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장, 정권의 수사학

‘세월호’ 훈장과 박근혜 생각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2014년 박근혜 대통령이 세월호와 관련한 공적으로 경찰과 청와대 파견 공무원 등에게 훈장과 포장을 수여한 사실이 확인됐다. 파악된 서훈자는 16명으로, 2014년 10월과 12월 사이에 수여됐다. 인명구조 지원 근무 수행 중 헬기 추락 사고로 순직한 소방공무원 5명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공적 사유는 세월호 참사에 잘 대응했다는 것이다.

박근혜, 세월호 관련 공적으로 공무원 16명에게 훈장 수여

조홍남 국무조정실 국장은 2014년 12월 근정포장을 받았다. 그는 2014년 <세월호 침몰사고의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특별위> 활동 당시 대통령 비서실에 파견돼 대국회 업무를 담당했다. 행정자치부가 공개한 조 국장의 공적 사유는 ‘2014년 우수공무원 포상’으로만 돼 있었다. 하지만 뉴스타파가 입수한 조 국장의 구체적인 공적 사유는 다음과 같다.

“국회 세월호사고 국정조사, 국정감사, 운영위 및 예결위의 현안 질의에 대한 충실한 자료 준비와 대응으로 대통령 비서실의 원활한 대국회 활동에 기여함.”

            - 조홍남 근정포장 공적사유 중

그런데 실제 상황은 그의 공적과 전혀 달랐다. 2014년 6월부터 7월 사이에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국정조사가 열렸는데, 당시 청와대는 야당 특위 위원들이 요청한 자료(269건)에 대해 거의 대부분 제출을 거부했다. 특위 위원들이 요구한 자료 중에는 참사 당일 대통령보고 상세 내역과 대통령 참석 회의 내역 등 참사 초기 청와대의 대응 조치를 규명하고 참사의 진상을 밝히는 데 필수적인 자료가 많이 포함돼 있었다. 하지만 청와대는 대통령 신변 경호상 등의 이유로 해당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

2014년 7월 10일 세월호 국정조사 당시 청와대 기관보고에 참석한 김기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과 비서진들.  청와대는 자료를 거의 제출하지 않는 등 비협조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대통령 비서실은 같은 해 12월, 대국회 업무를 담당한 대통령 비서실 파견 공무원에 대해 근정포장을 추천했다.

청와대의 비협조로 당시 세월호 국정조사는 별 성과 없이 끝났다. 조 국장은 당시 대통령 비서실에서 대국회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런데도 박근혜 대통령은 ‘충실한 자료 준비’ 등의 공적 사유로 조 국장에게 포장을 수여했다.

지난해 7월 고위공무원으로 승진한 조 국장은 올해 1월부터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서 고위정책과정 교육을 받고 있다.

‘세월호 참사 완벽한 상황 유지와 집회 관리’ 공적도 있어

세월호 관련 훈포장 내역에서 눈에 띄는 또 다른 인물은 세월호 참사 당시 안산단원경찰서장이던 구장회다. 그는 2014년 10월 근정포장을 받았다. 공적 사유는 다음과 같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 완벽한 상황유지 및 국민안전 확보를 위한 공감치안 실현, 국내 유일 다문화특구 행복한 안산 만들기 등 지역치안유지에 기여함.”

            - 구장회 근정포장 공적 사유 중

그가 과연 ‘공감치안 실현’을 공적으로 근정포장을 받을 자격이 있는 인물일까? 세월호 참사 한 달 뒤인 2014년 5월 19일, 단원경찰서 정보보안과 소속 경찰 2명이 진도 팽목항으로 이동하는 유가족들을 미행하다 발각됐다. 상관이던 구 전 서장은 유가족들 앞에서 공개 사과했다. 또 최동해 경기지방경찰청장도 사과했다.

지난 2014년 5월 19일 단원경찰서 정보보안과 소속 경찰 2명이 세월호 유가족을 미행하다 발각되자 최동해 당시 경기지방경찰청장과 구장회(사진) 당시 단원경찰서장이 가족들에게 공개 사과했다. 구 전 서장은 5개월 후 경기지방경찰청 추천으로 근정포장을 받았다. (사진=팩트TV 제공)

이 사건 이후 불과 5개월 후에 구 전 서장은 ‘세월호 참사 완벽한 상황 유지’ 등의 공적으로 근정포장을 받은 것이다. 서훈은 최동해 전 청장의 추천으로 이뤄졌다. 유가족을 미행하던 경찰이 발각될 당시 현장에 있었던 유가족들은 세월호 관련 서훈자 명단을 본 뒤 이렇게 말했다.

