극무공훈장)
이미 대통령이 된 그가 왜 또 무공훈장을 받으려고 했을까? 공식 기록 상으로는 그 이유가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태극무공훈장은 무공훈장 중에서 최고 등급으로, 무공훈장 중 당시까지 박정희가 유일하게 받지 못했던 훈장이라는 점에서 그가 ‘셀프’ 서훈을 한 의중을 유추해 볼 수 있다.
박정희에게는 훈장에 대한 욕심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64년 독일을 방문하여 국위를 선양했다며, 1975년에는 정상외교를 잘했다며 수교훈장 광화장을 자신에게 줬다. 이것이 12번째와 13번째 서훈이었다. 그에게 수여된 마지막 14번째 서훈은 10·26 이후 사후에 수여된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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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다음으로 많은 서훈을 받은 사람은 노태우와 전두환이었다. 노태우는 12개, 전두환은 10개였다. 전두환의 훈장 내역과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그의 훈장에 대한 집착은 박정희를 연상케 한다.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을 통해 정국을 장악한 전두환이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는 태극무공훈장을 받는 일이었다.
“제 3땅굴 발견과 충정작전에 공헌 10월 26일 사태 후 국가안보 및 사회안정 질서에 기여”(1980.8.22. 태극무공훈장)
특히 전두환은 대통령에 취임한 후 1983년에 스스로에게 두 건의 훈장을 ‘셀프’ 수여했다. 하나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고 다른 하나는 수교훈장 광화대장이었다.
“10·26사태 이후 극심한 사회적 혼란을 극복 국가를 누란의 위기에서 구출 제 5공화국 출범으로 국가의 기틀을 더욱 공고히 함”(1983.3.11.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국정 각 분야의 선진화와 우리나라 국제적 지위 향상에 기여”(1983.3.11. 수교훈장 광화대장)
대통령 재직 중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사람은 이승만 외에는 전두환이 유일하다. 그런데 이승만이 받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은 독립운동이 공적 사유였다. 특히 대한민국장은 건국훈장 중 최고 등급으로 이승만, 이시영, 윤봉길, 이준, 손병희, 김좌진, 안중근, 강우규, 김구, 최익현 같은 분들에게 수여된 훈장이다. 전두환은 자기 자신을 이들과 동격으로 생각한 것이었을까? 그러나 전두환이 대한민국장을 받은 사유는 군사반란이고 내란이었다. 지난 2006년 정부는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 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된 사람들에 한해서 서훈을 모두 취소했다. 그러나 노태우, 전두환이 대통령으로서 받은 무궁화대훈장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름 | 훈장종류 | 사유 | 수여일 | 서훈 취소 |
---|---|---|---|---|
전두환 | 보국훈장삼일장 | 국군의날 유공 | 1968. 10. 1 | 치탈 |
전두환 | 화랑무공훈장 | 파월유공 | 1971. 3. 31 | 치탈 |
전두환 | 충무무공훈장 | 파월유공 | 1971. 7. 23 | 치탈 |
전두환 | 을지무공훈장 | 파월유공 | 1971. 10. 29 | 치탈 |
전두환 | 보국훈장천수장 | 계엄선포기간 대학및 출동전지역의 경계임무와 치안유지및 국민 의 권익보호에 기여 | 1973. 1. 24 | 치탈 |
전두환 | 보국훈장국선장 | 대통령 경호업무 수행 유공 | 1978. 1. 23 | 치탈 |
전두환 | 태극무공훈장 | 제3땅굴발견과충정작전에공헌10월26일사태후국가안보및사회안정 질서에기여 | 1980. 8. 22 | 치탈 |
전두환 | 무궁화대훈장 | 대통령 취임 | 1980. 8. 29 | |
전두환 | 건국훈장대한민국장 | 10 26사태이후 극심한 사회적혼란을극복 국가를 누란의위기에서 구출 제5공화국출범으로 국가의기틀을 더욱 공고히함 | 1983. 3. 11 | 치탈 |
전두환 | 수교훈장광화대장 | 국정각분야의 선진화와 우리나라 국제적 지위 향상에 기여 | 1983. 3. 11 | 치탈 |
