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재벌 재산관리인의 고백 ② 도망친 선장

2021년 04월 12일 16시 40분

1997년 한국 경제가 무너졌다. 국가가 부도나고 기업이 쓰러졌다. 사람들은 거리로 내팽개쳐졌다. 한낮의 공원에 넥타이족이 서성거렸고, 어떤 아내는 노숙인들 사이에서 남편을 찾았다. 
언론은 국민을 탓했다. 사람들은 어리둥절했다. 주 6일 별 보고 출근해 별 보고 퇴근하던 이들이다. 수입품 사용과 해외 여행이 달러를 동 냈다는 말이 유행가 가사처럼 퍼졌다. 사람들은 장롱 속 돌 반지까지 꺼내가며 금붙이를 모았다.  
마몬(Mammon, 물신)은 위기 속에 본색을 드러낸다. 모두가 고통받던 시절, 그래도 한국 경제를 책임져야 한다는 명분으로 부정 축재의 죄를 유예 받았던 재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언젠가 또 한 번 위기가 찾아왔을 때, 70년 된 재벌 체제는 어떤 본색을 드러낼까. 뉴스타파가 이미 20년이 지난 이야기를 꺼내는 한 재벌 재산관리인의 고백에 귀를 기울인 이유다. <어느 재벌 재산관리인의 고백> 두 번째 이야기다. (<어느 재벌 재산관리인의 고백> 1편 다시 보기 : https://newstapa.org/article/MQnR1)

배가 갈라진 거위

호황의 파티가 끝나자 재벌 체제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눈부신 성장 이면에는 과도한 빚, 황제 경영, 그리고 이대로 괜찮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이 있었다.  
IMF 경제 위기 이전에는 기업들이 은행 대출을 받아서 기업을 키워나가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은행 대출을 많이 받을수록 능력 있는 기업가로 평가받던 시대였습니다. IMF 경제 위기로 은행의 대출이 막히자 거꾸로 부채 비율이 높았던 기업일수록 먼저 망하게 됐습니다. 당시 은행 이자가 연 20~30% 수준이었습니다.

재벌의 오너 1인 중심 의사결정구조는 과거 빠른 결정을 내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IMF 사태 이후에는 오히려 굉장한 리스크가 됐습니다. 오너가 잘못된 결정을 내려도 당시 분위기 속에서는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겁니다.

공제욱 / 상지대 교수, 재벌사 연구
1997년 종금 사태는 외환 위기를 부른 재벌들의 패착 중 하나다. 종금은 종합금융회사의 약칭이다. 
종금사는 90년대 재벌 체제의 '황금알을 낳는 거위'였다. 저리의 해외 대출을 끌어와 고리의 국내 어음과 채권을 사들이는 방법으로 손쉽게 수익을 올렸다. 재벌마다 종금사를 가지려고 안달이었다. 이 때문에 당초 6개였던 종금사가 IMF 직전 30개로 늘어났다. 실력도 경험도 없는 재벌 종금사가 단기간에 늘어나면서 관리와 감독도 허술해졌다. 부실은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재벌들이 운영하는 종합금융회사는 IMF 외환 위기 사태를 부른 원인이 됐다. 이때 30개 중 22개의 종금사가 퇴출됐다.
해외발 연쇄도산이 시작되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가 갈라졌다. 돈 길이 막히고 해외 채권자들은 앞다퉈 돈을 거뒀다. 외화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면서 국내 외환보유고는 악화일로에 있었다. 결국 외환 위기가 터졌다. 정부는 뒤늦게서야 사태의 원흉인 종금사 구조조정에 나섰다. 22개 종금사가 이때 퇴출됐다. 
대한방직 그룹은 종금 사태 한복판에 있었다. 아세아 종금은 대한방직 그룹의 주력 계열사였다. 종금사 구조조정 당시 퇴출은 피했지만 내부는 이미 만신창이였다. 2000년 3월 아세아 종금의 재정 상황은 2300억 원의 자본 잠식, 자기자본비율(BIS)는 마이너스였다. 차명 계좌를 통해 모기업 대한방직에 불법 대출된 자금도 1000억 원이 넘었다.
아세아 종금의 곪은 속은 시장이 먼저 알아챘다. 연일 주가 폭락으로 회사는 주식시장 퇴출 위기에 놓였다. 아세아 종금이 무너지면 대한방직의 다른 계열사도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다. 계열사들은 아세아 종금 자사주 매집에 나섰다. 시세 조종 혐의를 받을 수 있었지만 급한 불을 먼저 꺼야 했다. 170억 원에 이르는 계열사 자금이 동원돼 아세아 종금의 주가를 떠받쳤다.  
대한방직 2세 설원식 회장은 흔들리고 있었다. 재벌가 장남으로 태어나 일평생 겪어보지 못한 위기였다. 평소 보수적이고 신중하게 결정을 내리는 성격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위기 앞에 평정심을 잃었다. 17년간 최측근 비서였던 안형열 씨에게도 낯선 모습이었다. 

