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두 달 반이 지나는 동안 여러 변화가 있었습니다만, 그중에서 시민들이 가장 체감할 수 있었던 변화는 대통령실 이전이었을 겁니다. 그동안 워낙 여러가지 일들이 많아 지금은 다소 잊혀진 감이 있지만 이전 계획을 발표할 당시만해도 천문학적인 이전 비용과 무속 논란 등을 배경으로 상당한 반대가 있었죠.
반대를 무릅쓰고 윤석열 대통령이 집무실 이전을 강행했던 명분은 딱 하나, '국민들과의 소통'이었습니다. 제왕적 대통령 권력의 상징인 청와대에서 벗어나 미국 대통령 집무실인 백악관처럼 시민들과 직접 소통을 할 수 있는 공간으로 옮기겠다는 것이었죠. 취임 두 달 반이 지난 지금 그 약속은 지켜지고 있을까요? 용산 대통령 집무실 앞은 미국 백악관처럼 시민들이 자유롭게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됐을까요?
대통령실 인근 집회 22건 모두 불허 결정.. 행정 소송은 9전 9패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경찰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 이후 시민들이 신청한 대통령실 인근 집회 22건에 대해 모조리 금지 결정을 내렸습니다. 몇몇 시민단체들은 경찰의 금지 결정이 집회 시위의 자유를 침해한다며 행정 소송을 냈습니다. 결과는 어땠을까요. 9전 9패. 집회를 금지당한 시민단체들이 낸 행정 소송에서 경찰이 받아든 성적표입니다.
집회 금지 포기하지 않는 경찰
법원이 9번이나 집회 금지가 부당하다는 결정을 내렸는데도 경찰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본안 소송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전히 대통령 집무실 100미터 이내의 집회를 막고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대통령 집무실 건너편 시위는 허용하고 있지만 그조차 집회 인원을 500명 이내로 통제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들과의 본안 소송을 위해서는 수천만 원을 주고 대형 로펌을 선임하기도 했고요. 이쯤되면 경찰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뉴스타파는 경찰과 시민들이 대통령실 인근 집회 금지 문제로 벌이고 있는 소송 기록을 입수해 그 이유를 살펴봤습니다.
경찰의 억지 논리 1 : "대통령 집무실은 관저로 봐야"?
경찰이 집회 시위를 막고 있는 첫번째 논리는 "대통령 집무실은 관저로 봐야한다"는 주장입니다. 이 문제를 이해하려면 약간의 배경 설명이 필요합니다. 집회시위법 11조 3항에는 "대통령 관저 경계에서부터 100미터 이내에서는 집회 시위를 할 수 없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 과거 대통령이 청와대에 머물 당시 청와대 인근 100미터 이내에서는 집회 시위를 할 수 없었던 근거가 되었던 규정입니다. 청와대는 대통령의 집무실인 동시에 관저이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를 각각 다른 곳에 두기로 하면서 새로운 가능성이 생겼습니다. 위에 소개한 집시법에 따르면 '관저' 100미터 이내에서는 집회를 할 수 없지만 '집무실'에 대해서는 따로 규정이 없으니까요. 이게 바로 윤석열 대통령 당선 이후 시민단체들이 집무실 앞 집회를 신청했던 배경입니다.
경찰은 시민단체와의 소송에서, 위 집시법 조항에 나온 '대통령 관저'란 집무실과 거주지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법령에 쓰인 용어를 정의하는 규정이 따로 없을 경우에는 사전적 의미에 따라야 한다"는 판례에 따르면 경찰의 주장은 법적으로 옳지 않은 주장입니다. 특히 경찰의 법령 해석이 시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방향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입니다. 당연히 법원은 경찰의 주장이 틀렸다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통령실 이전의 명분이 '시민들과의 소통'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찰의 자의적인 법령 해석은 더욱 부적절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경찰의 억지 논리 2 : "시민들은 언제든 폭력 행사할 수 있다"?