“가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열심히 보고한 사람들이 훈장을 받았네요.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뭐 가족에 대해서 따뜻하게 손 한번 잡아줬거나 이런 사람들이 없었잖아요.”

            -오홍진 (단원고 2학년 5반 준영 군 아버지)

뉴스타파는 안산 단원경찰서를 찾았다. 경찰서 관계자는 ‘세월호 참사 완벽한 상황유지’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질문에는 “확인해 줄 의무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구 전 서장은 올해 말 정년퇴직을 앞두고 현재 연수를 받고 있다. 뉴스타파는 구 전 서장에게 수차례 연락을 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서훈 72만 건 가운데 공적 사유에 ‘세월호’가 언급된 서훈자는 16명이다. 2014년 10월과 12월 사이에 포상을 받았다. 이 중 세월호 참사 당시 인명구조 지원 근무를 수행하다 헬기 추락 사고로 숨진 소방 공무원 5명도 있다. 그러나 나머지 11명의 공무원들은 “세월호 집회 등 안정적인 집회관리”, “세월호 참사 상황 관련 정보 활동 및 상황 완벽 관리” 등의 사유로 훈포장을 받았다.

세월호와 관련해 검사 2명도 근정포장을 받았다. 이봉창 검사(당시 광주지방검찰청 목포지청)는 “세월호 사고 직후 대량 희생자 검시 계획 수립, 신원 확인소에 상주하며 24시간 이내 DNA 분석을 통해 희생자를 신속하게 인계하는 등 현장수사 지휘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근정포장을 받았다. 박재억 검사(당시 광주지방검찰청) 역시 “신속한 수사를 통해 사건의 원인 규명과 관련 책임자 38명 기소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근정포장을 받았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의 원인 규명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으며, 세월호 수사는 화물 선적량을 잘못 계산하는 등 부실 수사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는 박근혜 대통령의 최대 약점이다. 아직 침몰 원인도 밝혀지지 않았고, 9명의 미수습자가 있는 상황에서 서둘러 공무원들에게 훈장을 준 박근혜 대통령의 의도는 뭘까? 참사 당일 대통령의 행적도 조사해야 한다는 것이 세월호 특조위의 확고한 입장인 상황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는 이미 끝난 거야”라는 말을 세월호 서훈을 통해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래 표는 세월호가 언급된 공무원 서훈자의 명단과 공적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16명 전체의 공적내용은 전체 공적서 보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름소속직급훈장 종류사유수여일
조홍남대통령비서실부이사관근정포장국회 세월호사고 국정조사, 국정감사, 운영위 및 예결위의 현안 질의에 대한 충실한 자료 준비와 대응으로 대통령비서실의 원활한 대국회 활동에 기여함2014.12.31
구장회안산단원경찰서총경근정포장14년 4. 세월호 참사 완벽한 상황유지 및 국민안전 확보를 위한 공감치안 실현, 국내유일 다문화특구 행복한 안산만들기 등 지역치안유지에 기여함2014.10.21
이봉창광주지방검찰청 목포지청검사근정포장세월호 사고 직후 대량 희생자 검시 계획 수립, 신원확인소에 상주하며 24시간 이내 DNA 분석을 통하여 희생자를 신속하게 인계하는 등 현장수사 지휘에 기여함2014.12.31
박재억광주지방검찰청검사근정포장세월호 침몰 사건 검경합동수사본부 수사 및 공판팀장으로 신속한 수사를 통해 사건의 원인 규명과 관련 책임자 38명(32명 구속, 6명 불구속) 기소에 기여함2014.12.31
백OO금천경찰서경정녹조근정훈장비정상의 정상화 관련 교통질서 확립 및 세월호 집회 등 안정적인 집회관리와 교황방한 행사 경호경비 완벽 수행 등 치안질서 확립에 기여함2014.10.21
조OO안산단원경찰서경감옥조근정훈장대상자는 평소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맡은 바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여 왔으며, 세월호 참사 상황관련 정보활동 및 상황 완벽관리로 지역 치안유지에 기여함2014.12.31

독립운동가와 친일파 훈장의 굴곡진 역사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 헌법 전문 중

이 같은 대한민국 헌법 정신은 대한민국 훈장의 역사에서는 제대로 구현되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은 친일파들에게 각종 명목으로 훈장을 수여했으나 독립운동가들은 철저히 외면했다.