선원들에게는 배 지키라며 도망친 선장

설원식은 안 씨에게 뜻밖의 지시를 내렸다. 계열사들이 회삿돈으로 아세아 종금의 주식을 사들이는 동안 자신의 차명 주식을 모두 처분하라는 지시였다. 회사를 살리려고 안간힘을 쓰는 직원들 몰래 자신만 빠져나가겠다는 얘기였다. 침몰하는 배 위에서 키를 부여잡은 선원들은 아랑곳 없이 선장이 먼저 배를 떠나겠다고 하는 꼴이었다. 안 씨는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지시는 단호했다. 무조건 팔아라.
20년간 보관해 온 안 씨의 가방. 그 속엔 당시 상황을 담은 문건이 있다. 2000년 3월 차명주식 거래장부에 따르면, 설 회장은 이 시기 2억 원이 넘는 아세아종금 차명 주식을 현금화했다. 한 임원 명의의 계좌에서 닷새에 걸쳐 18만여 주를 처분한 것으로 확인된다.
△ 안형열 씨가 관리한 차명주식 거래장부 일부. 계열사들의 자사주 매집이 계속되고 있던 2000년 3월, 아세아종금 차명주식 18만여 주를 처분했다.
설원식과 그의 일가는 도망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차명 주식을 처분한 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IMF 경제 위기가 터져 나왔을 때부터 설 씨 일가의 은밀한 탈주극은  진행되고 있었다. 안 씨가 그 전말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다.

도망칠 땐 그들처럼

안 씨의 가방에는 회사가 무너지는 중에도 일가의 재산을 지키는 데만 골몰하는 재벌의 또다른 민낯도 담겨있다. 
2000년 9월에 발행된 한 법무사 사무소의 영수증. 서울과 대구 등지의 15개 필지에 대해 근저당권을 설정한 비용이다. 의뢰인은 설원식 회장, 영수 금액은 4800만 원이다. 근저당권을 설정한 필지 가운데는 설원식 회장의 장충동 자택도 있다. 이 시기 장충동 자택의 등기부 등본을 보면 '잼코'라는 이름의 회사가 등장한다. 자칫 한국자산관리공사 '캠코'와 혼동하기 쉬운 이름이다. 이 회사는 장충동 자택에 97억 원의 채권 최고액을 설정했다.
취재 결과, 이 회사는 당시 설원식 회장이 소개받은 한 로비스트의 법인으로 확인됐다. 이 로비스트는 안 씨의 지인을 통해 연결됐다. 빌리지도 않은 돈을 빌린 것으로 모의하고 허위 근저당권을 등기에 남겼다. 회사가 망했을 때 집과 부동산이 압류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리 손을 써 둔 것이다. 근저당권자가 있을 경우 세무당국이 강제집행에 나서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한 불법 강제집행 면탈 행위다.
△ 설원식이 살던 장충동 자택 등기부 등본. 한국자산관리공사 '캠코'와 이름이 유사한 이름의 회사가 근저당권을 설정했다. 이 회사는 설원식이 소개받은 한 로비스트의 법인이었다.
설 씨 일가는 이 허위 근저당권 덕을 봤다. 아세아 종금 부도 이후에도 일가는 이 집에서 압류 없이 잘 살았다. 이 근저당권은 5년 동안 여러 회사를 떠돌다 설 씨 일가의 세무 문제가 정리된 2005년 모두 변제됐다. 장충동 자택은 2012년 신탁회사에 맡겨졌다가 2014년 고 이건희 삼성 회장에게 350억 원에 매각됐다. 
대한방직 그룹의 일부 계열사를 위장 계열사로 만들기 위한 작업도 포착됐다. 2000년 4월 안씨가 작성한 차명 주식 거래 보고 문건. 차명 주식을 매도한 명의를 뜻하는 좌측에는 설범을 비롯한 대한방직 주요 임원의 이름이, 매수한 명의를 뜻하는 우측에는 비교적 대한방직과 관계가 적은 차명, 즉 설범의 친인척이나 지인의 이름이 있다. 매도 금액과 매수 금액은 동일하다.
IMF 경제 위기 이후부터 설 씨 일가는 대한산업, 아세아세라텍 두 계열사에서 대한방직의 흔적을 지우는 작업을 해왔다. 1997년과 1998년 등기이사에서 설범과 어머니 임 씨의 이름이 지워졌다. 2000년 4월 보고된 문건 내용은 남은 지분 관계도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두 회사와 관계있는 대한방직 임직원 명의의 차명주식을 모두 처분함으로써 명목상 두 회사는 대한방직 그룹으로부터 분리됐다. 하지만 차명 주식을 통해 여전히 설 씨 일가 소유의 회사로 유지되고 있다.
△ 2000년 4월 안형열 씨가 설원식 회장에 보고한 문건. 대한산업, 아세아세라텍과 연결고리가 되는 임직원 명의의 차명주식을 처분했다.
이 일련의 작업은 한 가지 목적으로 통한다. 회사가 망하더라도 재벌 일가의 재산은 뺏기지 않도록 수를 쓴 것이다. 허위 근저당권으로 압류를 피하고, 계열사 부도의 불똥이 튈 수 있는 회사는 차명으로 감췄다. 이러한 자산 은닉, 강제집행 면탈 작업은 효과를 봤다. 이듬해 설원식은 불법대출과 시세조종 행위로 기소됐지만 재산을 내놓는 일은 없었다. 검찰 조사를 받을 때쯤에는 이미 모든 자산에서 설원식의 이름이 지워져 있었다. 설원식은 2015년 사망 때까지 170억 원을 미납한 고액 상습체납자 신세였다. 설씨 일가의 유족들이 상속을 포기하며 체납 세금을 내야할 의무도 사라져 버렸다.

