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국100년 특별기획] 1부 ‘사법부 역사법정에 세우다’

2018년 08월 08일 20시 14분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民國 100년 특별기획, 누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가> 시리즈를 2018년 8월부터 2019년 하반기까지 계속해서 보도합니다. 내년 2019년은 1919년 3.1 혁명 100년,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뉴스타파는 지난 100년을 보내고 새로운 100년을 맞는 이 중요한 시점에서 이 특별기획을 통해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을 지배해 온 세력들을 각 분야 별로 분석하고, 특권과 반칙 및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통찰을 99% 시민 여러분과 함께 이끌어 내고자 합니다.

뉴스타파는 <民國 100년 특별기획, 누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가> 프로젝트를 통해 일제와 미 군정, 독재, 그리고 자본권력의 시대를 이어오면서 각 분야를 지배해온 세력들이 법과 제도를 비웃으며 돈과 권력을 사실상 독점하고 그들만의 특권을 재생산한 현재의 지배계급 시스템을 가감없이 들춰내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미래 세대는 과거 지배 체제가 극복된, 그래서 보다 정의롭고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체제에서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며 자기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1. 2018년 6월 삭제된  ‘유신판사’ 명단

희한해요. 07, 08, 09, 10년 상하반기 보고서 다 있고 종합보고서에 발굴보고서까지 다 있는데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06년 하반기 조사보고서만 없어요. 황당하네. 당황스럽네요.

행정안전부 과거사관련 업무지원단 공무원

휴대전화 넘어 담당 공무원의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담당 공무원도 삭제된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었다. 뉴스타파가 과거사 관련 업무를 지원한 정부 홈페이지에서 긴급조치 판결문과 재판관의 목록이 삭제돼 있음을 확인한 것은 2018년 6월 초였다. <民國 100년 특별기획> 취재를 시작하던 때였다.

뉴스타파는 박정희 유신 독재 시절 긴급 조치 위반으로 형사재판을 받은 피해자와 판결문을 찾아 나섰다. 대한민국 사법 역사에서 가장 참담하고 부끄러웠던 시대를 판결문을 통해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유신 재판관 명단은 이미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가 관련 조사보고서를 작성해 대통령과 국회에 제출한 바 있었다. 진실화해위는 2010년 활동을 종료한 상태였고 그 업무를 승계한 행정안전부 과거사 관련 업무지원단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 행안부 과거사 업무지원단 홈페이지 유신판사 목록이 담긴  진실화해위 2006년 하반기 보고서가 삭제됐다.

과거사 업무지원단 홈페이지 자료실에는 2006부터 2010년까지 진실화해위가 낸 조사보고서가 보관돼 있었다. 판결문과 판사 명단이 담긴 2006년 하반기 조사보고서를 내려받았다. 그런데  보고서 중  297쪽부터 445쪽까지 149페이지 분량이 삭제돼 있었다. 긴급조치 판결문 요지와 판사 목록이 담긴 부분만 가위로 오려낸 듯 없어진 것이다. 게다가 행정안전부는 조사보고서 원본도 별도 보관하지 않고 있었다.

삭제돼 있는 해당 보고서가 홈페이지에 올려진 시기는 2008년 4월 25일,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두 달 지난 뒤였다. 진실화해위 조사보고서는 관련 법률에 의해 반드시 공개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통령과 국회에까지 보고한 공식 기록물이다. 누가 삭제를 지시한 것일까?

행안부 공무원은 는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판사 실명 공개가 민감한 사안이라 빠진 것 같다”고만 추정했다. 뉴스타파는 유신판사 명단을 누가, 언제, 어떤 절차로 삭제했는지 행정안전부에 공식 질의서를 보냈다. 뉴스타파는 답변을 기다렸다.  

2. 1,392건의 판결, 유신판사’ 522명.

뉴스타파는 해당 조사보고서의 원문을 입수했다. 거기에는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긴급조치를 위반한 재판 1,392 건, 피고인 9백여 명, 그리고 유신 판사 522명의 명단이 담겨 있다. 기존 492명보다 30명이 늘어난 것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암흑기, 박정희 유신독재와 긴급조치 시절, 죄 없는 이들의 죄를 법정에서 완결시킨 이들의 명단이다.

