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교도소 습격은 없었다

2019년 04월 04일 16시 16분

이른바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은 5.18 민주화운동 40년째에 접어든 오늘날까지도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세우는데 악용되는 대표적인 사례다.

광주의 폭도들이 광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던 좌익수와 범죄자 등 2천7백여 명을 내보내 사회불안을 가중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80년 대 전두환 정권은 광주학살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른바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을 대대적으로 활용했다.

▲광주시 문흥동에 자리잡은 옛 광주교도소. 좌측 호남고속도로와 우측 광주-담양간 국도 사이에 위치해 있다.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은 지난 1995년 5.18 특별법으로 기소돼 역사의 단죄를 받았다. 광주의 시민들은 폭도가 아니었으며 반란과 내란을 꾀한 자는 전두환이었다는 사법 판결도 내려졌다.

그러나 사법부는 유독 이른바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에 대해서는 계엄군의 손을 들어줬다. 당시 교도소 주변에서 발생한 계엄군과 시민들 사이의 5차례 충돌 과정에서 민간인이 사망한 것과 관련해 계엄군 측의 총격이 정당한 행위였다고 판단했다. 교도소라는 국가보호시설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불가피한 행위라고 면죄부를 준 것이다.

검찰은 상고했지만 대법원은 판단을 바꾸지 않았다. 피해자들의 증언을 배제하고 일부 계엄군의 증언만을 받아들인데 따른 것이었다.

그 여파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두환은 2017년 회고록에서 여전히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고 심지어 일부 극우논객은 법원 판단을 근거로 당시 교도소 공격은 사실이었으며 북한 특수부대가 감행한 것이라 주장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당시 군 기록과 목격자 및 피해자들의 증언, 교도소 주변 현장 취재를 통해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의 진위 여부를 검증했다.

사법부가 인정한 5차례의 ‘교도소 공격’은 모두 계엄군의 ‘광주 외곽도로 완전봉쇄’가 이뤄진 뒤 발생했다.

▲법원이 인정한 5차례의 사례는 모두 3공수가 외곽도로를 차단한 이후 발생했다.

당시 교도소를 방어한 제3공수여단은 교도소 방어 뿐만아니라 담양과 순천으로 향하는 광주 북부의 외곽도로 차단 임무까지 맡고 있었다. 당시 교도소 주변은 지금과 달리 대부분 논과 밭, 얕은 야산이었기 때문에 광주교도소 방호벽 바깥에 참호를 파고 감시탑에 M60기관총을 설치한 공수부대 입장에서는 시야확보가 어려운 상황이 아니었다.

 5차례의 ‘공격’지점을 보면 2번은 고속도로 상에서 3번은 국도상에서 발생했다. 광주교도소는 호남고속도로와 국도 사이에 위치해있다.

▲80년 당시 광주시 지도상에 표시한 이른바 ‘공격’ 지점

호남고속도로에서 광주교소도 정문으로 가기위해서는 교차로로 진입해야하는데 2차례의 공격 지점은 교차로를 지나 담양 방향으로 진행한 지점이다. 이 곳은 계엄군이 트럭 등으로 바리케이트를 설치해놓은 지점이기도 하다. 교도소 정문도 아닌 5미터 높이 방호벽이 가로막고 있는 교도소 옆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교도소 해방을 위해 공격했다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다.

더구나 21일 19시30분에 ‘교도소 공격’으로 둔갑한 사건은 실제로는 광주로 볼 일을 보러왔다 집으로 가던 담양주민 4명이 공수부대 공격을 받아 고규석, 이은택 씨 등 2명이 숨지고 2명이 다친 사건이다. 부상당한 2명은 차에서 내린 뒤에도 계엄군에게 몰매를 맞은 뒤에야 가까스로 풀려났다. 그러나 군 기록에는 야산에서 계엄군을 공격하기 위해 무장시위대가 난사한 기관총에 이들이 숨졌다고 기록돼 있다.