증여세 낮추려 주가 조작도

안 씨가 관리한 차명주식 거래장부에는 1998년 9월 전후의 거래 기록이 유독 많다. 이 기간 거래금액과 거래 주식 수는 다른 기록과 구분되게 붉은 글씨로 쓰였다. 이 내용을 모아보면, 두 달 동안 6개 차명 계좌에서 7만여 주가 63회에 걸쳐 매도한 것으로 확인된다. 대한방직 전체 발행 주식의 7%에 해당하는 물량이다.
△ 안형열 씨가 관리한 차명주식 거래장부 일부. 2달에 7만 여 주를 저가 매도한 것으로 나타난다. 이 시기는 2대 설원식이 주식 증여를 통해 3대 설범에 대한방직을 승계한 시기였다.
설원식은 왜 이렇게 많은 차명 주식을 처분하도록 지시했을까. IMF 경제 위기는 경영권 승계의 적기였다. 대한방직의 주가는 기존 시세의 30분의 1 수준으로 폭락했다. 주식을 증여할 때 내야 할 증여세도 대폭 줄어든 셈이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승계를 할 수 있는 조건이었다는 뜻이다. 문제는 주식시장이  반등세에 있었다는 것. 증여세는 증여일 전후 2개월간 거래소의 평균 종가를 기준으로 한 평가액에 따라 매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한방직 일가에게는 어떻게든 시세를 낮게 유지하는 것이 유리했다. 설원식이 안 씨에게 차명 주식을 시장에 풀도록 지시한 것도 이런 맥락에 있다. 대량의 차명 주식을 일부러 낮은 가격에 지속적으로 거래하면 시세가 오를 수 없게 된다. 이른바 종가 관리다.
확인 결과, 당시의 종가관리 작업은 효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종가관리가 이뤄진 시기, 코스피 지수는 300포인트에서 450포인트까지 급반등했다. 하지만 대한방직의 주식 시세는 증여일 17400원에서 오히려 하락한다. 1달 뒤엔 12150원 정도로 떨어진다. 종가 관리가 끝나자 시세는 다시 큰 폭으로 상승한다. 이듬해 1월에는 증여일 대비 2배 가까운 금액에 거래된다. 