이승만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대한민국 훈장 1호는 1949년 8월 15일 정부 수립 1주년 기념식에서 대통령인 이승만에게 수여된 무궁화대훈장이다. 훈장 역사에서 이날은 또 다른 의미를 갖는다. 독립에 기여한 공로로 독립운동가에게 건국훈장이 수여된 것이다. 대상은 이승만과 부통령 이시영, 단 두 사람이었다. 공적은 “우리나라 독립과 건국에 이바지한 공이 지대함”이었다. 대한민국 훈장 2호와 3호이자 독립운동을 한 공로로 수여된 첫 건국훈장이었다.

그런데 의외의 사실이 발견됐다. 이듬해 이승만과 이시영 다음으로 건국훈장을 받은 사람들은 모두 외국인이었다. 김구와 안중근 등 독립운동의 거목들이 아닐까 생각됐지만 아니었다. 1950년 3.1절은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러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훈장 수여는 없었다. 반면 미국에서 우리나라 건국훈장 수여식이 열렸다. 1950년 3월 1일, 주미 한국대사관, 수여자는 이승만을 대리한 장면 주미 대사였다. 이날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단 사람들은 12명, 모두 외국인이었다.

이름소속사유
체르스랏셀유창한 문필로 우리나라 독립에 공헌한 바 지대함
제로므윌리암스한국에 대한 우정과 봉사에 감사를 표함
호레이스알렌의학부문에 공헌한 바 지대함
에프에이돌프재미한인협회1919년 독립선언 이후 재미한인협회에 있으면서 한국사태를 외국에 설복시키는 데 노력했음
엘러모리이종교사절로 숭실전문에서 교편생활을 하는 등 학생인도의 공이 큼
폴다그라스교육부워신톤아메리카미국내에서 독립선언 당시의 상황을 설명하는 데 노력했음
허버트밀러한국의 충실한 벗으로 독립에 힘썼고 여러 강의도 해주었음
죤W스태가스한국에 대한 우정과 봉사에 감사를 표함
어네스트베트힐한국 자유와 독립을 위해 가진 고초와 물심양면 희생적으로 공헌함
프레드릭해리스워신톤메스지스트교회 목사상원포교사이승만 박사의 정신적 교사였음
호머헐버트국방부주한국무성주한국무성대표로서 교육제도 확립에 공헌한 바 큼
모리스윌리암한국인의 벗으로 모든 재능과 시간을 한국을 위해 봉사했음
1950년 삼일절에 건국훈장독립장을 받은 외국인 12명의 서훈 사유

이승만과 이시영 다음으로 건국훈장을 받았을 정도면 이 외국인들은 우리나라 독립에 어느 정도 기여했을까? 12명 가운데 선교사로서 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한 호머 허버트, 신문기자로서 대한매일신보 등을 통해 일제를 비판한 어니스트 베델, 그리고 선교사로서 한국 의학 발전에 기여한 호레이스 알렌 등 3명은 국내에서 비교적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나 나머지 9명은 이름도 생소하고 훈장이 수여된 사유도 모호했다. 예를 들어 “한국에 대한 우정과 벗”, “미국에 한국 상황 설명”, “이승만의 정신적 교사” 등이 건국훈장 공적으로 기재돼 있었다.

1950년 미국에서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미국인들. 이들 대부분은 이승만과 개인적인 인연이 있다는 점 외에 별로 알려진 점이 없었고, 서훈 사유도 모호했다.

한국 독립운동을 도운 외국인들에 대한 연구 논문 등에 따르면 이들의 공통점은 이승만이 미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에 그와 개인적으로 인연이 깊은 인물들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적은 최근에야 조금씩 조망되고 있을 정도이고, 1950년 당시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이었다.

특히 “유창한 문필로 독립운동에 공헌”을 했다는 찰스 럿셀은 독립운동을 연구한 전문가들도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다. 최근에 발간된 이승만 일기에 이승만과 점심을 같이 했다는 정도의 언급이 전부인데 일기를 펴낸 이승만 연구원은 물론 국가보훈처도 그의 정체를 모르는 상황이다.

