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가짜뉴스'(fake news)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것은 굉장히 음험한(insidious)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가짜뉴스', '국민의 적'(enemy of the people)이라는 표현은 나치 독일, 스탈린의 소련 등 인류 역사의 끔찍한 순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런 용어들은 독재자들이 독립적인 언론을 제거하고 나라를 통제하는 데 쓰였다."
지난 10월 19일 뉴욕타임스 회장 아서 설즈버거가 서울대를 방문해 ‘자유 언론에 대한 위협’이란 주제로 강연하면서 쏟아낸 말입니다. 그는 ‘가짜뉴스(fake news)’라는 말은 언론의 자유를 위축시킬 수 있다며 ‘허위 정보(misinformation·disinformation)’라는 용어로 바꿔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뉴욕타임스, 윤석열 대통령 ‘가짜뉴스'를 구실로 언론탄압
뉴욕타임스는 오늘(11월 10일)자 기사(https://www.nytimes.com/2023/11/10/world/asia/south-korea-fake-news-disinformation.html)에서 뉴스타파 사무실과 기자 자택 압수수색 등을 언급하며 윤석열 대통령과 그 정부가 ‘가짜뉴스' 근절을 구실로 검찰과 규제기관을 동원해 언론탄압을 자행하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기사는 김기현 국민의힘 대표의 “사형에 처해야 할 국가반역죄” 발언도 인용하며, 그 대상이 스파이가 아니라 윤 대통령을 비판적으로 다룬 기사를 다룬 뉴스매체였다고 비꽜습니다.
또 많은 한국국민들이 세계 각지의 독재자들이 사용하는 구호이자 양극화돼 가고 있는 국내 유권자들을 더욱 분열시키는 가짜뉴스라는 표현을 대통령이 사용하는 것에 분노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영화 ‘스포트라이트’의 실제 주인공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진 마틴 배런 전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을 기억하시나요? 그는 18년간 편집국장으로 재직했던 워싱턴포스트를 2021년 떠난 뒤 최근 회고록을 펴냈습니다.
마틴 배런은 ‘권력충돌: 트럼프 베조스 워싱턴포스트’라는 제목의 이 책에서 가짜뉴스'라는 용어가 어떻게 최고권력자의 언론 공격에 활용됐는지를 많은 지면을 할애해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그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워싱턴포스트, CNN, 뉴욕타임스 등의 언론사를 지속해서 ‘가짜뉴스' 미디어, 미국민의 적(the enemy of the American People)이라고 공격하며 비판적 기사를 매도하고, 지지층을 규합했다고 주장했습니다.
마틴 배런의 회고록 ‘권력충돌: 트럼프 베조스 워싱턴포스트’-출처: 아마존
전설의 마틴 배런, ‘가짜뉴스’라며 언론 공격한 트럼프 집중 비판
배런 전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은 또 트럼프가 언론을 비난하며 사용한 ‘가짜뉴스’, ‘국민의 적’ 같은 표현은 스탈린, 마오쩌둥, 히틀러의 선전가 요제프 괴벨스가 억압과 살해를 위해 사용한 문구의 불길한 메아리며, 트럼프는 이런 선동적 언어의 역사나 그것이 언론인을 향한 공격을 부추길 수 있다는 위험성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고 비판했습니다.
어떻습니까? 윤석열 대통령과 집권여당, 대통령의 하수인이 돼 버린 방통위와 방심위의 행태에서 트럼프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는가요? 윤 대통령은 전 세계 독재자의 반열에 오르고 싶어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지난 2일 영국에서 열린 제1차 ‘인공지능 안정성 정상회의’에 화상 참여해 “가짜뉴스가 자유를 위협하고, 민주주의 시스템을 위협"한다고 말했다더군요.
윤석열 대통령 국내외에서 끊임없이 ‘가짜뉴스' 타령
또 지난 7일에는 대구에서 열린 ‘바르게살기운동 전국회원대회’에 참석해 “바르게살기운동이 가짜뉴스 추방에도 앞장서고 있는 것으로 안다”, “가짜뉴스 추방 운동이 우리의 인권과 민주 정치를 확고하게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다"라고 했습니다.
11월 7일 대구 북구 엑스코에서 열린 2023년 바르게살기운동 전국회원대회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대통령실
앞서 봤듯이 세계 유력언론사 발행인, 퓰리처상을 받은 탐사보도를 수없이 지휘한 전설의 편집국장뿐 아니라 국내 대다수 언론, 법학자들도 ‘가짜뉴스'는 권력자가 비판언론을 탄압하는 공격 용어로 악용되고 있다고 강조합니다. 그 대신 ‘허위 정보’라는 말을 써야 한다고 거듭 이야기하죠. 그러나 윤석열 대통령은 가짜뉴스가 자유민주질서를 침해한다는 식의 똑같은 레퍼토리를 무한 반복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대통령의 말은 결과적으로 많은 검사와 수사인력을 투입해 언론인을 계속 압수수색하고, 방송통신심의회 등이 ‘가짜뉴스센터’ 등을 급조하게 하는 가이드라인이 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근거가 없으면 ‘가짜뉴스센터'에 배치된 방심위 직원들이 권한 없는 일을 하다가 나중에 책임을 뒤집어 쓸 수 있다(https://www.khan.co.kr/national/media/article/202311101501001)며 원 부서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할까요.
