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식 공권력...살인 물대포에 부검까지
2016년 09월 29일 21시 27분
6월 항쟁과 직선제 개헌, 그리고 대선까지 한국 현대사의 분수령이었던 1987년. 외교부가 최근 생산 30년이 지나 비밀해제한 외교 문서엔 1987년 5공 말기 전두환 정부와 경찰의 인권 의식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흥미로운 문서가 나왔다. 또 국제앰네스티(Amnesty International) 사무총장 일행의 한국 방문에 얽힌 비화도 새롭게 드러났다.
1987년 2월, 국제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의 이안 마틴 사무총장은 주영 한국대사를 통해 한국에 방문하고 싶다는 서한을 보냈다. 한국의 양심수 현황과 고문 등 인권침해 상황을 살펴보고 법무부장관, 내무부장관, 치안본부장(현 경찰청장), 안기부장(현 국정원장) 등과 면담을 하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외무부는 “국제사면위(국제앰네스티)가 그동안 국내의 문제 인사들로부터 일방적으로 입수한 정보를 기초로 아국의 인권 상황을 왜곡하는 등 국제 여론을 오도한 면이 없지 않으나, 동 사무총장의 방한에 협조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인권상황에 관한 국제사면위의 부정적 인식을 시정 내지 완화할 수 있는 계기로 활용할 수 있다고 판단”한다며 관계부처인 안기부, 법무부, 내무부에 공문을 보내 마틴 사무총장의 방한에 대한 각 기관의 입장 회신을 요청한다.
가장 먼저 회신한 법무부는 “(마틴 사무총장의) 방문에는 협조할 것이나, 방문 전에 질문내용을 사전 통보해 달라"고 요청했다. 안기부도 국제앰네스티가 “한국의 인권 실상을 오해하여 국제여론을 오도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한다면서도 “입국을 불허하게 되면 오히려 우리나라의 인권 문제가 심각한 양 오도할 소지가 있"다면서 국제앰네스티를 상대로 한국의 인권 개선 의지 홍보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반면 경찰은 “(마틴) 사무총장 일행을 접견하게 되면 1) 반정부 세력과의 접촉을 공식화하는 결과가 되고, 2) 동 일행은 마치 인권문제 조사관과 같이 일방적인 질문공세를 펼 것이 예상되며, 3) 선입관을 갖고 있어 아무리 합리적인 설명을 하더라도 믿지 않을 것"이라며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 일행의 방한에 강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결국 마틴 사무총장의 치안본부(경찰청) 방문은 성사되지 않았다.
1977년 노벨평화상, 1978년엔 유엔인권상을 수상한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를 ‘반정부 세력’이라고 규정한 지점에서 당시 경찰 지휘부의 인권 인식이 어떠했는지를 엿볼 수 있다.
실제로 1987년 경찰 최루탄을 맞고 숨진 이한열 열사와 2015년 경찰의 물대포를 맞고 숨진 백남기 농민 사건을 비교해보면 경찰의 이러한 인식이 30년이 지나도 크게 바뀌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한열 열사가 사망한 1987년 7월, 경찰은 “압수할 물건: 이한열의 사체 1구"라고 적힌 압수영장을 들고 시신 압수를 시도했다. 30년이 지난 2016년 9월에도 경찰은 백남기 농민 시신 부검영장을 2차례나 발부받아 강제 집행을 시도했다.
2016년 1월 한국을 방문한 마이나 키아이 ‘유엔 평화적 집회 및 결사의 자유’ 특별보고관이 한국 경찰의 물대포 사용과 차벽 설치에 우려를 표한 것을 두고 강신명 당시 경찰청장은 “인식의 오류가 있다"고 정면 반박하며 유엔에 반박 서한문까지 보냈다. 그는 백남기 농민이 의식불명에 빠진 데 대해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며 끝내 사과를 거부했다.
이런 경찰의 입장은 정권 교체 이후 돌변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보름 만인 2017년 5월 26일, 경찰은 “앞으로 집회 현장에 경찰력, 살수차, 차벽을 배치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 한 달 만인 2017년 6월에는 이철성 경찰청장이 “민주화 과정에서 경찰에 의해 유명을 달리하신 박종철, 이한열님 등 희생자분들과 특히 2015년 민중총궐기 집회 과정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고 백남기 농민께 깊은 애도와 진심어린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후에도 이 청장은 백남기 농민 사건에 대해 두 차례나 더 사과를 했다. 지난 3월 15일에는 유족들과의 면담을 시도했으나 유족들의 거절로 무산됐다.
한편 이번에 공개된 외교부 문서에서는 전두환 정권 때 한국을 방문한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 일행이 세관에서 서적을 압수당한 사실도 드러났다. 마틴 총장과 함께 한국을 찾은 프랑스와즈 밴달 당시 국제앰네스티 동아시아 담당 연구원은 1987년 6월 출국 시 김포세관에 책 9권을 압수당했다. 장기표 항소이유서, 서울노동운동 연합사건 1심 법정투쟁기록 2부, 말 지 특집호(1986년 9월호),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을 다룬 “우리들의 딸 권양", “고문없는 세상에 살고싶다" 등 주로 당시의 노동, 인권 관련 서적이었다.
밴달 연구원은 영국에 도착한 후 주영 한국대사관을 통해 서적 반환을 요청했다. 그러나 김포세관은 “해당 서적 9권이 관세법 제146조에서 수출입이 금지된 별지목록에 해당하는 것으로 관계 규정에 따라 처분되어 반환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주영한국대사관은 이 답변을 6월 23일 국제앰네스티 측에 전달했다.
이에 이안 마틴 국제앰네스티 사무총장은 7월 31일자 서한문을 통해 재차 서적 반환을 요청한다. 이 서한문에서 마틴 사무총장은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 가지 불유쾌한(unhappy) 사건이 있었다"며 밴달 연구원이 “정보기관 소속으로 추정되는, 정체를 밝히지 않은 정부 관계자들에 의해 서적들을 압수당했다"고 밝혔다. 또 “국제앰네스티 방문단이 서적을 압수당한 것은 한국에서는 이번이 처음이고, 국제앰네스티 역사상 세계 모든 나라를 통틀어 두 번째 있는 일”이라며 불쾌감을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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