진승현 게이트 당시에도 200억 원 빼돌려

2000년 7월, 아세아 종금은 부도 처리됐다. 설 씨 일가는 아무런 피해 없이 유유히 빠져나갔다. 부도의 책임은 끝까지 회사에 남아 지키려 했던 임직원들에게 돌아갔다. 한 임원은 책임을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부도난 회사라도 재벌에겐 쓸모가 있었다. 종금회사 라이선스가 남아있었고, 이것은 돈이 됐기 때문이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설 씨 일가의 또 다른 검은 거래가 여기에 있다.
2001년, 세상은 한 27살 청년으로 인해 떠들썩했다. 사업 시작 2년 만에 9개 회사를 인수하며 '벤처업계의 기린아'로 불린 진승현이었다. 이 잘나가는 20대의 이면에는 거대한 사기극이 있었다. 불법 대출과 시세 조종, 비자금 조성과 정치 헌금 등 진승현의 범죄 행위엔 거침이 없었다. 권력의 비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며 나중엔 의혹이 정치권으로 번져 나갔다. 이른바 진승현 게이트다.
바로 이 진승현이 불법 대출을 끌어 쓴 회사 가운데 하나가 한스종금이다. 아세아종금을 인수해 이름을 바꾼 회사다. 진승현 게이트 판결문에는 대한방직 3세인 설범의 이름이 등장한다. 2000년 4월 설범과 진승현은 여의도 대한방직 회장실에서 만났다. 그리고 대한방직이 가지고 있는 아세아종금의 주식 870만 주를 10달러에 매각하는 기이한 계약을 체결했다. 아세아종금의 발행주식 28.6%, 104억 원 상당의 주식을 단돈 만 원에 팔아버린 것이다.
△ 진승현 게이트 판결문에는 아세아 종금 매각의 이면 계약 내용이 나온다. 대한방직 소유 주식을 헐값에 파는 대신, 설씨 일가 소유 차명주식을 시세보다 비싼 가격으로 팔았다. 
이면 계약이 있었다. 회사가 보유한 주식을 헐값에 넘기는 대신 설 씨 일가가 차명으로 갖고 있던 아세아 종금 주식 620만 주를 시세보다 높은 가격인 204억 원에 사들이도록 했다. 아세아종금의 부도로 그룹 전체가 위기에 빠진 상황에도 설 씨 일가는 회사에 막대한 손해를 입히면서 수백억 원 규모의 비자금을 빼돌린 것이다. 이면 계약에는 대한방직이 아세아 종금으로부터 끌어쓴 불법 대출 1000억 원은 상환을 3년 유예시켜주기로 한 조건도 포함됐다.