노태우 | 보국훈장삼일장 | 65415 군부내 일부장교들에 의한 반정부음모계획을 사전에 탐지하고 주동인물을 최단시일내 검거 | 1965. 7. 14 | 치탈 |
노태우 | 보국훈장삼일장 | 1967년5월9일 대규모의 무장간첩을 검거하는데 성공 | 1967. 6. 26 | 치탈 |
노태우 | 화랑무공훈장 | 파월유공 | 1969. 5. 31 | 치탈 |
노태우 | 충무무공훈장 | 파월유공 | 1969. 7. 30 | 치탈 |
노태우 | 화랑무공훈장 | 파월유공 | 1969. 8. 30 | 치탈 |
노태우 | 인헌무공훈장 | 파월유공 | 1969. 9. 17 | 치탈 |
노태우 | 보국훈장천수장 | 제26회 국군의날 포상 | 1974. 10. 1 | 치탈 |
노태우 | 보국훈장국선장 | 대통령 경호업무 수행유공 | 1979. 1. 23 | 치탈 |
노태우 | 을지무공훈장 | 국가안전보장유공 | 1980. 12. 31 | 치탈 |
노태우 | 보국훈장통일장 | 장기간 군에 재임하는동안 국가안보에 기여 | 1981. 7. 15 | 치탈 |
노태우 | 청조근정훈장 | 국가사회발전에 기여하다 퇴임 | 1983. 10. 25 | 치탈 |
노태우 | 무궁화대훈장 | 대통령 취임에 즈음하여 | 1988. 2. 25 |
최규하와 이명박은 각각 다섯 개의 훈장을 받았다. 외무 관료 출신이었던 최규하는 수교훈장을 두 개 받았고 대통령 퇴임 후에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대통령 재임 시 우리나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국기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1980.9.29.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최규하가 과연 이승만, 김구, 안중근 등과 같이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을 만한 공적을 세웠는지는 의문이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것에 대해 전두환이 선물용으로 준 훈장으로 추정된다.
이름 | 훈장종류 | 사유 | 수여일 |
---|---|---|---|
최규하 | 수교훈장광화장 | 우리나라의국제적지위향상과국권신장및경제외교강화등국가외교업무수행에기여한공이큼 | 1970. 8. 15 |
최규하 | 청조근정훈장 | 국가발전 유공 | 1971. 6. 17 |
최규하 | 수교훈장광화대장 | 공무수행 유공 | 1976. 9. 10 |
최규하 | 무궁화대훈장 | 대통령 취임 | 1979. 12. 17 |
최규하 | 건국훈장대한민국장 | 대통령재임시 우리나라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 국기를공고히하는데기여 | 1980. 9. 29 |
이명박이 받은 5개의 훈장에서 특이한 점은 무궁화대훈장을 뺀 나머지 네 개 훈장을 모두 전두환으로부터 받았다는 것이었다. 경제인이었던 그가 체육훈장을 두 개나 받은 것도 이색적이다. 훈장이 하나 뿐인 경우는 윤보선, 김영삼, 김대중, 박근혜였다.
이름 | 훈장종류 | 사유 | 수여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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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 국민훈장석류장 | 종합적인 제도개선대대적인 정화교육실시각종정화운동 홍보활동 전개및 국내외 지사및 공사현장 정화운동 순회지도등에 헌신 | 1984. 11. 20 |
이명박 | 금탑산업훈장 | 외화획득사업자로 세부담액이 많으며 해외건설 사업에 많은 기능인력을 투입하고 고용증대에 공헌하고 국가 재정수요확보에 헌신 | 1985. 3. 3 |
이명박 | 무궁화대훈장 | 제17대 대한민국 대통령 | 2013. 2. 22 |
이명박 | 체육훈장백마장 | 제9회 아시아경기대회 유공(수영) | 1982. 12. 7 |
이명박 | 체육훈장거상장 | 제10회서울아시안게임에 수영경기본부장으로 참여 국위선양에 이바지 | 1986. 12. 30 |
박정희가 한국전쟁에서 어떤 전공을 세웠는지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취재팀은 박정희가 어떤 무공을 세워 그렇게 많은 무공훈장을 받을 수 있었는지 추적했다.
1950년부터 1957년까지 8년 동안 박정희는 총 7개의 무공훈장과 1개의 무공포장을 받았다. 박정희가 받은 포상의 등급을 살펴보면, 무공훈장 중 훈격이 두 번째로 높은 을지무공훈장이 2개였고 그 다음 등급인 충무무공훈장도 4개나 된다. 훈격이 네 번째인 화랑무공훈장이 1개, 그리고 무공포장도 1개 있었다. 전쟁 중인 1953년 7월까지 받은 훈장이 3개였고, 휴전 이후에 받은 훈장과 포장은 5개였다.