이승만은 이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훈장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당시 미국 법은 미국인이 외국의 훈장을 받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다만 국무부와 상원에서 특별 허가를 받은 경우는 예외라며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겠지만 그럴 만한 가치가 있으니 추진해 보자고 적혀 있었다. 여러 상황을 종합해 보면 이승만은 미국 망명 생활을 하던 중 개인적으로 신세를 지거나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보은 차원에서 건국훈장을 수여한 것으로 보인다.

외국인 독립훈장 서훈자 한 명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대한민국 건국훈장과 같은 상(such awards)을 받기 위해서는 미 국무부와 상원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며, 서훈 과정의 첫 단계로 무초 주한 미국대사와 상의하라고 쓰고 있다.

이승만은 이들 12명을 포함해 모두 22명의 외국인에게 독립운동에 기여했다며 건국훈장을 수여했다. 그러나 4.19 혁명으로 물러나기까지 집권 12년 동안 국내 독립운동가 누구에게도 건국훈장을 수여하지 않았다.

다만 1957년 3월 6일 국무회의록에서 이승만이 독립운동가들에게 포상하는 방안을 지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정부 수립 9년 만에 내려진 지시였다. “해외와 국내에서 독립투쟁을 위하여 순국한 선열과 애국자를 포상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국가적인 위원회를 구성하라”는 것이었다.

1957년 3월 6일 제21회 국무회의록. 이승만 대통령은 이날 회의 첫 번째 대통령 논시(論示) 사항으로 “독립투쟁을 위하여 순국한 선열과 애국자를 포상하고 기념하기 위하여 국가적인 위원회를 구성하라”고 지시했다.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독립기념사업위원회가 구성됐다. 위원은 14명이었다. 그런데 구성된 위원 면면을 보면 이승만의 진의가 의심된다. 위원장은 이기붕이었고 위원에는 후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거나 국가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하는 인물이 5명이나 포함돼 있었다.

일제 강점기 평창군수를 지냈던 이근직은 내무장관 자격으로, 친일 사학자 신석호는 국사편찬위원회 사무국장 자격, 친일 언론인 홍종인은 조선일보 주필 자격, 조선임전보국단 지도위원으로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 유각경은 대한부인회 대표 자격, 친일 사법인 김형근은 서울신문사 사장 자격이었다.

이승만의 지시로 구성된 독립기념사업위원회에는 친일인사 5명이 위원으로 위촉됐다.

독립기념사업회는 건국훈장 대상자 88명의 명단을 작성해 국무회의에 보고했다. 건국훈장 중장 10명, 복장 58명, 단장 20명이었다. 당시 건국훈장 중 최고 등급이었던 중장 대상자는 민영환, 최익현, 이준, 안중근, 강우규, 김구, 윤봉길, 손병희, 이상재, 안창호 등 독립운동의 거목들이었다.

건국훈장 중장이 수여될 예정이었던 10명의 독립운동가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승만은 끝내 독립운동가들에게 훈장을 수여하지 않았다.

박정희의 ‘훈장정치’

훈장을 본격적으로 통치 수단으로 활용한 사람은 박정희였다. 현재 수여되고 있는 12종류 훈장 가운데 5개(건국훈장, 무궁화대훈장, 무공훈장, 국민훈장, 근정훈장)는 이승만 정권에서, 6개(수교훈장, 보국훈장, 산업훈장, 새마을훈장, 문화훈장, 체육훈장)는 박정희 정권에서 만들어졌다. 김대중 정권에서는 과학기술훈장이 만들어졌다.

이승만이 훈장을 수여하는데 소극적이었던 데 반해 박정희는 5.16 쿠데타 직후부터 대규모로 훈장을 수여하기 시작했다. 박정희의 훈장 정치가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시기인 1962년과 63년이었다.

이승만과 이시영 외의 국내 독립운동가들에게 건국훈장이 처음으로 수여된 것은 박정희에 의해서였다. 1962년과 1963년 삼일절에 독립운동가 433명에게 건국훈장이 수여됐다. 이승만 때 선정됐던 훈장 수여 대상자들과 기미독립선언문에 서명한 민족대표들도 이때 포함됐다. 이 기간에 또 4.19 혁명 과정에서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사람들에게도 건국포장이 수여됐다. 박정희는 왜 쿠데타 직후 독립운동가나 4.19혁명 유공자들에게 훈장을 수여했을까? 이에 대해 한시준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장은 이렇게 해석했다.