▲ 긴급조치 재판에 참여한 이들 중에는 훗날 대법관 등으로 영전한이가 23명이다.

522명의 재판관 중 긴급조치 9호 위반 판결 판사가 492명, 긴급조치 1·4호, 3호 위반 판결 판사가 30명이었다. 이들 유산 판사에는 훗날  명단에는 대법원장, 대법관, 헌법재판소장, 국무총리, 부총리가 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양승태, 김황식 등을 비롯해 이후 대법원장과 대법관으로 임명된 이는 23명이다.

3. 1975년 “박정희 정치는 X도 아니다”

1975년 11월 대구지법 상주지원.
주점에서 박정희 대통령 욕한 A씨 징역 1년 선고.
혐의. 주점에서 술에 취해 "박정희 정치는 X도 아니다"라고 반복하여 말함(긴급조치 9호)
1975년 5월 서울민형사지법 의정부지원
"박정희 XXX, 세금 다 착취해 먹고도 철도 건널목에 간수 하나 두지 않아 사람 죽게 했다"
형이 열차에 치여 죽자 동네 사람들 앞에서 소리친 축산업자 B씨에게 징역 3년 선고.
혐의. 폭처법, 유언비어 날조 유포(긴급조치 9호)
1976년 11월 서울형사지법.
"정일권, 박정희 그것들 다 일본군 출신이다. 형편없는 것들이야. 우리 독립군을 얼마나 많이 잡아넣고 못살게 했는데 그래"
본인 이발소에서 대화 중 유언비어 날조 유포한 C씨에게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선고.
혐의 : 유언비어 날조(긴급조치 9호)

긴급조치 판결문 가운데 몇 가지를 요약해 예시한 것이다. 우리 주변 지극히 평범했던 사람들. 술에 취에 한 말 한마디, 형이 열차에 치여 숨진 후 토로한 울분으로도 감옥에 가던 세상이었다. 그게 긴급조치 시대였다.


일부 피고인들은 재판관의 양심 있는 판결을 포기했다. 이들은  재판정에서 진술을 거부하며 침묵으로 맞서기도 했다.

그때 공판이 있었는데, 그날 우리는 진술을 거부했어, 묵비권을 행사했습니다. 그런데 하고 싶은 이야기는 있었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뭐냐면 당신들이 양심적으로 판결을 하고 양심적으로 판단해줬으면 좋겠다는 기대는 있었지만, 그런 걸 기대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을 했어요. 솔직히 그 사람들한테도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어. 실제로 그랬어요. 판사들한테도 왜냐면 불가능했어요.

이대현 긴급조치 피해자 (당시 서울대 2학년)

4. 양승태, 유신철폐 유인물제작 배포에 징역10년 판결 

갓 판사로 임용된 20대 청년 양승태는 긴급 조치 12건의 판결에서 재판관으로 참여했다. 재판을 받은 이는 성유보(전 동아일보 기자), 이부영(전 국회의원), 심지연 (경남대 교수) 등이다.  

동아일보 안에 공산주의자들이 암약해서 자유언론운동을 했다는 거였어요. 강압으로 만든 조서를 검찰 조서가 토씨 하나 안 빼놓고 다 베껴버리고, 더 우스꽝스러운 건 판사들이 그걸 그대로 또 베껴서 판결문을 쓴 거예요. 그대로. 1심 재판 때 양승태가 거기 배석판사였더라고.

이부영 전 국회의원 / 전 동아일보 기자
▲ 양승태 전 대법원장

대표적인 재판이 이른바 “7인 기획위원회’ 사건이다. 심지연, 조성우 등은 명동성당 사제관에 모여 시국을 논의해 긴급조치9호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판결요지에 따르면 이들은 “명동성당 사제관 시부의 방에서 ‘7인 기획위원회'를 조직하고 유신헌법철폐, 정권 퇴진을 위해 활동하고자 유인물 제작, 각 대학 데모상황 정보를 공유”한 것이 죄목이었다. 1975년 서울형사지법 판사로 재직 중에 배석판서로 재판에 참여한 양승태는 이들에게  피고들에게는 중형을 선고했다.