아들의 난... 그리고 검찰과의 거래

진승현 게이트 수사가 본격화되면서 검찰에 이면 계약이 포착됐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일제히 설 씨 일가로 향했다. 장충동 자택에 기자들이 들이닥쳤고 설원식의 이름이 전파를 탔다. 당시 설원식은 지병 치료차 해외에 체류 중이었다. 진승현 게이트가 일파만파 커지며 엉겁결에 해외 도피가 됐다. 귀국도 도피도 여의치 않은 상황에서 설원식은 또 다른 위기를 마주한다. 이른바 아들의 난이었다.
설원식이 미국으로 떠났을 때 이미 반란은 시작됐다. 설범은 안 씨가 있는 비서실에 들이닥쳐 아버지 설원식의 차명 주식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계열사의 차명 주식은 본인 소관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설범은 믿지 않았다. 설범의 편이었던 비서실 말단 직원들은 이때부터 비서실장인 안 씨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했다. 설원식과 전화 통화하기 위해 자리를 비우면 누군가 안 씨를 따라붙었다. 회사는 안 씨를 전주공장으로 전보 발령 냈다. 이 발령은 나중에 안 씨를 무단결근으로 해고하는 빌미가 됐다.     
△ 설원식의 장충동 자택. 설원식의 배우자 임 씨는 이른바 '아들의 난'이 일어나자 안형열 씨에게 전화해 가족 사이에서 설원식이라는 이름을 지웠다고 말했다. 
설원식의 배우자 임 씨도 이미 남편보다는 아들인 설범에게 기운 상황이었다. 임 씨는 식솔 같았던 안 씨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지금 이 순간 이후로 통화를 하지 말자는 얘기였다. 설 씨 일가에서 설원식이라는 이름을 지웠으니 이후의 일은 설원식과 상의해 알아서 하라고 했다. 
안 씨는 혈혈단신인 설원식의 호출을 받고 미국으로 떠났다. 접선 장소는 하와이, 설원식의 차명 콘도였다. 설원식은 안 씨를 만나자마자 울었다. 설원식에게는 안 씨가 최후의 보루였다. 안 씨는 남은 설원식의 사람들과 함께 가족들 몰래 설원식을 귀국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안 씨의 마지막 수행길이었다.
우선 검찰과의 교감이 필요했다. 입국장에서 포승줄에 묶인 회장의 모습이 언론에 노출되도록 둘 수 없었다. 힘 있는 변호사가 필요했다. 안 씨는 지인을 통해 홍석한 변호사를 소개받았다. 경력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홍 변호사의 뒤에는 권력의 실세가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처조카이자 예금보험공사 전무였던 이형택이다. (이듬해 이형택 씨는 홍 변호사를 대동해 이용호게이트 특검의 조사를 받는다. 홍 변호사는 2015년 고인이 됐다.)
△ 설원식의 사건을 수임한 홍석한 변호사의 영수증. 홍 변호사는 당시 권력 실세로 불리던 이형택 전 예금보험공사 전무의 대리인이었다.
검찰은 설원식 측이 제안한 거래를 받아들였다. 자수를 하는 대신 입국장에서 체포는 하지 않기로 했다. 안 씨는 검찰이 안내한 게이트로 설원식을 통과시켰다. 다행히 언론의 눈에 띄지 않았다. 이어진 검찰 조사도 수월했다. 안 씨는 재벌가의 관행대로 설원식을 휠체어를 태웠다. 수염을 기르게 하고 머리를 헝클어 뜨렸다. 수액 주사 바늘을 꽂고 간호사를 대동했다.
조사실 검사의 태도는 깍듯했다. 설원식에 90도 인사를 올렸다. 설 회장이 도착했을 때 이미 조서의 내용은 나와있었다. 검사의 몇 마디 질문에 답을 하다 말고 설원식이 두통을 호소했고, 조사는 중단됐다. 검사는 조사실 옆방을 내주었다. 검사는 조사실에 덩그러니 남은 안 씨에게 몇 가지 묻고 조사를 끝냈다. 조사실을 나서며 홍 변호사는 넌지시 집행유예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모든 게 계획대로였다. 하지만 검찰 조사를 받는 사이 설원식의 마음이 달라져 있었다. 반란을 일으킨 아들이라도 피붙이는 피붙이였다. 설원식 자신도 아버지 설경동에 권총을 들이미는 반란 끝에 대한방직을 쥔 전력이 있었다. 설원식은 자신이 일가의 죄를 모두 책임지는 것으로 검찰과 말을 맞췄다. 진승현 게이트 판결문에는 진승현과 맺은 이면 계약의 당사자로 설범의 이름이 나오지만, 검찰은 그를 기소하지 않았다. 일가의 범죄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고 했던 설원식 자신도 반년 뒤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고령과 한국 경제에 대한 기여 등이 양형 사유였다. 불법과 탈법으로 점철된 대한방직 일가의 40여 년에 대한 면죄부였다.

마지막 수행

검찰 조사가 끝나고 안 씨는 설원식을 차에 태웠다. 장충동 자택으로 향하려 했지만 설원식은 차를 북으로 돌리라고 했다. 임진각에 서서 먼 곳을 바라보더니 이번엔 온천을 찾았다. 목욕을 마치고서야 집에 가자는 얘기를 꺼냈다. 장충동을 목전에 두고 한남대교 한복판에서 설원식은 안씨에게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서늘한 느낌이 스쳐 안 씨는 차를 계속 몰았다. 설원식이 호통쳤지만 듣지 않았다. 장충동 자택 문 너머 설원식을 보내고 안 씨는 한참 울었다. 17년의 정이 깊었다.
이후 2015년 부고가 날 때까지 설원식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없다. 요양원에 입소했다는 소문에 안 씨가 찾아 나섰지만 찾을 수 없었다. 안씨가 기억하는 당대의 재벌 설원식의 초라한 퇴장이었다.
<어느 재벌 재산관리인의 고백> 3편 '여전히 잘 산다'에서는 3대에 와서도 계속된 설 씨 일가의 불법 행위를 고발하고, 일가의 은닉 재산을 추적 보도할 예정이다. 
<3부에서 계속>
제작진
촬영신영철, 김기철
편집조문찬
CG정동우
디자인이도현
출판허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