훈포장 | 수여일 | 사유 |
---|---|---|
충무무공훈장 | 1950-12-30 | 육이오참전유공 |
화랑무공훈장 | 1951-12-05 | 육이오참전유공 |
충무무공훈장 | 1953-05-08 | 육이오참전유공 |
충무무공훈장 | 1954-12-25 | 육이오참전유공 |
을지무공훈장 | 1955-01-15 | 육이오참전유공 |
을지무공훈장 | 1956-07-05 | 육이오참전유공 |
무공포장 | 1956-10-29 | 4286년5월1일에서 동년7월30일에 긍하여 강원도 김화지구에서 적군섬멸 |
충무무공훈장 | 1957-09-04 | 육이오참전유공 |
그런데 박정희가 받은 무공훈장 7개의 서훈 사유를 보면 ‘육이오참전유공’이라고만 나와있을 뿐 세부 내용은 없다. 무공 내역이 간단하게나마 언급된 것은 1956년 수여된 무공포장이 유일하다. 박정희는 ‘1953년 5월 1일부터 7월 30일까지 강원도 김화지구에서 적군을 섬멸’한 공적으로 이 무공포장을 받았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가 출판한 <6·25전쟁사> 제11권에서는 휴전회담 타결을 눈앞에 둔 1953년 1월부터 7월까지의 전투 상황을 다루고 있다. <6·25전쟁사>에 따르면 휴전 직전 중공군의 공격은 김화의 금성돌출부 등에 집중돼 치열한 고지 전투가 벌어졌다. 현재 철원군 일부와 북한의 김화군에 해당하는 이 지역이 바로 박정희의 무공포장 공적 사유에 언급되는 김화지구다. 3사단, 6사단 등으로 편성된 국군 제2군단이 이 지역 방어를 담당하고 있었다.
구미시에서 운영하는 박정희대통령 민족중흥관에 따르면 박정희는 1953년 2월 16일부터 같은 해 5월 8일까지 2군단 포병단장이었다. 그러나 2군단 포병단장 박정희의 공적은 <6·25전쟁사>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군사편찬연구소가 1976년 펴낸 <한국전쟁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책은 주요 전투를 설명하면서 해당 전투 부분의 맨 앞에서 참전한 부대와 지휘관을 소개하고 있다. 한 예로 1953년 7월 13일부터 18일까지 금성동남지구 전투에서는 제8사단과 제12포병단 등 참전 부대들이 나오며, 각 부대의 부대장들도 함께 소개된다. 그런데 1953년 김화지구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기록 어디에도 2군단 포병단이나 ‘적군을 섬멸’했다는 박정희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한국전쟁사>에는 1953년 2군단이 김화 지역에서 참가했던 전투가 소개돼 있다. 박정희나 박정희의 포병단은 등장하지 않는다.
뉴스타파는 한국전쟁 당시 김화지구 참전 유공자를 찾아봤다. 6·25 참전 국가유공자회 철원지회에서 1951년 김화지구 전투에 소총병으로 참전했던 함흥근 지회장을 만날 수 있었다. 함 지회장은 휴전 후에도 철원 지역에서 8년 7개월 동안 직업군인으로 근무했다. 그는 박정희가 휴전 후에 5사단장을 지낸 사실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정희가 1953년 김화지구에서 참전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부대의 전우회를 찾아가 박정희의 참전에 대해 물어봤다. 그러나 대답은 마찬가지였다. 6사단 청성전우회 관계자는 “박정희 대통령이 참전한 건 잘 모르겠고 옛날에 5사단장을 했다”고 대답했다. 이 지역에서 삼십 년 이상 군생활을 하고 제대했다는 다른 전우회원들도 박정희가 6·25 전쟁 말기 김화에서 참전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유명 인사의 참전이니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재차 질문했지만, 모른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포병단장 박정희 대령의 행방은 의외의 기록에서 찾을 수 있었다. 박정희를 오랫동안 취재한 조갑제 기자는 <박정희> 전집에서 1953년 박정희가 전라도 광주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박정희는 광주 포병학교에서 넉달간 교육을 받았다.”
