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회사 통해 삼성 해외법인에 천억 원대 유입
2019년 03월 05일 08시 01분
2008년 10월 29일 청와대,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이 위촉한 국제자문위원들을 접견하고 이들에게 위촉패를 전달했다. 이 자리엔 존 쏘튼 미국브루킹스연구소 소장, 나라야나 무르티 인도 인포시스 창업회장과 함께 러시아 최대 민간투자 은행 트로이카 다이얼로그 회장 루벤 바르다니안도 국제자문위원으로 참석했다. 바르다니안은 이명박 대통령에게 투자, 국가전력 및 자원, 금융 분야 자문을 한다고 당시 청와대는 밝혔다. 아르메니아 계 억만장자인 그는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자문역이자 러시아 금융계의 거물이다. 다보스 포럼에 연사로 나서고, 세계 저명인사들과 교류하며 자선사업가로도 이름을 알렸다.
바르다니안은 MB의 국제자문위원으로 위촉된 후 한국을 종종 방문했고, 국내 언론과 인터뷰도 했다. 2017년에는 차병원이 아르메니아에 추진하는 ‘차움 딜리잔(Chaum Dilijan)’ 의료센터 사업의 아르메니아 측 파트너, IDeA(Initiatives for Development of Armenia) 투자재단의 회장으로 한국언론에 이름이 오르내렸다. 루벤 바르다니안은 이처럼 한국과는 제법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2019년, 바르다니안은 대통령 국제자문위원, 한국 기업의 해외합작 파트너 등으로 쌓은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등장한다.
OCCRP(Organized Crime and Corruption Reporting Project), 즉 조직범죄와 부패보도 프로젝트와 리투아니아 탐사보도매체 15min은 지난해 국제 돈세탁 거점 은행으로 악명높았던 리투아니아 ‘유키오 은행(Ūkio bankas)’의 입출금 거래 내역을 무더기로 입수했다. OCCRP는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러시아 등을 무대로 활동하는 국제탐사보도 네트워크다. OCCRP 등이 입수한 데이터에는 23만 개 법인이나 개인 사이에 오간 백30만 건의 자금 거래 내역과 각종 계약서, 청구서 등이 망라돼 있다. 은행 거래 데이터 유출로서는 사상 최대 규모다. 2000년대 중반부터 10년 정도 축적된 기록. 거래 금액은 모두 3천 4백억 유로, 우리 돈으로 440조 원에 이른다. 유키오 은행은 돈세탁 등 수상한 거래에 관여한 혐의로 지난 2013년 리투아니아 당국에 의해 폐쇄됐다.
OCCRP는 유키오 은행에서 유출된 거래내역 데이터를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와 영국 BBC, 가디언, 독일 쥐트도이체차이퉁 등 세계 21개 매체와 공유하고, 지난 몇 달 간 국제협업 취재를 진행했다. 협업팀은 러시아 최대 민간 금융그룹인 트로이카 다이얼로그(Troika Dialog, 2012년 러시아 국영 스베르은행 Sberbank에 매각 )가 러시아 고위층 등을 위해 국제 돈세탁 네트워크를 구성했고, 이를 통해 십조 원대의 자금을 세탁한 사실을 확인했다. 트로이카 다이얼로그를 설립하고 운영한 사람은 다름아닌 루벤 바르다니안이다. 취재 결과 트로이카 다이얼로그는 세계 여러 조세도피처에 75개의 유령회사를 설립하고, 리투아니아 유키오 은행에 이들 유령회사 명의로 최소 35개의 계좌를 개설해 돈세탁 네트워크를 가동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 네트워크는 허위 청구서 등을 꾸며 유령회사가 서로 돈을 주고 받게 하는 방법으로 러시아 고위층 등을 위해 돈세탁을 하고 탈세를 도와줬다.
국제협업 취재팀은 이 네트워크를 ‘트로이카 돈세탁기계(Troika Laundromat)’라고 이름붙였다. 이 네트워크를 통한 돈세탁 규모는 88억 달러, 우리 돈으로 10조 원에 이르는 것으로 집계됐다.
뉴스타파는 이와는 별도로 리투아니아 유키오 은행 계좌를 통해 한국에 있는 기업이나 개인에게 입금된 돈은 없는지 분석했다. 확인 결과 2005년에서 2010년 사이 670개 기업 또는 개인계좌로 모두 1억3천만 달러, 우리 돈 천4백억 원이 들어온 것으로 나타났다. 삼성에 들어온 돈도 있었다. 모두 53건에 330만 달러였다. 이 돈은 대부분 뉴질랜드에 설립된 ‘임팔라 트랜스’라는 유령회사가 리투아니아 유키오 은행에 개설한 계좌를 통해 주로 KEB 하나은행 서현역지점의 삼성계좌로 입금됐다.
해외 삼성법인까지 범위를 넓히면 유키오 은행 계좌를 통해 삼성으로 들어온 돈은 이 보다 훨씬 많다. 네덜란드에 있는 삼성전자 해외법인 Samsung Electronics Overseas B.V.(이하 SEO) 한 곳에 들어온 돈만 9천300만 달러, 삼성 계열사 전체에 유입된 돈은 모두 9천60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천억 원이 넘는 것으로 나타났다.
SEO에는 지난 2017년 OCCRP와 뉴스타파 등 국제협업팀이 또 다른 국제 돈세탁 조직을 취재하는 과정에서도 수백억 원대의 수상한 자금 흐름이 포착된 바 있다. 러시아 범죄조직이 돈세탁을 위해 만든 4개 유령회사에서 2,400만 달러, 우리 돈 270억 원에 이르는 거액이 SEO에 들어온 것으로 확인됐지만 당시 삼성은 아무런 해명도 내놓지 않았다.
이번 유키오 은행 계좌를 통해 SEO로 들어온 돈은 이보다 4배나 많은 규모다. 특히 이번 유키오 은행 거래 내역과 함께 유출된 자료에는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의 서명이 있는 수상한 물품대금 청구서도 포함돼 있다. SEO의 의심스러운 자금 흐름은 ‘유령회사 통해 삼성 해외법인에 천억 원대 유입'에서 상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취재 : 김용진, 임보영
촬영 : 최형석
편집 : 정지성
CG : 정동우
디자인 : 이도현
뉴스타파는 권력과 자본의 간섭을 받지 않고 진실만을 보도하기 위해, 광고나 협찬 없이 오직 후원회원들의 회비로만 제작됩니다. 월 1만원 후원으로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