“군인들이 정권 잡았을 때 정통성 문제가 크게 대두되는 거 아니겠어요. 정통성 문제라는 것은 국민에 기반을 둬야 하는데 그 당시에 국민에 기반을 둔다고 하는 것이 독립군과 관련돼 있어야 하고 그래서 독립운동했던 분들에 대해서 포상을 한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 한시준 단국대 동양학연구원장
1962년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기념사를 읽고 있는 박정희. 그는 이날 행사에서 친일인사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박정희 훈장 정치의 진수는 같은 시기에 친일 인사들에게도 훈장을 수여한 것에서 나타난다. 그것도 8.15광복절을 기념해 수여한 것이다. 3공화국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는 다시 독립운동가들을 홀대하기 시작했다. 간헐적으로 소수에게 훈장이 수여됐을 뿐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본격적인 훈장 수여는 중단됐다. 그 이유에 대해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이렇게 분석했다.

“그 무렵부터 박정희 대통령이나 군부 정권의 핵심 멤버들 중에 만주군 출신, 일본군 출신, 친일 경력자들의 과거 행적이 차츰 밝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신들의 그런 추악한 과거하고 독립운동하고 급격하게 비교가 되니까 가급적이면 독립운동가들에게 더이상 훈포장을 주지 않는 방향으로 내부 정리가 되지 않았겠는가”

            -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대한민국이 독립운동가를 얼마나 홀대했고 친일파를 우대했는지는 훈장의 역사를 그래프로 그려 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87년 6월 항쟁까지 국가재건위 시기를 제외하면 친일파들에게 훈장이 수여된 시기에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훈장 수여는 거의 없었다. 전두환의 경우는 집권 7년 동안 단 19명의 독립운동가들에게 훈장을 수여했을 뿐이었다. 이 같은 현상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으로 헌법이 바뀌기 전까지 계속된다.

친일파들에게 훈장이 수여된 시기에는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훈장 수여가 거의 없었다.

뒤늦은 뿌리 찾기의 참담함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성과로 개정된 현행 헌법 전문에는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문구가 들어간다. 임시정부의 법통을 명시한 것은 독립운동을 대하는 국가의 태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가들에게 대한 훈장 수여가 이뤄지기 시작했다.

우선 3등급(중장, 복장, 단장)으로 돼 있었던 건국훈장의 등급을 5등급(대한민국장, 대통령장, 독립장, 애국장, 애족장)으로 확대했고 대통령 표창을 훈장으로 격상시키는 조치가 취해졌다. 그 결과 1990년과 91년에만 4천 7백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나라를 되찾은 지 45년이 지나서야 시작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훈장 수여였고 뿌리찾기였다.

그러나 뒤늦은 뿌리찾기의 결과는 지금까지 수여된 만 4천여 건의 건국훈장 가운데 5천여 건이 독립운동가 본인이나 후손을 만나지 못한 ‘주인 없는 훈장’이라는 뼈아픈 현실로 나타났다.

정경유착의 고리 ‘조세의 날’ 훈장

“올해 조세의 날 훈장은 누가 받을까?”

1985년 새해 벽두부터 재계의 관심은 ‘조세의 날’ 포상에 쏠려 있었다. 당시 매일경제신문은 <조세의 날 표창에 관심 고조, 조사 면제 혜택에 관심>이라는 제하로 이런 기사를 보도했다.

“꼭 받아야 하기 때문에 최근 납세자들의 세무서 출입이 빈번해져 담당 직원들도 골치가 아플 지경. 이러한 소문에 국세청은 세무서과장에게 경고문까지 전달하는 사태도 발생했다는 후문.

            - 매일경제신문 (1985년 2월 12일)

1985년 조세의 날 포상은 그 이전까지의 포상과는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다. 새로 제정된 국세청 훈령 937호 ‘성실납세자우대관리규정’에 따라 성실납세자로서 훈장과 표창을 받게 되면 세무조사가 면제되는 혜택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훈포장과 대통령, 국무총리 표창을 기업은 2년, 장관 표창과 국세청장 표창은 1년간 세무조사가 면제됐다. 기업 입장에서는 엄청난 특혜다.