“박정희는 1953년 2월에 포병학교를 졸업한 뒤 2군 포병단장으로 임명되어 광주에 머물면서 신설 작업을 지휘했다.
그는 5월 9일엔 3군단 포병단장으로 전보되어 조직과 인원 편성을 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령은 1953년 7월 휴전 직전에 광주에서 창설한 3군단 포병단 요원들을 데리고 강원도 양구로 이동했다.”
공적서 상 박정희가 ‘김화지구에서 적군을 섬멸’한 것으로 돼 있는 1953년 5월부터 7월까지 박정희는 김화지구의 2군단이 아니라 3군단에 소속돼 있었다. 1951년 해체됐다가 1953년 5월 재창설된 국군 3군단은 강원도 양구지구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으나 M1고지, 1090고지 등 작전지역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 기간 대부분을 전라도 광주에서 머물다가 휴전을 코앞에 둔 7월 양구로 이동했다.
양구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는 1953년을 다룬 <6·25전쟁사> 11권 제4장 ‘중공군의 6월 공세’ 부분에 실려 있다. 이곳에서도 3군단 포병단이나 박정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박정희가 무공포장을 받은 것은 1956년 10월 29일이다. 같은 해 7월 5일에는 을지무공훈장을 받은 바 있다. 불과 3개월만에 왜 다시 무공포장이 수여됐는지 의문이다. 특히 박정희가 받은 7개의 무공훈장은 공적이 모두 ‘육이오참전유공’으로만 돼 있는데 무공포장 사유는 ‘적군 섬멸’이다. 적군을 섬멸했는데 왜 훈장보다 등급이 낮은 포장이 수여됐는지도 이해하기 힘들다.
79년 12·12에서 80년 5·18에 이르는 전 과정은 군사반란이고 내란의 과정이었다. 지난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간한 보고서에는 12·12에서 5·18에 이르는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사람들의 실명이 언급돼 있다. 이들은 대부분 훈장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취재팀은 12·12 직후 보안사 앞뜰에서 군사반란의 주역임을 자처하며 기념 촬영을 한 34명의 군인들의 서훈을 추적했다. 이 중에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 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된 12명의 서훈은 취소된 상태였다. 나머지 22명의 서훈을 추적한 결과 모두 102건의 훈·포장이 확인됐다. 국방부 군수차관보(중장)였던 유학성의 경우 12·12의 주역으로 2심 재판에서 징역 6년을 선고 받았지만 대법원 판결 전에 사망했다는 이유로 그의 13개의 훈·포장이 모두 유효한 상태였다.
12·12 군사반란에 적극 참여했던 인물 중 서훈이 치탈되지 않은 인물들. 누르면 자세한 내용이 표시됩니다. 12·12 군사반란 책임자 중 훈장 수여자 명단 보기
대통령에 오른 전두환은 군부에 대규모 훈장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1980년 12월 31일 국가안전보장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62명이 훈장이나 포장을 받았다. 전두환은 다음 해인 1981년 4월 2일에도 계엄업무와 국가안보에 기여했다며 101명에게 훈포장을 수여했다. 특히 이 가운데는 5·18 당시 광주에 진압군으로 투입됐던 부대들에 대해서 다수 포상이 이루어졌는데 무자비한 시위 진압을 주도했던 7공수여단의 신우식 여단장과 전교사 사령관으로 봉쇄작전을 지휘한 소준열 등도 포함돼 있었다. 이들이 받은 훈장은 무공훈장으로 적의 공격에 대응해 전공을 세웠다는 것인데 광주 시민들을 적으로 간주한 것이다.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 가담자 중 서훈이 취소된 16명의 경우는 그들이 재판에서 유죄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훈법은 다른 경우에도 서훈을 취소하도록 하고 있다. 서훈을 받을 당시의 공적이 나중에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다.
