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타운에서 <택시운전사> 관람...광주 기억 다시 떠올라
지난달 버지니아주 페어팩스에 있는 코리아타운에서 영화 <택시운전사>를 보면서, 나는 지난 4월과 5월 광주에 다녀온 기억에 휩싸였다. 당시 나는 광주시의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내가 기증한 5.18 관련 미국 정부의 기밀해제 문서 3,500건을 5.18기록관이 수집한 유물, 사진, 부검보고서, 영상자료와 통합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내 얼굴과 이름이 언론에 알려지면서, 거리나 식당에서 광주 시민들이 나를 알아보고는 다가와 함께 셀카를 찍고 이야기를 걸었다.
그들 중 일부는 김준태 시인처럼 5.18 당시 항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었다. 다른 이들은 부모의 경험이나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통해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광주 시민들이 광주 학살의 참상을 최초로 찍어 전세계에 보도했던 독일 촬영기자 고 위르겐 힌츠페터에게 그랬던 것처럼,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내가 한 노력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영화에서 한 시민은 광주 사태 보도를 막으려는 정부의 탄압에 대해 “그들의 거짓말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달라"고 광주를 떠나는 힌츠페터 기자에게 부탁한다. 광주 시민들은 그에게 공식 뉴스는 ‘말도 안 되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고, 군부가 사용한 ‘폭도’나 ‘빨갱이’라는 용어의 이면에 있는 진실을 밝히려는 사람들을 ‘유언비어’를 퍼뜨린다고 매도했다고 말한다. 이 단어들은 나도 2017년에, 그리고 1980년대에 광주를 처음 방문했을 때 모두 들었던 적이 있는 것들이다.
힌츠페터의 영상이 광주항쟁 취재 계기가 돼
▲2016년 5월 16일 광주 망월동에서 열린 위르겐 힌츠페터 기자 추모식.
그러나 나에 비하면 힌츠페터 기자의 공헌이 훨씬 더 크다. 힌츠페터 기자와 그를 군이 봉쇄한 광주시로 데리고 간 운전사 김사복은 광주 보도를 위해 목숨을 걸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의 진실을 기록하겠다는 힌츠페터 기자의 결심은 전두환의 군부가 정권을 잡으며 자행한 범죄를 만천하에 드러내며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데 크게 기여했다. 중앙데일리가 보도한 것처럼, 그가 촬영한 영상은 “한국 역사상 가장 비통하고 괴로운 순간들 중 하나를 포착했다.” 그는 전세계 사람들이 한국의 군부 파시즘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게 도움으로써 전두환과 그 정권의 평판에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오점을 남겼다. 그의 업적은 나에게도 개인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1980년대에 대학원생이자 정치활동가로서 나는 그가 포착한 영상을 보고 깜짝 놀랐고, 광주에서 벌어진 일이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일이었다는 것을 금방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비록 그 영상을 힌츠페터 기자가 찍었다는 사실은 여러 해가 지난 뒤에야 알게 되었지만, 그의 영상을 통해 알게 된 광주의 참상은 내가 5.18 당시 미국의 역할을 밝히는 데 큰 동력이 되었다. 나는 영원히 그 고마움을 잊지 못할 것이다.
2016년에 나는 그에게 직접 감사의 말을 전할 기회를 갖게 될 뻔했다. 그 해 5월, 광주시는 나를 포함하여 격동의 현장에 광주시에 있었던 몇몇 외국인 ‘5.18 언론인’ 을 사흘간의 행사에 초청했다. 안타깝게도 힌츠페터 기자는 그 해 1월에 세상을 떠났다. 대신 그의 부인 에델트라우트 브람슈테트가 행사에 참석할 수 있었고, 2016년 5월 16일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기리는 추모식이 열린 망월동 묘역에서 연설을 했다. 망월동 묘역은 5.18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국립 5.18 민주묘지 옆에 있다. 나는 그녀의 연설과 현수막에 적혀 있는 힌츠페터 기자의 다음과 같은 말에 크게 감동받았다.
나는 그 사람들이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진실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도 알 수 있었다. 내 필름에 기록된 것은 모두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그 날 5.18 언론인들을 위한 오찬장에서 나는 브람슈테트 씨에게 그녀의 남편의 훌륭한 업적에 대해 감사의 말을 전했다. 최근에 나는 그녀가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서울에서 <택시운전사>를 관람한 소식을 접하고 기뻤다.
광주학살 재조사에 5.18 당시 미국의 역할도 반드시 포함돼야
올해 5.18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광주 시내에서 60명 이상의 시민이 총에 맞아 숨진 1980년 5월 21일에 누가 발포명령을 내렸는지 규명하기위해 군부의 학살 사건을 조사겠다고 선언했다. 문 대통령은 “광주의 진실은 외면할 수 없는 분노였다"고 말했다. 이번주 초 한국 국방부는 군인들이 시민들을 향해 헬리콥터에서 발포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는 의혹과 전두환이 광주를 진압하기 위해 전투기를 준비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 조사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5월 21일에 군이 시민들을 향해 발포하는 참혹한 장면은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잘 묘사하고 있으며, 전면적인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나는 5.18의 진상규명에 있어 영화에서도, 국방부 조사에서도 중요한 부분이 빠졌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5.18 당시 미국의 역할이다.