1985년 3월 4일 세종문화회관에서는 조세의 날 기념식이 열렸다. 이날 재벌 그룹 소속 기업들이 대거 포상을 받았다. 현대건설, 쌍용양회공업, 풍산금속공업, 동양시멘트공업 등이다. 현대건설은 산업훈장 중에서도 최고 훈격인 금탑산업훈장을 받았고, 2년 동안 세무조사를 면제받는다. 현대건설의 당시 매출액은 1조 7천억 원 수준이었다. 나머지 기업들도 같은 특혜가 주어졌다.

1985년 조세의 날 대통령 단체표창을 받는 삼성전자부품(현 삼성전기) 사장 정재은. (매일경제 1985년 3월 4일)

이날 처음으로 법인이 조세의 날 대통령 표창을 받게 되는데, 그 주인공은 삼성전자부품(현 삼성전기)이었다. 삼성전자부품 역시 2년간 세무조사 면제 특혜를 받았다. 이들 업체들의 공적 사유는 대부분 “국가 재정 수요 확보”, “납세 의무 성실 이행” 등이다. 모범 납세 업체로 포상을 받고 세무조사도 면제받은 것이다.

‘조세의 날’ 훈장 등 포상 받고, 6개월 뒤 수십억 원 전두환에게 바쳐

그런데 이들 재벌 기업들이 훈장 등 포상을 통해 특혜를 받은 직후, 재벌 총수들은 전두환에게 잇따라 뇌물을 바친다. 정주영, 이병철, 김석원 등이 1985년 10억 원에서 50억 원을 전두환에게 전달한다.

이병철 삼성 회장은 1984년 12월 전두환에게 뇌물 10억 원을 바친다. 그 자리에서 이병철은 전두환에게 “금융, 세제 운용 등에서 우대해주거나, 최소한 불이익은 없도록 해달라”고 호소했다. 그 대가였을까? 석 달 뒤인 1985년 3월, 삼성전자부품이 조세의 날 대통령 표창을 받아 2년 동안 세무조사를 면제받는다. 이병철은 그해 9월과 12월 두 차례에 걸쳐 또다시 전두환에게 모두 40억 원을 , 1986년에는 60억 원을 바쳤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6년 조세의 날에는 제일제당이 은탑산업훈장을 받아 2년간 세무조사를 면제받았다.

청남대에 있는 전두환, 노태우 동상

훈포상을 통한 정경유착은 노태우 정권에서도 고스란히 이어진다. 1987년 삼성그룹을 승계받은 이건희는 1990년부터 1992년 사이 150억 원을 노태우에게 바쳤고, 같은 기간 삼성전자와 삼성코닝이 조세 관련 훈장을 받아 2년간 세무조사가 면제됐다.

지금의 SK인 선경도 마찬가지다. 최종현은 1988년 사돈인 노태우에게 30억 원의 뇌물을 줬다. 그리고 같은 해 선경그룹의 모회사인 (주)선경은 납세자의 날 산업훈장을 받아 역시 세무조사를 면제 받는다.

쌍용그룹 김석원 회장은 1984년부터 1987년까지 전두환에게 60억 원의 뇌물을 줬다. 김석원은 뇌물의 대가로 ‘세제 운용상의 우대’ 등을 요구했다. 김석원은 1990년부터 1991년까지 2년 동안 노태우에게도 80억 원의 뇌물을 바쳤다. 그리고 쌍용그룹의 주력사 중 하나인 쌍용양회공업은 1984년, 1985년, 1991년까지 세 차례 모범납세 업체로 선정돼 산업훈장을 받았고 세무조사 면제 혜택도 뒤따랐다.

이렇게 훈장이 정경유착의 고리로 이용된 것은 1996년 전두환, 노태우 비자금 재판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당시 판결문을 보면 재벌 총수들은 뇌물을 전달하면서 한결같이 ‘세무조사 조기 종결’과 ‘세제 우대’를 호소하고 있다. 1985년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로부터 훈장과 표창을 받고 세무조사를 면제받은 재벌 기업은 모두 23개였다. 이들 재벌 기업의 총수들은 두 집권자에게 2천 415억 원의 뇌물을 바쳤다.