경찰이 법원에 낸 답변서를 보면 집회에 참석한 시민들이 "대통령실을 향해 야구공이나 소주병 같은 위험한 물건을 던질 수 있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시민들의 집회 시위를 위험하고 폭력적인 것으로 전제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경찰은 이같은 전제를 뒷받침할만한 어떤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경찰의 논리를 받아들인다면, 경찰은 언제든 자의적으로 특정한 집회 시위를 금지할 수 있게 됩니다. 그저 '위험한 행동을 할 수 있다'라고 주장하면 되니까요.
경찰의 억지 논리 3: "소음이 대통령 업무를 방해한다"?
역시 경찰이 법원에 낸 답변서에는, "집회 소음에 따른 대통령 집무실 업무 방해가 필연적"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론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에는 "기준치를 넘는 소음을 발생시켜서는 안된다"는 조항이 있습니다. 그러나 소음을 근거로 집회를 금지하거나 해산할 수 있다는 조항은 없습니다. 특히 경찰이 주장한 업무 방해와 관련해서는, 집회시위 중 소음이 발생한다해도 법에서 정한 기준을 넘지 않으면 업무방해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판례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집회 시위에서 발생한 소음의 경우 기준치를 넘느냐 아니느냐가 중요한 관건인데, 경찰이 낸 답변서 어디에도 시민들이 어느 정도의 소음을 내기 때문에 대통령의 업무가 방해받는다는 것인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죠.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집회 시위의 소음 정도를 경찰이 미리 알 수는 없을테니까요.
'성소수자 차별 반대 무지개행동'의 박한희 변호사는 "대통령 집무실에 대통령이 있으니까 대통령이 들으라고 시위를 하는 것인데 그걸 소음이라고 해버린다면 '난 너희들 얘기를 안듣겠다'는 얘기"라며 더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서울행정법원은 이렇게 판시했습니다. "국민의 다양한 목소리와 고충을 듣고 국가 정책을 수립하여야 하는 대통령 직책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대통령의 업무가 이뤄지는 공간은 집회 및 시위의 금지장소로 지정하지 않는다"
윤석열 대통령의 '국민'은 누구인가
"국민은 늘 대통령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대통령도 늘 국민과 소통하며 일할 것입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후보 시절 대통령실 이전 공약을 발표하며 직접 했던 말입니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들만 살펴보면 그때 윤석열 대통령이 말했던 국민이란, 자신을 지지하거나 자신과 친한 사람들만을 지칭했던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워집니다. 이렇게 경찰과 여당이 힘을 합쳐 대통령 집무실 앞 시위를 막는 동안 윤석열 대통령 팬클럽 회원들은 대통령 집무실 공간을 마음대로 돌아다니다 기자들에게 발각됐고, 패륜적 주장을 일삼아 온 극우 유투버와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의 주범 권오수 회장의 아들이 취임식에 초청을 받기도 했으니까요.
대통령 집무실이 대통령과 친한 사람들과만 소통하는 공간이 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 속에, 여당인 국민의힘이 경찰을 지원하기 위해 나섰습니다. 국민의힘은 지난 4월 '대통령 관저 경계 100미터 이내'만 집회 시위를 금지한다는 집시법의 현행 규정을 '대통령 관저 및 집무실 100미터 이내'로 고치는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습니다. 개정안이 통과되면 대통령 집무실 앞 집회는 원천 금지될 수 밖에 없습니다. 여당도 경찰처럼 '알아서 기는' 걸까요. 아니면 대통령의 의중이 반영된 것일까요.
대통령실 앞 집회 시위에 나서는 시민들은 대통령이 집무실 공간에 들이는 '친한 사람들'과는 반대로 현 정부에 불만이 있거나 뭔가 개선을 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연하지만 헌법은 이런 사람들의 집회 시위의 자유도 보장하고 있습니다. 법원이 시민들과 경찰과의 소송에서 시민들의 손을 들어준 것도 그래서겠죠. 윤석열 대통령은 이제 초심으로 돌아가 자신을 반대하는 국민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