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당일 "최순실 청와대에 있었다”...검찰 발표
2018년 03월 28일 15시 49분
세월호 참사 당일, 박근혜의 중앙대책안전본부(이하 중대본) 방문을 결정한 사람은 최순실이었다. 박근혜는 오전 10시 20분 경, 세월호 사건에 대한 첫 보고를 받고도 침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의 전화도 두 번이나 받지 않았다. 검찰 수사결과 박근혜는 오후 2시 15분 최순실이 보안손님 자격으로 청와대에 들어오기 전까지 김장수,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에게 전화 지시를 한 것 외에 별다른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는 28일 이 같은 내용으로 세월호 사고 청와대 보고 조작 의혹 사건에 대한 수사결과를 발표했다.
검찰에 따르면, 김장수가 세월호 사건 관련 첫 보고를 받은 시점은 사고 당일인 4월 16일 오전 10시 이후였다. 김장수는 곧바로 박근혜에게 전화를 걸어 사고 내용을 전달하려 했으나, 박근혜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김장수는 곧바로 안봉근 제2부속비서관에게 “대통령이 전화를 받지 않으신다. 대통령에게 세월호 관련 상황보고서 1보가 올라갈 예정이니 대통령에게 보고해 달라”고 말한 뒤 신인호 청와대 위기관리센터장에게도 “상황보고서 1보를 대통령 관저에 전달하라”고 지시했다.
신인호에게 상황보고서를 전달받은 상황병은 박근혜가 있는 관저로 뛰어가 관저 내실 근무자였던 김OO씨에게 보고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김 씨는 별도의 구두 전달없이 박근혜의 침실 앞 탁자 위에 보고서를 올려두고 나왔다. 박근혜가 보고서를 봤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 사이 위기관리센터로 내려간 김장수는 재차 박근혜에게 전화를 했지만 이번에도 연락이 닿지 않았다.
김장수로부터 처음 보고를 받은 안봉근은 10시 12분 경 이영선 행정관이 준비한 승용차로 관저로 향했다. 뛰어서 관저로 향한 상황병과는 다른 동선이었다. 안봉근은 침실에 있던 박근혜를 수차례 불렀고, 박근혜는 그제서야 침실에서 나왔다. 안봉근이 “국가안보실장이 급한 통화를 원한다”고 전하자 박근혜는 “그래요”라고만 답한 뒤 다시 침실로 들어갔고, 김장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박근혜가 김장수에게 전달한 지시내용은 “1명도 인명피해가 발생하지 않게 하라. 엔진실, 객실 등을 철저히 수색하여 누락되는 인원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박근혜가 김장수에게 전화를 한 시간은 10시 22분이다.
10시 30분, 박근혜는 김석균 해양경찰청장에게도 전화를 걸어 구조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당시 박근혜의 지시는 원론적인 수준에 불과했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박근혜는 최순실이 청와대 관저에 도착하기 전까지 TV로 세월호 참사 상황을 지켜봤다.
최순실이 청와대에 도착한 건 오후 2시 15분경이었다. 박근혜와 최순실의 수족노릇을 했던 이영선이 최순실을 실어 날랐다. 최순실이 청와대 관저에 도착하기 전까지 박근혜는 침실에만 머물렀다. 들고 난 사람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 검찰의 수사 결과다. 관련자들의 진술도 모두 동일했다.
최순실은 관저에 들어오면서 정호성 비서관에게 “세월호 어떻게 된 거냐, 상황이 어떠냐'고 물었고, 정호성은 “청와대 수석들이 박근혜의 중대본 방문을 제안했다”고 답했다. 청와대 수석보좌관들의 의견이 대통령 박근혜가 아닌 최순실에게 먼저 전달된 것이다.
최순실이 관저에 도착할 당시 문고리 3인방은 관저에서 최순실을 기다리고 있었다. 최순실이 도착한 뒤 박근혜와 최순실, 그리고 문고리 3인방은 긴급하게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중대본 방문이 결정됐다. 중대본 방문을 제안하고, 결정한 사람은 대통령 박근혜가 아니라 비선실세 최순실이었다. 검찰에 따르면, 최순실의 청와대 방문은 거의 매주 이뤄졌는데 이날 방문도 세월호 참사 때문이 아니라 일상적인 방문이었다. 이날 브리핑에서 검찰 관계자는 기자와 이런 문답을 주고 받았다.
최순실이 박근혜의 중대본 방문을 결정한 뒤에야 이런저런 후속조치가 이어졌다. 정호성은 윤전추 행정관에게 “박근혜의 화장과 머리를 담당하는 직원 2명을 청와대로 호출”하도록 지시했다. 윤전추는 미용실 직원 정아무개 씨에게 “출발하면서 전화해 달라. 급하다”는 식의 재촉 문자를 연달아 보냈다. 2시 53분경의 일이었다.