5.  2018년 7월, 유신판사들에게 과거를 묻다

이른 아침부터 강남을 찾았다. 긴급조치 판결 이후 대법관으로 영전하며 승승장구한 이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대부분 퇴임 이후 대형 로펌에서 대표 또는 고문 변호사로 활동 중이었다. 뉴스타파는 이들에게는 미리 질의서를 이메일로 보내고 전화 통화도 시도했다. 질의에는 이런 내용을 담았다.  

재판정에 선 판사이기 전에 한 지식인으로서의 깊은 인간적 고뇌도 있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 시대를 판사로 재임했던 분들이 느끼셨을 심정을 직접 들어보고 싶습니다.

과거사에 대해 언젠가는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만 건강한 미래를 다짐할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생각하기 싫은 기억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끄러운 역사도 기억해야만 합니다. 사법부의 미래, 그리고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답변을 해주셨으면 합니다.

1. 당시 재판에 참여한 판사로서 고뇌가 있었다면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또 지금의 심경은 어떠신지요?

2. “입장이 무엇이든 유신 치하에서 법관생활을 한 분이라면 법관으로서의 자성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어떤 입장이신지요?

3. 재심을 통한 무죄선고가 있따르고 있습니다. 유죄선고를 내린 피고인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으신지요? 기회가 된다면, 당시 피고인들에게 사과하실 의향은 있으신지요?

▲ 뉴스타파가 유신판사들에게 보낸 이메일 질의서 일부

진솔한 사과까지는 아니더라도,  지식인으로서의 고뇌와 그때 그 감정만이라도 직접 듣고 싶었다. 하지만 만남은 쉽게 허락되지 않았다. 빌딩 입구에서부터 제지당하기 일쑤였다.  사전에 약속을 허락받지 않을 경우 만날 수 없다며 했다. 미리 연락이 닿은 법무법인 측도 업무로 바쁘다는 등 여러 이유로 만남을 회피했다.

▲ 지난 7월 취재진은 긴급조치 판사들을 만나기 위해 로펌과 자택을 방문했다.

간혹 연락이 닿은 경우에도 “연로해서 힘들다”, “정치적인 문제이기에 인터뷰 곤란하다”, “건강이 좋아 어렵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판사는 판결로 말한다’라는 말로 인터뷰를 거부하기도 했다.

나 자신도 그 당시나 지금이나 그 긴급조치가 뭐 제대로 된 거다 옳다 이렇게 생각지 않지. 그 당시도 모든 법관들이 이거는 문제가 있다란 생각은 다 했지만 그거를 어떻게 무효화하는 이론이나 이런 것을 찾아낼 수가 없는 거예요. 그게 그 당시에 법관들의 고뇌였죠.

황우여 전 부총리

판사는 판결로만 이야기하는데 제가 뭐라고 답하는 것은 적절치 않아서 일체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

6. 4월 11일, 대법원장 후보를 면접하다.

4월 11일 오전 청와대를 출발한 차량 한 대가 사직동으로 들어선다. 사직동 골목 주택 앞에 멈췄고 정장 차림의 3명이 내려 집 안으로 들어갔다. 유태흥 대법원 판사(현 대법관)의 집이었다.  이들은 한 시간가량 머물렀다. 3명 중에는 박철언 청와대 정무비서관도 있었다.

이틀 전 박철언은 전두환 대통령을 독대했다. 그는 전두환에게 대법원장 후보자에 대한 인사 자료를 보고했고 전두환은 김용철 대법원 판사를 만나 조용하게 대화를 나누어 보라는 지침을 줬다. 전두환의 지시에 따라 대법원장 후보자를 면접을 보라는 것이었다. 박철언은 이날 유태흥을 만나 무슨 대화를 나눴을까? 박철언은  2005년 출간한 <바른역사를 위한 증언>이라는 회고록에서 이날 상황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박철언은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 청와대 정무비서관, 법률비서관, 청와대 정책보좌관, 정무장관, 체육청소년부 장관을 지내는 등 5,6공 당시 권력의 실세로 군림했다. 유태흥은 이날 박철언에게 이렇게 말했다.