내가 1996년에 광주항쟁 관련 기사에서 문서로 제시한 바대로 카터 행정부의 최고위 국가안보 관계자들은 1980년 5월 22일 백악관에 모여 당시 한국 군부를 지지하기로 합의했다.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전두환과 그의 계엄군이 5월 18일부터 21일 사이에 발생한 참혹한 유혈사태에 책임이 있음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한 결정을 내렸다. 따라서 영화가 좀 더 정확하기 위해서는 군인들이 시민을 향해 발포한 다음날 미국 정부가 전두환의 광주 진압을 지원하기로 결정했었다는 사실을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자막으로 언급할 필요가 있다. 그럼으로써 한국 사람들에게 “외면할 수 없는 진실”을 알리고, 동시에 위대한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의 업적을 기릴 수 있을 것이다. 광주 시민들은 적어도 그 정도 대접은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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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I watched the Gwangju drama “A Taxi Driver” in a Korean neighborhood in Fairfax, Virginia, last month, I was overwhelmed with memories of my last visit to the city in April and May. At the time, I was working with Gwangju City’s 5.18 Archives to integrate my 3,500 declassified US documents on the uprising into their collection of artifacts, photographs, autopsy reports and videos from May 18. As my face and name became familiar in the media, citizens began to recognize me and flag me down on the street, and even in restaurants, for selfies and conversations.
Some of them, like the Gwangju poet Kim Jun Tae, had participated in the uprising. Others only knew what happened through their parents’ experience or from school. But all of them sought me out to thank me and express appreciation for my work, just as they do in the film to Jurgen Hinzpeter, the late German photojournalist who captured the first images of the Gwangju massacre and broadcast them to the world. “Prove that their lies are wrong,” one grateful citizen says to him as he’s about to leave the city, about the government’s attempt to suppress any reporting of the events. The official news, they told him, was “useless crap,” while people trying to expose the truth behind the military’s use of such phrases as “rioters” and “commies” to describe Gwangju’s demonstrators were denounced for spreading “groundless rumors.” Those were words and phrases I’d heard before too, both in 2017 and my first visits to the city in the 1980s.
But Hinzpeter was far more deserving than I. He and Kim Sa-bok, the taxi driver who brought him through military roadblocks into the city, risked their lives for his story. Hinzpeter’s decision to document the truth of May 18, 1980, helped change the course of history by unmasking the crimes of the Chun Doo Hwan military group as they seized power.
As the JoongAng Daily reported, his video “captured one of the most heartbreaking and anguishing moments in Korea’s history.” He helped people around the world understand the true nature of military fascism in South Korea, forever staining the reputation of Chun and his government. His work was also important to me personally: as a graduate student and political activist in 1980, I was stunned by the images he captured, and was able to quickly grasp that what had happened in Gwangju was far worse than anyone could imagine. Even though I did not know Hinzpeter was responsible for these clips until many years later, the knowledge he passed to me helped drive my pursuit for the full story about the US role in 5.18, and is something I will be forever grateful for.
In 2016, I almost got a chance to thank him in person. That May, Gwangju City invited me and several of the foreign “5.18 journalists” who had been in the city during those tumultuous events for a three-day visit. Hinzpeter, unfortunately, passed away in January. But his widow, Edeltraut Brahmstaedt, was able to come, and on May 16, 2016, spoke at a ceremony honoring her husband at the resting place for Gwangju victims at Mangwol-dong, which is adjacent to the May 18 National Cemetery. I was greatly moved by her talk and the inscription from Hinzpeter written on a banner: “I heard the voice of the people shout and realized how dangerous truth can be and the film that I recorded is unavoidable truth.” Later that day, I sat with Ms. Brahmstaedt at a luncheon for the 5.18 journalists, and expressed to her my thanks for her husband’s great work. Recently, I was glad to see she had been the guest of honor when President Moon Jae-In saw “A Taxi Driver” in Seoul.
At this year’s 5.18 commemorations, President Moon declared that his government would investigate the rebellion to determine who was responsible for ordering the massacre that took place on May 21, 1980, when over 60 people were shot dead in downtown Gwangju. “The truth of Gwangju is a rage I cannot ignore,” he said. Specifically, South Korea’s Ministry of Defense said this week it will focus on allegations that soldiers were ordered to fire on protesters from helicopters and that Chun had readied fighter jets to support the crackdown. The horrific scenes of the firing from May 21 are depicted in painful detail in “A Taxi Driver,” and underscore the need for a full investigation. But in my view, there’s an important piece of information missing from both the film and the military’s investigation into the events of 5.18: the American role.
As I documented in my original 1996 stories about the uprising, the top national security officials in the Carter administration met at the White House on May 22, 1980, and agreed to back the South Korean military. This meeting was held with the full knowledge that Chun and his martial army were responsible for the terrible bloodshed between May 18 and May 21. To be fully accurate, a statement should be added at the end of the film stating that, one day after the massacre portrayed in its climactic scene, the United States decided to support Chun’s suppression of the uprising. That would provide an “unavoidable truth” to the people of South Korea, and simultaneously honor the memory and integrity of the great Jurgen Hinzpeter. The people of Gwangju deserve no less.
취재 : 팀 셔록
번역 : 임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