상훈법 제 8조 서훈의 최소 등
1. 공적이 거짓으로 밝혀진 경우
대표적인 사례가 과거 간첩을 조작해 발표한 뒤 간첩검거를 공적으로 훈장을 받은 국정원, 보안사, 경찰 수사관들이다. 독재 정권 시절 불법 감금이나 고문 등으로 간첩을 조작한 수사관들은 후일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의 재조사와 재심을 통해 당시 각종 불법 행위 등을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지만 공소시효가 끝났다는 이유로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훈장은 간첩 조작으로 밝혀진 만큼 ‘공적이 거짓인 경우’에 해당돼 현재 취소가 추진되고 있다. 때문에 “국가안보에 대한 기여”가 재판에서 “반란이나 내란”으로 밝혀졌다면 훈장을 취소해야 한다는 지적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또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공로로 군인이나 경찰에게 수여됐던 서훈은 진압 중 사망한 경우라도 취소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정부는 공적에 광주 진압작전을 뜻하는 ‘충정작전’이 명시된 서훈만 취소했다. 취재 결과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 진압 중 사망”한 경찰관 4명에게 수여된 훈장은 취소되지 않았다. 또 5·18 진압군에게 수여된 서훈은 더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지난 6월 1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는 6·10민주항쟁 29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박근혜 대통령은 홍윤식 행정자치부 장관이 대독한 기념사를 통해 “정부는 그간 민주화운동을 기리기 위해 민주화운동 기념공원 조성과 민주화운동보상법 제정 등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성공회성당에서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와 대한성공회 주최로 열린 6월 민주항쟁 29주년 기념식에서는 민주주의 후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6·10항쟁은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계기가 돼 같은 해 6월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주화운동이다. 6월 10일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하루 앞둔 6월 9일, 연세대 학생 이한열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 쓰러지면서 국민적 저항을 불러왔다.
6·10항쟁은 헌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대통령 직선제가 16년 만에 부활됐다. 헌법 전문에는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고 명시해 4·19 혁명 정신을 부활시켰다.
하지만 6·10항쟁의 주역이었던 이한열, 박종철은 현재 국가로부터 어떤 대우를 받고 있을까? 경기도 남양주시에 있는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는 150여 명 이상의 민주화운동 관련자 또는 참여자들이 안장돼 있다. 박종철도 이 곳에 잠들어 있다.
마석 모란공원은 정부가 아닌 민간이 운영하는 사립묘지다. 국립묘지는 국가가 관리를 해주지만 모란공원은 사립묘지이기 때문에 관리비를 내지 않으면 방치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태일, 계훈제, 문익환, 최종길, 박종철, 이소선, 조영래 등 민주화운동 인사들이 대거 안장되면서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장소가 됐다. 오래 전부터 민족민주열사묘역을 국립묘지로 승격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뉴스타파는 이곳에 잠들어 있는 분들이 어떤 서훈을 받았는지 확인해 봤다. 지금까지 확인된 서훈자는 2명에 불과했다. 김근태는 복지부 장관을 지낸 공로로 근정훈장을 받았고, 문익환은 통일운동과 목회자 활동으로 국민훈장을 받았다. 민주화운동 그 자체로 훈장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마석 모란공원에는 1970년 분신한 전태일이 묻히면서 민주화 인사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다. 전태일의 묘비에는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생생하게 되살아나는 죽음”이라고 적혀 있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다녀갔을 이 곳에는 ‘단결, 투쟁’이라고 써 있는 빨간 머리 띠가 곳곳에 묶여 있다.
어머니 이소선의 묘비에는 생전 발언이 신영복의 글씨로 써 있다.
“옷도 세상도 건물도 자동차도 이 세상 모든 것을 노동자가 만들었습니다.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는 하나가 안 되어서 천대받고 멸시받고 항상 뺏기고 살잖아요. 이제부터는 하나가 되어 싸우세요. 하나가 되세요. 하나가 되면 못 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태일이 엄마의 간절한 부탁입니다. 여러분이 꼭 이루어 주세요.”
“노동자가 하나 되어 싸워야 한다"는 말은 이소선이 생전에 늘 강조했던 말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마석 모란공원 민족민주열사묘역에는 전태일과 이소선의 묘가 함께 있다. 근로기준법전을 움켜쥔 전태일 동상 뒤로 이소선의 영정 사진이 보인다.
전태일이 분신해 사망한 후 이소선은 40년을 ‘노동자의 어머니’로 살았다. 1970년 직접 청계피복노조를 결성했고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발생했을 때는 수배 중인 장기표의 장기간 도피를 도왔다. 1977년 장기표 공판과 관련해 법정모독죄로 구속돼 징역 1년을 살았고, 1980년 계엄당국에 구속됐다. 1981년 계엄 포고령, 집시법 위반으로 징역 10월을 살고, 1985년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를 결성했다. 1986년 전국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를 창립해 1993년까지 회장을 지냈다.
