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2021년 10월 4일부터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 주관으로 전세계 600여 명의 언론인과 함께 <판도라페이퍼스: 조세도피처로 간 한국인들 2021>프로젝트 결과물을 차례로 보도합니다. 국제협업취재팀은 트라이던트 트러스트, 알코갈, 아시아시티트러스트, 일신회계법인 및 기업컨설팅(홍콩) 등 14개 역외 서비스업체에서 유출된 1190만 건의 문서를 입수해 취재하고 있습니다. -편집자주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조세도피처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실이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 취재 결과 최초로 확인됐다. 설립 시기는 2008년 3월에서 5월 사이다. 당시는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비자금 의혹을 폭로해 촉발된 특검 수사와 그 후폭풍이 일던 시기와 겹친다.
삼성그룹은 그동안 여러 차례 해외에서 비자금을 조성하고 은닉했다는 의혹을 받아왔지만 그룹 총수가 조세도피처 유령회사를 설립한 사실이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뉴스타파는 1200만 건에 이르는 판도라페이퍼스 파일을 분석하던 중,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설립한 조세도피처 페이퍼컴퍼니를 발견했다. 이재용 부회장의 역외 법인 설립 관련 문서는 세계 최대 역외서비스 업체인 트라이덴트 트러스트(Trident Trust)의 고객 관리 파일에서 나왔다.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소재 법인 '배처리 파이낸스 코퍼레이션'의 설립 문서에는 법인 실소유주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이름과 주소가 적혀 있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뉴스타파 등이 공동 취재하고 있는 ‘판도라페이퍼스’ 프로젝트 데이터베이스에 이재용의 영문 이름(Jae Yong Lee)을 검색하면 모두 200여 건의 파일이 나온다.
뉴스타파 취재진이 이재용이라는 이름으로 검색되는 문서를 모두 검토한 결과 서울 용산구 한남2동 OOO번지를 주소로 기재했고, 생년이 1968년인 이재용을 찾았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주소 및 생년 정보와 부합했다.
취재진은 이와 함께 이 파일에 함께 첨부된 여권 사본 한 장을 발견했다. 흑백의 팩스 전송 문서여서 흐릿하기는 하지만 이재용 부회장의 여권 사본이 분명했다. 생년월일도 동일하고, 여권 서명란의 사인도 이재용 부회장이 사용하는 영문 사인 ‘Jay Y. Lee’ 가 선명하게 보였다. 이 부회장 관련 파일이 최종 확인된 것이다.
해당 관련 파일을 분석한 결과 이재용 부회장은 대표적 조세도피처, 영국령 버진아일랜드(BVI)에 설립된 페이퍼컴퍼니 ‘배처리 파이낸스 코퍼레이션’(Bachury Finance Corp.)을 지난 2008년 취득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유령회사의 설립일은 2008년 3월 7일이다.
BVI 회사 배처리 파이낸스의 이사는 모두 3명이 등장한다. 스위스인 아이린 스포리, 사이프러스인 페트로스 리바니오스 그리고 영국 국적의 안드레아스 무스트라스다. 이들은 이재용 부회장과 별 관계가 없는 인물로 보인다. 확인 결과, 이 3명 모두 전현직 트라이덴트 트러스트 임직원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의 이름은 수많은 조세도피처 페이퍼컴퍼니의 차명이사(nominee diretor) 등으로 등장한다. 이처럼 역외 서비스 업체의 차명 서비스를 통해 겉으로 보면 배처리 파이낸스와 이재용의 관계는 드러나지 않게 했다.
하지만 트라이덴트 내부 문서 중 주주 명부를 보면 이재용 부회장이 등장한다. 이 회사 자본금은 5만 달러, 1달러짜리 주식 5만주를 발행한 것으로 돼 있는데 이 부회장이 단일 주주로 올라와 있다. 해당 파일에는 주식증서도 첨부돼 있는데, 이재용의 이름과 함께 서울 한남동 주소도 기재돼 있다. 증서 발급일은 2008년 5월 2일이다. 이 부회장은 실제 이날 이 회사 주식을 취득한 것으로 보인다.