방심위가 법적 근거도 없이 뉴스타파 보도를 심의하겠다고 나섰다가 결국 포기하고 엉뚱하게 서울시에 통보(https://kcij.org/notice/u/bpQ-Y)한 것도 이 정부가 내세우는 ‘가짜뉴스' 대책의 실체를 보여주는 겁니다.
저는 가짜뉴스라는 용어는 폐기하고 허위정보라는 말을 사용해야 한다는 국내외 저명 언론인이나 학자들의 견해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윤석열 정권이 깔아놓은 ‘가짜뉴스' 판이 역설적으로 어쩌면 유용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국민의힘 박성중 의원은 뉴스타파를 지칭해 ‘가짜뉴스의 숙주’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진짜 가짜뉴스의 숙주, 바로 잡아 말하자면 ‘허위정보의 숙주'가 어디인지 이참에 가려보자는 겁니다.
‘허위 정보’의 대표적 진원지는 권력과 기득권 상업 언론
뉴스타파는 올해 3월 ‘윤석열 대통령의 3대 거짓말'(https://newstapa.org/article/Xzaz7)이라는 보도를 했습니다. 윤 대통령의 거짓말은 대다수 언론을 통해 퍼져나갔습니다. 최고 권력자의 스피커는 크기 마련이죠. 대통령, 검찰, 거대 정당, 국가기관에서 발화한 허위정보가 언론 보도로 사실처럼 둔갑하는 사례는 수없이 많습니다. 어느 것이 더 민주 질서를 위협하고 우리 사회의 신뢰를 갉아먹을까요.
권력자들이 진실을 숨기기 위해 유포하는 거짓말과 함께 허위정보 유포의 대표적 진원지 중 하나로 ‘기사형 광고'를 꼽을 수 있습니다. 상업언론의 변종 돈벌이 수단이죠. 규정이 있지만 그것을 어긴 기사형 광고가 우리나라 대표적 매체를 통해 매년 만 건 이상 유포되고 있습니다. 기사처럼 생겨서, 그 내용을 믿었던 많은 독자들이 재산과 건강을 잃는 일이 끝없이 일어납니다.
미디어감시 독립매체 ‘뉴스어디'가 ‘기사형광고’ 4만 6천건을 분석한 특별페이지-출처: 뉴스어디
뉴스타파함께재단과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가 함께 진행하는 뉴스타파저널리즘스쿨의 독립언론 양성 프로젝트를 통해 창간한 미디어감시매체 ‘뉴스어디'는 2020년부터 지난 8월까지 3년 8개월 동안 독립심의기구에 의해 적발된 불법 ‘기사형광고' 4만 6천여 건을 입수해 분석했습니다. 사기 분양 사업 등이 훌륭한 투자처인양 멀쩡한 기사처럼 언론에 게재됐고 수백명의 사람이 수백억 원의 피해를 봤다고 합니다.
‘순진짜 가짜뉴스’의 진원지를 진짜 가려보자
과연 허위정보의 진원지는 어디일까요? 이동관 방송통신위원장이 얼마 전 ‘순진짜 가짜뉴스'라는 기상천외한 말을 지어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순진짜 허위정보'의 진원지는 어디일까요?
오래 전 일이지만 조선과 동아일보의 이른바 ‘친일 논쟁’이 떠오릅니다. 동아일보가 1985년 창간 65년 특집호에서 느닷없이 자신들은 민족지이고 조선일보는 친일신문이라는 기고문을 실었습니다. 조선일보는 발끈했고, 옥석을 가려보자고 맞섰습니다. 둘 다 화려한 친일 경력이 있었던 만큼 흥미진진한 싸움이 될 것으로 기대됐지만 조선일보의 물귀신 작전에 동아일보가 꼬리를 내려버렸죠. 그 때 옥석을 가렸어야 했는데, 싱겁게 끝난 건 한국 언론 역사에서 아쉬운 대목 중 하나입니다. 물론 제대로 가렸다면 ‘옥’은 없고 ‘석’만 남았겠죠.
이제 이동관 위원장의 표현을 차용해 마치겠습니다. ‘순진짜 가짜뉴스'가 진짜 뭔지, 어디가 숙주이고 주요 진원지인지 가려야 할 때입니다. 우리 사회와 민주주의를 위해, 옥석을 가려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