1988년엔 민주화운동 유가족들과 함께 기독교 회관에서 135일 동안 의문사 진상 규명 농성투쟁을 전개했고, 1998년 의문사 진상규명 및 명예회복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국회 앞 천막농성을 422일간 전개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2011년 9월,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이 작고하자 당시 행정안전부에 훈장 수여를 건의했다. 그런데 당시 자치행정과는 훈장 추서 여부를 담당하는 상훈담당관실에 보고도 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논의한 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건의를 묵살했다. 공적심사위원회를 열지도 않고 훈장 추서 여부를 결정해 버린 것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민주화 인사에 대해 훈장 추서를 건의한 것은 이소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후 기념사업회는 더 이상 정부에 훈장 추서를 건의하지 않았다.
뉴스타파는 서훈 데이터를 바탕으로 국가가 지정한 10개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어떤 훈장을 받았는지 추적했다. 그 결과 4·19혁명 유공자 1천79명에게 건국포장이 수여된 사실을 확인했다.
박정희는 군사쿠데타 이듬해인 1962년 4월 19일에는 3·15의거를 포함한 4·19혁명 희생자 184명에게 건국포장을 수여했다. 이후 1963년 350명, 1970년 60명, 1971년 7명,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93명, 2007년 71명, 이명박 정부 시기인 2010년 273명, 2012년 40명 등 1천79여 명이 건국포장을 받는다.
김주열 시신이 떠오른 마산 앞바다에는 김주열 추모의 벽이 세워져 있다. 추모의 벽에는 3·15의거, 4·19혁명으로 희생된 186명의 사진이 전시돼 있다.
이명박 정부 때인 2010년과 2012년에는 3·8대전민주의거와 2·28대구민주화운동 참가자들에게까지 서훈의 범위가 넓어졌다. 하지만 서훈자는 3·8대전민주의거 3명(2010년 1명, 2012년 2명), 2·28대구민주화운동 4명(2012년)으로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에 따라 민주화운동으로 지정된 운동은 2·28대구민주화운동, 3·8대전민주의거, 3·15의거, 4·19혁명, 6·3한일회담 반대운동, 3선개헌 반대운동, 유신헌법 반대운동, 부마항쟁, 광주민주화운동, 6·10항쟁이다. 10개의 민주화운동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 시기에 일어난 것인데, 서훈은 이승만 정권에 항거한 3개 민주화운동 관련자들에게만 이뤄진 것이다.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은 1962년 4월 19일 건국포장을 받았다. 하지만 6·10항쟁의 이한열에 대한 서훈은 없다. 김주열의 시신을 처음 보도한 부산일보의 허종 기자는 2012년 건국포장을 받았지만, 이한열의 피격 사진을 찍은 로이터의 정태원 기자는 서훈을 받지 않았다.
특히 이명박 정부는 2010년과 2012년, 김천길 AP통신 서울특파원(2010년), 박용윤 동아일보 사진기자(2010년), 전응덕 부산MBC기자(2010년), 이명동 동아일보 사진기자(2012년) 등 4·19혁명을 보도했던 일선 기자들의 공로를 인정해 건국포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모두 국가보훈처가 추천한 것이다. 4·19혁명 관련해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공적을 발굴해 서훈을 했지만 다른 민주화운동은 그렇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지난 7월 11일 국회 정무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박용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박승춘 국가보훈처 처장에게 이렇게 물었다.
“국가가 지정한 민주화운동인 6월항쟁과 관련해서 이한열 열사도 당연히 건국포장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보는데 보훈처가 추천할 의향은 혹시 있으십니까?”
박승춘 처장은 “확인해 보겠다”는 애매한 답변만 남겼다.
이틀 뒤인 7월 13일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에서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홍윤식 행정자치부 장관에게 이렇게 물었다.
“현재의 헌법이 있게 말들었던 6·10 항쟁의 불을 지폈고 또 6·29 선언의 도화선 역할을 했던 이한열 열사를 비롯한 다수의 민주화운동 유공자들은 현재까지 포장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 이유에 대해서 혹시 알고 계신 바가 있습니까.”
홍윤식 장관은 “아직까지 상세한 파악은 못했지만 이 문제와 관련해 관계부처와 협의해보겠다”는 다소 진전된 답변을 내놨다. 하지만 정작 보훈처와 행정자치부는 이와 관련된 뉴스타파의 공식 질의에는 아무런 답변도 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