▲'배처리 파이낸스 코퍼레이션'의 주식증서에는 이 부회장의 이름과 함께 서울 한남동 주소도 기재돼 있다.
트라이덴트 트러스트에서 유출된 이재용 관련 파일에는 배처리 파이낸스 설립 비용 청구서도 나왔다. 여기에도 베네피셜 오너(Beneficial Owner), 실제 수익 소유자로 이재용이 적시돼 있다.
▲신규 고객 이재용에게 보낸 법인 설립 비용 청구서. 모두 1,700달러가 기재돼 있다.
이상 파일 내용을 종합하면 이재용 부회장이 취득한 BVI 법인 배처리 하이낸스는 차명 이사를 내세워 주인이 노출되지 않게 만든 서류상의 회사, 즉 전형적인 페이퍼컴퍼니이다. 자금 출처나 실소유주는 회사 설립 대행사같은 역외 서비스 업체 내부에만 보관돼 있다.
그렇다면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은 어떤 목적으로 이 역외 법인을 만들었을까? 배처리 파이낸스 관련 서류에 삼성그룹의 흔적은 이재용이라는 이름을 제외하면 전혀 없다. 따라서 취재진은 이재용 부회장이 이 페이퍼컴퍼니를 개인 목적으로 설립했다고 보고, 이 부회장 측에 직접 질의서를 전달하기로 했다.
취재진은 지난 9월 한남동 이재용 부회장 자택에 질의서를 전달하려고 했으나 경비원들에게 저지당했다. 할 수 없이 추석 연휴 전과 연휴 직후 두 차례에 걸쳐 우체국 등기우편으로 질의서를 발송했으나 모두 반송돼 왔다. 반송 사유는 수취인의 ‘수취 거부’였다.
뉴스타파는 마지막 통로로 삼성전자 홍보실에 질의서를 전달하고, 이 부회장에게 전달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질의서를 전달한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삼성전자 측은 내부적으로 검토 중이라고만 전할뿐 아무런 답변도 내놓지 않았다.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이 BVI 유령회사 배처리 하이낸스는 취득한 시기는 특별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지난 2007년 10월 29일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 출신인 김용철 변호사가 정의구현사제단을 통해 삼성비자금 의혹을 폭로했다. 김 변호사의 양심선언을 계기로 2008년 1월부터 특검수사가 4개월간 이어진다. 그 해 4월 17일 조준웅 삼성특검이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삼성이 무려 4조5천 억 원의 이건희 회장 비자금을 그룹 임직원 이름을 차용하거나 도용해 만든 1200개 가까운 차명계좌에 은닉해 온 사실이 밝혀졌다.
하지만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한 삼성의 해외비자금 조성 의혹은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조준웅 특검은 특검은 해외비자금의 경우 사실상 수사가 불가능해 손을 대지 않았다고 말했다.
삼성그룹과 이건희 회장에게는 사상 최대 위기였던 이 시기에 그룹 총수 후계자인 이재용이 조세도피처에 은밀하고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것이다.
이에 대해 윤영대 투기자본감시센터 공동대표는 뉴스타파와 인터뷰를 통해 “삼성 특검이 이건희 회장의 국내 은닉 자산 4조 5천 억원 가량을 찾아내긴 했지만 해외비자금 문제는 거의 들여다보지 않았다. (이재용 회장의 페이퍼컴퍼니는) 국내에서 적발되지 않은 자산을 해외로 빼돌리거나 이미 해외에 있는 재산을 좀 더 안전한 곳으로 옮기기 위한 용도였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뉴스타파는 2013년부터 조세도피처 추적 프로젝트를 계속 하고 있는데 삼성그룹 관련 의혹이 다른 기업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이 나왔다. 뉴스타파가 삼성의 해외비자금 및 자금세탁 의혹을 보도한 사례는 다음과 같다.
삼성 측은 그러나 뉴스타파의 이 같은 보도에 대해 지금까지 책임 있는 해명을 내놓지 못하거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그리고 2021년 뉴스타파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의 국제협업 취재를 통해 사상 처음으로 삼성그룹 오너가 조세도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