재벌 총수와 일가족은 얼마나 많은 훈장을 받았을까? 뉴스타파가 확인해본 결과, 67개 재벌에서 196명이 모두 440건의 훈포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현대기아차 정몽구가 9건으로 가장 많은 훈포장을 받았다. 코오롱그룹 이동찬, 지금은 해체된 동아그룹 최원석이 각각 8건의 서훈을 받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름

그룹

상훈 내역

정몽구

현대자동차

1979년 산업포장

1981년 새마을포장

1982년 철탑산업훈장

1985년 철탑산업훈장

1986년 체육훈장맹호장

1989년 체육훈장청룡장

1989년 동탑산업훈장

1998년 금탑산업훈장

2012년 국민훈장무궁화장

이동찬

코오롱

1969년 산업포장

1972년 철탑산업훈장

1980년 체육훈장기린장

1982년 금탑산업훈장

1982년 체육훈장백마장

1986년 체육훈장거상장

1992년 국민훈장무궁화장

1992년 체육훈장청룡장

최원석

동아

1973년 동탑산업훈장

1978년 예비군포장

1981년 체육훈장맹호장

1981년 금탑산업훈장

1984년 국민훈장동백장

1985년 새마을훈장협동장

1986년 체육훈장청룡장

1988년 국민훈장모란장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1971년 철탑산업훈장

1974년 은탑산업훈장

1978년 새마을훈장노력장

1984년 체육훈장맹호장

1984년 국민훈장동백장

1990년 국민훈장모란장

2004년 국민훈장무궁화장

정몽준

현대중공업

1983년 산업포장

1983년 새마을훈장노력장

1984년 은탑산업훈장

1984년 체육훈장맹호장

1988년 국민포장

1997년 체육훈장청룡장

2002년 국민훈장무궁화장

박정구

금호아시아나

1974년 철탑산업훈장

1982년 체육훈장백마장

1984년 국민훈장모란장

1993년 동탑산업훈장

1996년 국민훈장무궁화장

2002년 금탑산업훈장

신격호

롯데

1968년 국민훈장동백장

1969년 석탑산업훈장

1978년 국민훈장무궁화장

1981년 동탑산업훈장

1987년 체육훈장청룡장

1995년 금탑산업훈장

정주영

현대

1962년 산업포장

1966년 동탑산업훈장

1970년 동탑산업훈장

1973년 금탑산업훈장

1981년 국민훈장동백장

1988년 국민훈장무궁화장

서훈 횟수 기준 상위 8명의 상훈 내역

창업주를 중심으로 보면 현대가는 14명이 모두 41건, 엘지가 15명이 28건, GS가 12명이 23건 순이었다. 재벌 일가는 주로 산업훈장을 받았지만, 국민훈장도 적지 않았다. 모두 60명으로 집계됐다. 대표적으로 삼성 이건희는 2000년 국민훈장 중 최고등급인 무궁화장을 받았다. 사유는 “이웃돕기 유공”이었다. 이건희는 1996년과 2009년 조세포탈 등의 혐의로 처벌을 받은 바 있다.

정치인들의 훈장 나눠먹기

이명박, 정권 퇴임 앞두고 측근 등 하루에 117명 무더기 훈장

이명박 대통령은 2012년 6월 30일, 임기 말미에 자신 밑에서 장·차관을 지낸 이들에게 훈장을 수여했다. 이날 하루만 117명이 근정훈장을 받았다. 1등급인 청조근정훈장 36명, 2등급인 황조근정훈장이 81명이었다.

뉴스타파는 이들 117명을 대상으로 서훈 공적 사유 등을 추적했다. 그 결과, 재임 기간이 5개월에 불과한 퇴임 장관 등에게도 납득할 수 없는 사유로 훈장이 수여된 것으로 확인됐다. 또 정책 실패로 인해 국민들에게 고통을 안겨준 장관들도 서훈 대상에 대거 포함돼 있었다.

정부의 쇠고기 협상 실패에 대해 주무부처 장관으로서 책임을 지고 물러난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 대응” 등의 이유로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구제역 통제 실패 책임을 지고 물러난 유정복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가축 질병 방역 체계 개선” 등의 이유로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이명박 정부 초대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을 지낸 정운천은 2012년 6월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2008년 미국과의 쇠고기 협상에서 이명박 정부가 굴욕적인 합의를 한 사실이 알려지자 민심은 폭발했다. 무능하다는 비판이 커졌고 급기야 이명박은 사과했다. 그리고 주무 장관이었던 정운천은 취임 6개월도 안 돼 경질됐다.