개인적으로 친분도 없는 저를 각하께서 대법원장 후보의 한 사람으로 생각해주시는 것만도 영광이며, 임명받는다면 최선을 다하여 임명권자와 국민에게 봉사하겠습니다. 국가 안보가 민주주의나 기본권이나 인권보다 전제가 되는 것으로 가장 소중합니다. 국가가 그릇이라면 민주주의는 그릇에 담긴 물과 같은 것입니다. 분단국 현실에 비추어 사법부 수장은 정치적, 공안적 사건에서 정부에 협력해야 하고…(중략) 국민에게 봉사하는 법조의 구현을 위해서는 사법부 혁신, 법조 민주화가 되어야 하나, 재임용 과정에서 국가기관이 희박하고 품위가 바르지 못한 사람은 제외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른역사를 위한 증언, p.55>
▲ 전두환과 유태흥 대법원장

전두환 정권에 대한 일종의 충성 맹세였다. 박철언이 면접을 본 유태흥은 곧 사법부 수장에 임명된다.  유태흥은 1985년 법관 인사 문제를 신문에 기고한 판사를 좌천시켜 사법파동을 초래했고, 국회에서 사법사상 최초로 탄핵안이 발의된 대법원장이 됐다. 대표적인 정치판사였던 그에게 훗날“영욕의 법조인”이라는 오명이 붙는다. 권력에 읍소해 얻은 자리가 오히려 멍에가 된 것이다.

지난 7월 뉴스타파 취재진은 박철언을 만났다. 그는 유태흥의 발언에 대해 이렇게 해명했다.                              

대법원장, 대법관들 임명하는 과정도 역시 저는 민주주의하고 삼권 분립 신봉하는 사람이지만, 그때 남북이 대화도 극심한 대결 상황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의 사법부도 다른 개개의 모든 사건에 대해서 사법적 정의를 실천해야 하지마는 이런 나라의 존립에 관한 말하자면 자유민주주의의 존립에 관한 국가 안보에 관한 중요 문제에 관해서는 그런 대통령과 서로 어느 정도 공감이 이루어져야 한다.

박철언 전 장관

7.  1981년 8월, 대법관 보안사에 끌려가다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집권 18년 내내 철권통치를 통해 사법부를 발아래 뒀다.

대법관의 명칭을 대법원 판사로 격하시켰고 법원행정처 처장에 현역 대령을 임명했다. 주요 법원에 중앙정보부 요원을 상주시키고 노골적인 협박으로 굴종을 강요했다.

그 당시에 형사 법원 안에는 조그마한 상황이 있어가지고 중앙정보부 요원 4명이 상주를 하고 있어요. 수시로 판사실에 들어와가지고 이래라저래라 언제 어떻게 재판을 할 거냐.  재판기일을 언제로 할 거냐. 그 사람들 보석을 해줄 거냐 안 할 거야 별의별 간섭을 다했죠.

목요상 전 국회의원 (유신 당시 판사)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정권을 장악한 전두환 정권 역시 사법부를 철저히 통제했다. 일부 판사들은 큰 고초를 겪게 된다. 1980년 5월 20일 대법원 앞에 탱크가 버티고 서 있었다. 박정희를 살해한 김재규에 대한 선고 공판이 열렸다. 전두환은 대법원에 김재규에게 내란죄를 적용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일부 대법관들은 따르지 않았다. 양병호 등 대법관 6명은 김재규를 내란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소수의견을 냈다.

결국 양병호 대법관이 보안사 서빙고분실로 끌려갔다. 그해 8월 양병호, 임항준, 김윤행, 서윤홍, 민문기 등 대법관 5명은 대법원을 떠나야 했다. 사실상 강제해직이었다. 한승헌 변호사는 당시 양병호 대법관의 상태를 기억하고 있었다.

양병호 대법관님은 마침 저하고 같은 동내에 사셨는데 기관에 가서 당하고 오신 뒤에 어느 날 이른 아침 산책 나가시는데 혼자 걸어오시는데 그렇게 보행이 어려우시더라고요. 군 수사기관에서 가서 아주 육신의 큰 피해를 입고 많이 참 얻어맞고 이런데 상처가 보일 정도로 아주 야만적인 일을 겪고 나와서 사표를 냈죠.