▲21일 19시30분 담양주민 피격 지점과 당시 상황

22일 0시40분 사건도 고속도로 위에서 발생했다. 취재진이 당시 총격을 받고 차량에서 내려 도망갔던 유종수 씨의 군 검찰 심문조서를 입수했는데 유 씨는 “담양군 창평면 예비군 무기고를 털러 가는 길이었다”고 진술했다. 교도소 공격이 아니라 고속도로를 지나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국도 상에서 발생한 3차례의 이른바 ‘공격’도 교도소와는 한참 떨어진 곳에서 발생했다.

22일 09시 충돌은 교도소 진입로에서 50미터 앞 국도 상에 세워놓은 바리케이트 앞이었다. 당시 사고 직후 현장에 도착했던 박남선 당시 시민군 상황실장은 이들이 담양으로 광주소식을 알리러 가던 중이었다고 주장했다.

23일 10시20분 사건은 교도소 진입로에서 6백미터 넘게 떨어진 동일실고 자리에서 발생했다. 당시 비무장상태로 소방차 옆에 매달려 타고 가던 심영의 씨는 공수부대가 동일실고 옥상에서 총격을 가했다고 증언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심 씨는 목숨이 위험할 정도로 구타를 당하며 교도소 습격 관련성을 추궁받았지만 결국 풀려났다. 당시 합수부 입장에서도 혐의를 입증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군 기록엔 교도소 공격으로 둔갑돼 있다.

23일 저녁 7시 사건도 교도소와는 최소한 1km 떨어진 곳에서 발생했다. 교도소 공격과는 무관하다.

최용주 5.18기념재단 비상임연구원은 “당시 광주 상황을 알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국도와 고속도로를 통해 외곽으로 나가려고 했다. 광주교도소는 담양과 순천으로 향하는 고속도로와 국도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 것이지 시위대의 교도소 공격이 있었다고 보기는 힘들다”라고 말했다.

실제 광주시 북쪽 외곽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광주교도소 부근에서는 군기록에 남아있는 5차례 사건 외에도 많은 민간인들의 피해 사례가 발생했다.

22일 새벽 4시 40분에는 목포로 가기 위해 부산에서 관광객 30명을 태우고 출발했던 관광버스가 교도소 옆 호남고속도로에서 총격을 받아 부산 기장군에 사는 박경구 씨등 2명이 총상을 입었다.

22일 오전 10시엔 채소행상 김성수 씨 일가족이 김 씨 처가가 있는 진도로 가려고 고속도로를 탔다가 교도소 옆에서 총격을 받았고, 후유증으로 부인이 사망했다.

국도 상에서도 22일 서만오 씨가 동생을 찾으러 나왔다 계엄군의 총격에 목숨을 잃었고 채종일 씨는 직장 동료들과 회사 차를 타고 가다 교도소에서 700미터 넘게 떨어진 곳에서 계엄군의 공격을 받아 총상을 입었다.

이에 대해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비무장 민간인을 공격한 사례는 군 기록에서 모두 빼버리고 총격전이 있었던 사례들만 모아서 마치 시민들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교도소를 공격한 것처럼 조작했다. 광주에 대한 폭력적인 진압을 정당화 하기 위해 그렇게 교묘하게 바꿔버린 것이다. 교도소를 공격했다고 하면 누구도 좋게 보질 않으니까”라고 말했다.

전두환은 2017년 회고록에서 신군부의 주장처럼 광주시민들이 교도소를 공격했다고 수차례 언급했다가 광주 5월 단체에서 제기한 배포금지 가처분 소송에서 패해 관련 부분은 모조리 삭제됐다.

하지만 지만원 씨 같은 경우 당시 북한특수부대가 광주교도소를 공격하다 430명이 사망했다는 황당한 주장을 펼치면서 여전히 계속해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심지어 북한군 사망자 430명의 유골이 2014년 청주 흥덕지구 축구장 조성공사 현장에서 발견된 유골이라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들은 집권 기간에 안기부와 기무사 등을 동원해 ‘80위원회’나 ’ 511위원회’를 만들어 끊임없이 5.18의 실체를 조작하고 왜곡하는 조직적인 작업을 진행했다.

광주항쟁 40년이 다 돼 가도록 이 같은 거짓, 날조 주장이 버젓이 펼쳐지고 되풀이되는 것은 이들 주장을 제대로 검증하고 충분히 반박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취재 : 최기훈
촬영 : 최형석 신영철 오준식
편집 : 박서영
CG : 정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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