올림머리와 화장 등 외출 준비를 마친 박근혜는 오후 4시 33분경 중대본 방문을 위해 청와대 관저를 떠났다. 광화문 정부종합청사내에 있는 중대본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5시 15분, 평소라면 10분이면 족할 거리였지만, 교통사고로 인한 정체로 우회하면서 40분 가량이 걸렸다. 박근혜가 중대본에 가기 위해 청와대를 나온 뒤 이영선은 항상 그랬던 것처럼 최순실을 서울 강남의 자택에 데려다줬다.
중대본에서 박근혜는 “학생들은 구명조끼를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라고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 빈축을 샀다. 당시는 이미 좌초된 세월호가 선수 일부만 남기고 침몰한 상황이었다. 재난 컨트롤타워인 대통령이 사고 7시간이 지났는데도 상황 파악조차 못하고 있었음을 방증하는 장면이었다. 중대본 방문 후 오후 6시쯤 청와대 관저로 복귀한 박근혜는 다시 청와대 집무실이 아닌 관저로 들어갔다. 부속실장이던 정호성은 세월호 참사 상황 보고서를 관저에 팩스로 보냈다. 이 팩스가 제대로 전달됐는지, 박근혜가 이를 읽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세월호 참사 당일 최순실이 청와대에 방문한 사실은 최순실을 청와대로 실어 나른 이영선의 신용카드 결제내역, 남산 1호터널 통과 내역 등으로 확인됐다. 이영선은 남산터널을 통과해 최순실의 집과 압구정 현대백화점 뒷길을 통과했고, 압구정 김밥집에서 밥도 먹었다. 청와대에 들어올 때 남산터널을 이용했던 이영선은 최순실을 다시 집에 데려다 줄 때는 하얏트 호텔 쪽으로 돌아갔다.
검찰에 따르면, 박근혜 청와대 관계자들은 세월호 참사 당일 최순실의 청와대 방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사실이 드러날까봐 전전긍긍했다는 것이다. 검찰 관계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그 동안 세월호 7시간과 관련 최순실의 존재가 드러날까봐 (청와대 관련자들이) 전전긍긍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검찰이 사실관계를 제시한 뒤에는 모두 말했습니다. 다른 어떤 것보다 최순실이 그날 청와대에 온 것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조심했다고 합니다. 여러가지 억측과 설이 나오는 문제여서 부담감을 많이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검찰 수사는 현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 국가안보실의 수사 의뢰로 시작됐다. 세월호 사건 당일 대통령 보고 시간이 조작된 사실,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이 임의로 조작, 훼손된 사실이 현 정부 출범 후 확인됐기 때문이다. 청와대 국가안보실은 지난해 10월 13일 김기춘, 김관진, 신인호 등에 대해 대검찰청에 수사를 의뢰했고, 대검찰청은 같은 달 16일 수사의뢰서를 서울중앙지검에 전달했다. 시민단체인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도 같은 달 17일 서울중앙지검에 김기춘, 김관진에 대해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의 불법 변개에 대한 고발장을 제출했다. 서울중앙지검은 특수1부에 사건을 배당했다.
세월호 사고 직후부터 박근혜의 사고 당일 행적, 국가안보실의 무기력한 대응은 사고 후 수년이 지나서도 여론의 도마에 올랐다. 국회 국정조사와 청와대 국정감사 등에서도 청와대를 상대로 한 추궁이 이어졌다. 검찰은 이러한 정치권과 여론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청와대 국가안보실과 비서실의 핵심 관계자들이 세월호 관련 기록의 조작을 결심, 실행한 것으로 판단했다. 조작의 핵심은 10시 17분 이전에 박근혜가 세월호 사건과 관련 중요한 결정과 지시를 한 것처럼 문서를 조작하는 것이었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10시 17분은 세월호 탑승자가 마지막으로 카카오톡을 통해 구조신호를 보낸 시간, 다시말해 세월호 사건의 골든타임이 사실상 끝나는 시점이었던 것이다.
검찰에 따르면, 세월호 사고 당일 오전 10시 20분 경 신인호는 상황병을 통해 세월호 보고서 1보를 박근혜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박근혜가 당시 이 보고서를 읽었는지 여부가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김규현 외교안보수석과 협의해 박근혜가 오전 10시경 사고를 인지한 것처럼 서류를 조작했다. 신인호는 위기관리센터 실무자에게 박근혜 최초 서면 보고 시간이 오전 10시 00분으로 기재된 타임테이블을 주며 조작을 지시했다.
그 동안 박근혜 청와대는 총 11차례에 걸쳐 박근혜가 사고 당일 세월호 관련 보고를 문서로 받았다고 주장해 왔다. 청와대 홈페이지는 물론, 탄핵심판 당시 헌법재판소에서도 같은 주장을 폈다. 그러나 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세월호 사고 당일 청와대 정무수석실은 오전 10시 36분쯤부터 밤 10시 9분까지 정호성에게 총 11차례 상황 보고서를 이메일로 전달했다. 그런데 정호성은 이메일을 받을 때마다 관저에 머물던 박근혜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보고서를 모아 오후와 저녁 시간에 한번씩 보고서를 출력해 박근혜에게 전달했을 뿐이다. 그러나 김기춘은 이 같은 사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국회에 출석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상황을 대통령에게 20~30분 간격으로 보고 드렸다”거나 “대통령은 직접 대면 보고 받는 것 이상으로 이 상황을 파악했다”는 따위의 거짓말을 늘어놨다. 검찰 수사결과 김기춘은 자신의 대답을 짜맞추기 위해 국회 보고용 답변서 작성을 맡은 비서관과 행정관 등에게 부당한 지시를 내렸다.