한승헌 변호사

8. 굴종과 오역의 사법 70년. 그러나 반성은 없었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 사법부는 때로는 권력에 굴종하며, 때로는 아부하며 권력을 쫓았다. 그 오욕의 역사는 어디서부터 비롯된 것일까? 일제로부터 해방됐지만 인재가 없다는 이유로 이승만 정권은 사법부에 면죄부를 쥐여줬다. 심판의 대상이 되어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재판관으로 군림하며 출세를 거듭했다.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는 이승만에 맞서 사법부 독립을 지켜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하루아침에 해방이 되고 나니까, 어디서 일할 사람이 따로 없고 일제 하에서 법조인으로 다니던 사람들이 다시 해방 후에도 다시 재판도 하고 수사도 할 수밖에 없었다 하는 불가피한 상황은 있었죠 그러나 역사적으로는 대단히 그 아이러니컬한 것이 그 사람들은 부일 협력자로서 처벌을 받아야 되는데 여전히 (재판정) 단상에 가서 심판을 하고 있으니까 ‘이건 참 잘못된 것이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죠.

한승헌 변호사
▲ 역대 대법관과 대법원장

대한민국 역대 대법원장과 대법관은 137명.  이 가운데 친일반민족 행위자는 4명.  친일 인명사전에 오른 이는 19명이다. 해방 이후, 친일파에 장악당한 대한민국 사법부는 권력에 굴종하고, 영합하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더욱 구축했다. 단죄와 반성이 없었던 친일 판사들은  또다시 우리 역사에 악역을 담당했다.

▲이승만과 김두일 (출처 국가기록원)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재판했던 친일파 김두일은 대법관과 중앙선거관리위원장으로 영전했다. 이승만 정권에서 벌어진 3.15 부정선거, 김두일은 부정선거가 없다고 단언하며, 이승만에게 당선 축하 메시지를 보냈다. 1954년 이승만의 종신집권을 가능케 했던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 내무부 장관으로 가결을 주도했던 백한성. 그 역시 독립운동가를 재판했던 친일파였다. 이승만 정권은 영구집권을 위해 정적 조봉암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사법 살인을 저질렀다. 조봉암에게 사형을 언도한 대법원 재판관 5명 중 4명이 친일 판사였다.

▲이승만과 대법관 일행과 기념촬영 (출처 국가기록원)

대한민국 사법 70년, 오랜 독재에서 벗어나 민주화되면서 조금씩 사법부는 독립을 보장받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는 사법부의 내부의 노력 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사법부의 이름으로 유죄를 선고했던 수많은 피고인들의 희생과 헌신, 죽음으로 쟁취한 것이었다. 사법부는 이런 역사적 진실을 외면했고 과거 잘못에 대한 성찰과 반성도 하지 않았다.

1987년 6월 민주화 항쟁 이후에 사법부의 독립은 그런대로 모양을 갖추어 나가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사법부 자신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국민들의 궐기로 민주화를 쟁취한 덕분이었다. 다시 말해서 법원이 죄인이라고 감옥에 보낸 피고인들의 싸움과 수난에 힘입어 사법부가 독립을 누리게 된 것이다

한승헌 변호사

9. 뉴스타파가 유신판사 명단을 정부 대신해 공개한다.

한 달 만에 행정안전부로부터 답변이 왔다. 당초 기대했던 답변은 아니었다. 누구의 지시로 삭제됐는지 확인할 수 없다고 밝혔다. 또다시 공개할 의사도 없다고 했다.  유신판사가 공개되지 않음으로써 이익을 보는 자는 분명히 있다. 바로 사법농단을 주도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 유신 판사들이다.

자기 양심을 속이고 법을 위반해서 이 사람들을 유죄판결을 내렸는데 지금 당장에 과거에 잘못한 사람들을 우리 사회가 처벌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명단이라도 공개하자 하는 것이 판사들 이름을 공개한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것은 현실 법정에 고발한 게 아니라 뒷날 역사 심판에 우리가 이 사람들을 기록으로 보내는 거죠. 그게 명단 공개예요. 역사 법정에다가 이 사람들을 기소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가 있는 거죠.

안병욱/전 진실화해위 위원장

뉴스타파는 정부를 대신해 유신판사 522명의 명단을 공개한다.

데이터 최윤원, 임송이
촬영 최형석, 오준식
내레이션 손정은
편집 윤석민, 정지성
CG, 타이틀 정동우
리서처 민길주, 전인화, 홍은아
취재 연출 박중석, 박정남, 문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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