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선 공개, 한국에선 비밀...삼성의 두 얼굴
2014년 12월 09일 20시 56분
삼성 본관이 주소지로 돼 있는 스위스 비밀계좌가 발견됐다. 뉴스타파는 ICIJ(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와 함께 HSBC 스위스지점 프라이빗 뱅크 비밀계좌 고객 정보를 분석하던 중 서울 태평로 옛 삼성본관 26층이 주소지로 된 계좌를 찾았다.
태평로 옛 삼성본관은 삼성그룹이 2008년 서초동 삼성타운으로 본관을 이전하기 전까지 30년 넘게 그룹의 심장부 역할을 했던 곳이다. 삼성본관 26층부터 27층에는 삼성의 핵심 사령탑이었던 전략기획실이 있었고 28층은 회장실이었다. 전략기획실은 과거 삼성 법무팀장이던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촉발된 2008년 삼성 특검 당시 비자금 조성의 배후로 지목된 부서다.
뉴스타파가 찾아낸 문제의 스위스 비밀계좌 계좌번호가 ‘CH49 0868 9050 9109 XXXX X’이고 주소가 ‘OFFICE OF THE EXECUTIVE STAFF 26THFL., SAMSUNG MAIN BLDG. 250, 2KA, TAEPYUNG-RO, CHUNG-KU SEOUL 100-742 KOREA(서울 중구 태평로2가 삼성 본관 26층 임원실)’로 돼 있다. 계좌 개설일은 “1993년 6월 11일”, 명의인은 “김형도” (서류에는 KIM HYNUG DO로 나오는 데 이는 KIM HYUNG DO의 오타로 보인다.)라고 기재돼 있다.
2006년에서 2007년 사이에 예치된 최대 금액은 약 19만 달러, 우리 돈 2억 원 정도이다. 유출된 고객 정보에는 해당 시기 이전에 예치된 금액은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계좌가 개설된 93년과 자료가 유출된 2007년 사이에 들어 있었던 금액은 확인할 수 없었다.
뉴스타파 취재 결과 이 계좌의 명의인 김형도 씨는 현 삼성중공업 전무인 것으로 확인됐다. 김 전무는 93년 계좌 개설 당시에 삼성전자 과장으로 있었다. 이후 그룹 전략기획실로 옮겨 재무팀 등에서 11년 동안 근무했고, 임원으로 승진해 삼성전자, 제일모직 등 핵심 계열사 임원을 거쳤다.
지난 5월 20일, 뉴스타파 취재진은 비밀계좌에 대한 설명을 듣기 위해 삼성중공업 김 전무에게 처음으로 연락을 취했다. 김 전무는 “전혀 모르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이후에도 취재진의 만남 요청에 응하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본인과 관계없는 일이라는 입장을 고수했다.
하지만 열흘만인 5월 30일 김 전무는 갑작스럽게 취재진과 만남을 요청했다. 김 전무는 5월 31일 취재진과 만난 자리에서 “계좌는 돌아가신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고 입장을 바꿨다. 김 전무의 부친은 계좌가 개설되기 1년 전인 1992년 사망했다. 김 전무는 또 “아버지는 평범한 봉급쟁이였으며 아버지가 해외계좌를 왜 개설했는지, 돈의 출처는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김 전무는 그러나 개인 계좌라면 왜 주소를 삼성 본관으로 해 놓았으며, 이후 삼성의 지방 계열사로 인사이동이 된 뒤에는 왜 주소를 변경하지 않았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모르겠다, 고민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김 전무는 취재진에게 HSBC에 연락해 이 계좌가 아버지에게서 상속받은 자신의 개인 계좌 임을 입증하는 서류를 받아오겠다고 말했다.
다시 열흘 뒤인 6월 10일 김 전무는 HSBC가 발급했다는 문건을 뉴스타파에 제출했다. 하지만 이 문건에는 김 전무가 이 계좌의 공동 소유주 가운데 한 명이었고, 93년 9월 김 전무의 단독 명의로 변경됐다고 기록돼 있을 뿐이다. 이 확인서에 아버지로부터 명의를 이전받은 계좌라는 사실은 왜 기재돼 있지 않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김 전무는 “HSBC 측이 당시(1993년) 그게(아버지 사망 관련 서류) 있었기 때문에 이게(명의가) 넘어갔는데 (지금은) 서류를 못 찾겠다고 전해왔다”고 말했다. 김 전무는 다시 아버지 사망 관련 서류를 보내면 사실 관계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그룹 측은 이 스위스 계좌에 대해 “회사와 전혀 관계 없는 개인 명의의 계좌”라고 말했다.
이번에 드러난 스위스 비밀 계좌가 삼성의 해외 비자금 계좌일 개연성은 얼마나 될까. 지난 2007년 김용철 전 삼성 법무팀장의 폭로 당시 해외 비자금에 대한 증언과 내부 문건이 공개됐다. 1992년부터 1999년까지 3천억 원이 넘는 해외 비자금이 조성됐다는 증언과 이를 뒷받침하는 문건이었다. 이번에 발견된 스위스 비밀계좌는 1993년 개설돼 해외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시기와 개설 시점이 일치한다. 그러나 당시 삼성 특검은 해외 계좌 추적이 불가능하다며 이를 수사하지 않았다. 임직원 명의의 차명계좌를 이용해 비자금을 관리하는 것은 과거 삼성이 애용하던 방법이다.
국세청은 뉴스타파에게 지난 2월 ICIJ의 폭로 보도 이후 HSBC 스위스지점 비밀계좌와 연관된 한국인 명단과 계좌 정보를 입수했으며 적법한 절차에 따라 조사를 진행 중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넉 달이 지나도록 가시적인 성과를 내놓은 것은 전혀 없다. 특히 삼성 연관 계좌에 대해 조사를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않았다. 이는 스위스 비밀 계좌 소유자들에 대한 탈세 혐의 수사에 적극 나서고 있는 다른 나라의 조세 당국과 무척 상반되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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