박근혜의 최초 지시 시간도 조작된 것으로 드러났다. 박근혜는 세월호 당일 오전 10시 22분 경 김장수에게 전화로 처음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박근혜는 “김장수에게 10시 15분에 전화를 걸어 지시했고, 다시 10시 22분에 전화를 걸어 지시했다”는 내용이 담긴 허위 공문서를 만들어 국회에 제출했다. 검찰은 “10시 25~26분 대통령 지시사항 전파 내역과 김장수와 박근혜의 10시 22분경 통화를 목격한 신인호를 비롯한 다수의 위기관리센터 근무자들 진술 등에 의해 10시 15분 통화는 없었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김관진과 신인호가 대통령 훈령을 불법으로 고친 사실도 확인됐다. 애초 대통령 훈령인 ‘국가위기관리기본지침’에는 '국가안보실장은 대통령의 위기관리와 국정 수행을 보좌하고, 국가 차원의 위기 관련 정보를 분석·평가·기획 및 수행체계 구축 등 위기관리 종합관리 기능을 수행하고 안정적 위기관리를 위해 컨트롤타워의 역할을 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나 김관진은 사고 발생 7일 뒤인 4월 23일, 당시 청와대 대변인을 통해 “국가안보실은 재난 컨트롤 타워가 아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 발언이 있은 이후 국가안보실은 ‘국가안보실장은 컨트롤타워의 역할을 한다’는 기존 지침 내용을 볼펜으로 그어 삭제하고 대신 손글씨로 '국가안보실장은 국가위기에서만 대통령을 보좌한다'고 고쳐 65개에 달하는 부처·기관에서 시행하도록 지시했다. 검찰은 김관진과 국가위기관리실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지침을 임의로 조작, 변경한 것으로 판단했다. 검찰은 “당시 청와대의 부당한 지시를 거부한 기관은 단 한 곳도 없었다”고 밝혔다.
박근혜 청와대는 세월호 사고 이후 ‘안전행정부에 중앙재해대책본부를 둔다’ (재난및안전관리기본법 제14조1항)는 규정을 이유로 안전행정부가 재난컨트롤타워라고 주장해 왔는데, 이 모든 주장이 사실은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술수에 불과했음이 이번 검찰 수사로 확인된 것이다.
검찰은 수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박근혜의 세월호 보고 및 지시 시각을 조작하고 국회 답변서 등의 공문서를 허위로 제출한 혐의(허위 공문서 작성)로 김기춘과 김장수를 불구속기소했다. 또 ‘국가안보실이 아닌 안전행정부가 재난상황의 컨트롤 타워’라는 식으로 국가위기관리 기본지침을 무단 변경한 혐의(공용서류손상 등)로 김관진을 불구속기소했다. 또 헌법재판소에서 세월호 사고 당일 오전10시경 박근혜에게 상황보고서를 전달한 사실이 없음에도 허위 증언한 윤전추를 국회 위증 혐의로 불구속기소했다.
이번 검찰의 수사결과로 박근혜 청와대의 소위 ‘보안손님’의 정체도 백일하에 드러났다. 보안손님을 A급과 B급으로 구별해 관리했는데, A급 손님은 검색 절차없이 차량을 타고 대통령 관저 정문인 인수문을 통과하여 관저 마당까지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었고, B급 보안손님은 검색 절차없이 관저 정문인 인수문까지만 차량을 타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비선실세인 최순실과 비선진료를 맡은 김영재 의원 원장 김영재 씨와 부인 박채윤 등 3명은 A급 보안손님이었고, 기치료사인 오 모 씨, 왕십리원장 박 모 씨는 B급 보안손님이었다. 이들은 모두 청와대 경호실에 출입기록이 남기지 않고도 청와대를 들락거린 것으로 확인됐다.
재임시절 대통령 박근혜의 일상도 확인됐다. 검찰에 따르면, 박근혜는 재임기간 동안 청와대 본관에서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 국무회의 등 회의나 외부 행사 등 공식 일정을 마치면 곧바로 대통령 관저에 복귀해 주로 관저에 머물러 있었다. 세월호 사고가 발생한 2014년 4월 무렵, 박근혜는 정호성에게 “수요일은 공식 일정을 잡지 않도록” 지시했던 사실도 확인됐다. 세월호 사고 당일인 4월 16일도 수요일이어서 박근혜가 계속 관저에 머물렀다는 것이 검찰의 판단이다. 그러나 박근혜가 참사 전날인 4월 15일 밤에는 뭘 했는지, 16일 오전 10시 이후에도 왜 김장수 국가안보실장의 전화를 두차례나 받지 않았는지, 그 때 뭘 하고 있었는지는 이번 수사에서 확인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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