경질 사유가, 도리어 공적 사유로 둔갑

행정자치부가 외부에 공개한 그의 공적사유는 ‘퇴임 정무직’이라고만 돼 있다. 그런데 뉴스타파가 확인한 그의 구체적인 공적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 대응 등으로 농식품산업 발전에 기여함”이었다. 미국과의 쇠고기 수입 협상 파문으로 경질된 그가, 오히려 쇠고기 수입문제에 잘 대응했다는 이유로 훈장을 받은 것이다. 정운천은 뉴스타파와의 인터뷰에서 “정부가 준 것이기 때문에 감사하다”고 답했다.

정운천이 훈장을 받던 그날 유정복도 훈장을 받았다. 그는 2010년 8월부터 2011년 6월까지 농림부 장관을 지냈다. 재임 중이던 2010년 하반기 구제역이 대규모로 발생했다. 171일간이나 지속됐고 가축 3백 5십만 마리가 살처분됐다. 피해액은 3조 2천억 원에 달했다. 유정복은 책임을 지고 9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유정복의 서훈 사유는 “가축질병 방역체계 개선 및 축산업 선진화 방안 마련 등 농식품 산업 발전에 기여함”이다. 경질 사유가 거꾸로 서훈 사유가 된 것이다. 유정복은 “장관들이 퇴임하면 다 받는 것”이라고 답했다.

이명박, 5개월 장관에게도 훈장 수여

이명박은 재임 5개월 짜리 퇴임 장관에게도 훈장을 수여했다. 김성이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재임기간은 2008년 3월 13일에서 2008년 8월 5일까지다. 5개월이 채 안 돼 경질됐다. 하지만 그는 청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사유는 “기초생활보장제도 개선, 연금제도 개혁 등 사회 안전망의 내실화, 보건산업 경쟁력 강화 등 정책 수행”이었다. 정부 부처 상훈 담당자들은 서훈 추천 대상을 ‘재임 기간이 6개월 이상인 자’로 제한하는 규정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보건복지부 상훈 담당자는 “특별한 공적이 있으면 기준을 완화하는 것이 통상적으로 가능하다”고 해명했다.

김 전 장관에게 유일한 서훈 제한 규정인 ‘재임 6개월 이상’ 요건을 무시해도 좋을 만한 특별한 공적은 무엇일까? 보건복지부 상훈 담당자는 ‘세세한 사유는 확인하기 어렵다’고 답했고, 김성이 전 정관은 뉴스타파와의 인터뷰를 거절했다.

이명박은 재임 1년이 안 되는 장·차관급 인사들에게 적지 않게 훈장을 줬다. 모두 29명이나 됐다. 유정복(농림수산식품부 9개월), 정병국(문화체육관광부 8개월), 정진석(정무수석 11개월), 주호영 (특임장관 11개월) 등이다. 이들은 대부분 “훈장을 주니까 받았다”는 식으로 대답했다.

이름

소속

직급

재임기간

훈장

사유

정운천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2008년 2월 29일 ~ 2008년 8월 5일(6개월)

청조근정훈장

새 정부의 농정목표와 방향 제시

자발적 창의적 행정문화 조성

지자체 중심의 현장농정 구현

미국산 쇠고기 수입문제 대응 등으로 농식품산업 발전에 기여함

유정복

농림수산식품부

장관

2010년 8월 31일 ~ 2011년 6월 1일(9개월)

청조근정훈장

50년만의 농협 개혁 쌀산업 발전 5개년 종합계획 수립

가축질병 방역체계 개선 및 축산업 선진화 방안 마련

농수산물 수급안정 등 농식품산업 발전에 기여함

김성이

보건복지가족부

장관

2008년 3월 13일 ~ 2008년 8월 5일(5개월)

청조근정훈장

보건복지부장관(08.3~08.8)으로서 기초생활보장제도 개선, 연금제도 개혁 등 사회안전망의 내실화

사전 예방적 건강투자 확대

보건산업 경쟁력 강화 등 정책 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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