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경험...스포츠가 분단극복의 촉매였다

2018년 02월 14일 20시 46분

최근 며칠은 독일에게 매우 뜻깊은 기념일이었다. 지난 2월 5일은 독일을 동독과 서독으로 갈라놓았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지 28년 2개월 27일이 되는 날이었는데, 이 기간은 베를린 장벽이 서 있었던 기간과 일치한다. 그리 오래되지 않은 분단 경험을 되돌아볼 수 있는 순간이었다.

만약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1989년 11월 9일이 되기 며칠 전에 독일 사람들에게 앞으로 분단이 얼마나 더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면, 아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앞으로 오랫동안 분단 상황이 계속될 것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산주의 정권인 독일민주공화국이 장벽을 열어젖힘으로써 러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던 공산주의 동독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그 11월 밤, 수천 명의 베를린 시민들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두동강 낸 그 장벽을 향해 다가갈 때, 러시아 탱크들은 부대 안에 그대로 있었다. 동독의 대표 자동차인 트라반트(Trabant, 일명 Trabi)가 서쪽으로 넘어가고, 사람들이 브란덴부르크 문 위에서 춤을 추는 그 날의 영상들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소식은 곧 전세계에 퍼졌다. 한 손에 트럼펫을 든 남자가 베를린 장벽 위에 올라가 오래된 독일 찬송가 “다 감사드리세"를 연주하던 순간은 잊을 수 없는 장면이다. 그 날 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분단 상태였던 독일인들 사이의 열정과 연대감을 불러일으켰다. 1961년 8월 13일 건립된 베를린 장벽은 러시아 점령의 상징이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의 붕괴

1989년 11월 무렵 러시아는 이미 동독에 대한 통제를 완화한 상태였다. 러시아 지도자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헬무트 콜 당시 서독 총리는 직무 상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서로 점차 우호적인 태도를 쌓아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대치 상태가 완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완전한 통일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사회민주당과 같은 독일의 좌익 정당들은 자신들 세대에서는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고 봤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은 유럽 한가운데서 다시 강해지는 통일 독일이 등장하는 것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갖고 있었다. 이미 경제대국이 될 조짐을 보이고 있던 독일의 이웃나라인 영국과 프랑스의 입장은 미국과 달랐다. 독일은 유럽 통합에 헌신하겠다는 약속과, 당시 추진 중이던 유럽의 새로운 단일 화폐인 유로에 동의를 표시하면서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 통일 계획에 동의하도록 설득했다.

그렇다면 독일은 자국민을 어떻게 설득했을까? 이미 44년 간이나 분단이 지속된 상태였다.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분단됐다가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분단 이전부터 독일은 로마가톨릭 교파가 우세한 남부와, 루터교파가 우세한 북부로 문화적인 차이를 갖고 있었다.

이들이 사용하는 방언도 다르고, 북부의 프러시아인과 남쪽의 바이에른인 사이의 문화적 헤게모니는 독일 내 서로 다른 사고방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스포츠가 있었다! 동독과 서독 모두 이전부터 축구를 사랑해왔고 여전히 축구를 즐겼다. 구 동독이 공식적으로 독일연방공화국에 흡수되는 조약이 서명된 해인 1990년, 독일은 로마에서 열린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 1990년 로마 월드컵에서 우승한 독일팀 (출처:FIFA)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날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월드컵 우승 소식에 독일인들은 통일된 독일의 국기를 흔들며 전국적으로 차량 퍼레이드를 벌이며 자축했다. 월드컵 우승이 독일을 다시금 민족주의적인 국가로 되돌려놓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후 독일은 소프트파워를 토대로 국제 관계와 외교 분야에서 국제적인 리더십을 갖게 됐다. 하버드대학 조셉 나이 교수가 만든 용어인 ‘소프트파워'는 언어, 음악, 영화 등 현대 민주주의 체제가 가진 순전히 문화적인 힘이 어떤 매력을 갖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즉 제3자의 존경과 감탄을 자아낼 수 있는 모든 요소를 뜻한다.

소프트파워의 가장 대표적인 예가 미국이다. 미국의 영화, 음악과 대중문화는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팬들을 만들었다. 이러한 연성 자산은 한 국가의 인기를 높이고 이를 바탕으로 해당 국가의 외교정책을 관철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특히 한국은 영화, 음악, 패션, 라이프스타일 등의 분야에서 한류라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만큼 소프트파워를 가진 나라가 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분명히 이해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통일된 지 거의 30년이 지난 독일의 현재는 어떨까? 독일인들은 여전히 과거의 사고방식으로 인한 문제로 고심하고 있다. 특히 과거 동독 지역 주민들은 공산주의 독재뿐만 아니라 그 직전에는 나치 정권을 겪어온 터라 민주주의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여러 설문조사 결과를 살펴보면, 젊은 세대들 사이에는 태도나 가치에 있어 거의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동질성은 과거 ‘철의 장막'을 가운데 두고 살았던 노년층들이 보이는 격차와 비교하면 더욱 뚜렷해진다.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남북 합의로 결성된 여성하키 남북단일팀

스포츠는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한 긍정적인 인식과 함께 결속을 위한 집단적 분노 표출의 매개 역할을 해 왔다. 2006년 월드컵을 개최한 통일 독일은 평화로운 스포츠 행사를 위해 전세계에서 온 사람들을 환영했다. 한국을 방문하는 독일인으로서 필자는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선보인 여성하키 남북단일팀이 남북 간 서로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인지 여부에 관심이 많다. 이에 대해 필자가 할 수 있는 말은 분단됐던 독일의 경우, 결코 통일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틀렸다는 사실을 역사가 보여줬다는 것뿐이다.

알렉산더 괼라흐는 하버드대 F.D. 루즈벨트 재단의 ‘민주주의 수호(In Defense of Democracy)’ 프로그램 소속 교수이자, 카네기 국제윤리위원회(Carnegie Council for Ethis in International Affairs) 선임연구원, 영국 케임브리지대학의 예술, 사회과학 및 인문연구센터(Centre for Research in the Arts, Social Sciences and Humanities) 연구원을 겸하고 있다. 괼라흐 교수는 언어학과 비교종교학 박사로 뉴욕타임스와 노이에 취르허 차이퉁에 칼럼을 기고한다. 그는 토론잡지 ‘더 유로피안(The European)’ 창간자이자 온라인 잡지 ‘Save Liberal Democracy’의 발행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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