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이 켜지고, 광장에 재벌 개혁의 구호가 울렸다. 법 위에 군림하던 재벌 총수가 재판정에 섰다. 하지만 4년 전 시민들이 바라던 진짜 재벌 개혁은 요원하다. 재벌 체제는 공고하고 불법과 탈법을 넘나드는 재벌 일가의 사익 추구는 끊이지 않고 있다. 뒤탈 없이 불법을 잘 저지르는 것이 회사를 잘 경영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 사회 재벌 개혁의 이정표는 나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그 시절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지 모른다. 뉴스타파가 이미 20년이 지난 이야기를 꺼내는 한 재벌 재산관리인의 고백에 귀를 기울인 이유다.
노래 선생님
66세 안형열 씨. 자원봉사로 노인들에게 노래를 가르친다. 우직하고 차분한 성격이 가르치는 일에 제격이다. 현직 시절의 습관이 남아 있는 덕이다. 휴일에는 손주를 만나고 신앙 생활에 매진한다. 여느 퇴직자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지난 1년 6개월간 안 씨를 만나 왔다. 인터뷰를 권했지만 매번 거절했다. 자신과 자신의 이야기는 세상에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는 이유였다. 그러다 지난 2월, 이번엔 안 씨가 먼저 취재진을 찾았다. 그는 이제는 불면의 밤을 끝내고 싶다고 말했다. 취재진을 찾은 안 씨의 손엔 두 개의 가방을 들려 있었다. 누군가의 눈에 띄지 않도록 지난 20여 년 동안 다른 장소, 다른 사람에 보관되어 있던 가방이다.
2001년 어느 날로 밀봉된 가방 속 시간. 3권의 노트와 잡다한 서류, 수십 개 인감도장과 증권카드, 그리고 통장이 들었다. 한 사람이 쓰는 것이라기에 수가 많았다. 나쁜 마음을 먹으면 마치 50명이 넘는 사람이 있는 양 행세를 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 안형열 씨는 고 설원식 대한방직 회장의 비서였다.
안 씨는 1985년부터 2001년까지 17년 동안 고 설원식 대한방직 회장의 최측근 비서였다. 일반 비서가 아니었다. 그의 업무는 설원식과 그 일가의 차명 자산을 관리하는 것이었다. 가방 속의 물건은 현직 시절 그의 '연장'이었다.
그의 손을 거쳐 수백 개의 차명 계좌가 운영됐다. 많을 때는 그 수가 250개에 달했다고 한다. 여기에서 대한방직 설씨 일가를 위한 음지의 돈이 만들어졌다. 지난 20년간 그와 그의 이야기가 세상에 없는 것으로 되어 있던 이유다.
뉴스타파는 안 씨의 증언과 가방 속 자료를 검증했다. 3권의 노트에 기록된 차명계좌의 거래 내역, 은닉 자산의 단서를 확인했다. 언론 보도와 문헌, 판결문도 분석했다. 이 이야기는 그의 증언과 뉴스타파가 확인한 자료 내용을 통해 재구성됐다.
비서가 되다
대한방직. 지금은 다소 낯선 기업이다. 그러나 1990년대까지는 굴지의 재벌 그룹이었다.
1950년대, 대한방직의 창업자 설경동은 전국에서 네 손가락 안에 드는 부자였다. 6.25 전쟁 직후 수원과 대구에 있던 일제의 방직공장을 불하 받은 것이 부의 원천이다. 불하 과정에는 자유당 재정부장 출신이라는 배경이 작용했다. 이어 대한전선, 대동제당, 대동증권 등을 설립했다. 당대의 핵심 산업이었던 이른바 삼백산업, 제분, 제당, 방직 중 두 개 산업을 한 손에 거머줬다. 5.16 이후 부정축재자로 낙인찍혔지만 그의 부는 대를 이어 커져나갔다.
△ 대한방직 가문은 당대 최고의 정·재계 인사들과 혼맥을 쌓았다.
설경동은 당대 최고의 정·재계 인사들과 혼맥을 쌓았다. 장남 설원식은 임송본 식산은행 총재의 딸, 차남 설원철은 김용식 외무부장관의 딸, 3남 설원량은 양정모 국제그룹 회장의 딸, 4남 설원봉은 박용학 대농그룹 회장의 딸과 이어졌다. 식산은행은 현재의 산업은행이다.
대한그룹의 주력기업 대한방직은 장남 설원식에 상속됐다. 방직산업은 박정희 정부의 수출 정책에 힘입어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설원식은 종합금융회사와 생명보험회사 등을 거느린 금융 그룹으로의 변화를 모색해 나갔다. 의심의 여지가 없는 굴지의 재벌이었다. 적어도 안형열 씨가 입사한 1973년에는 그렇게 보였다.
은행에 취업한 친구들은 대한방직에 입사한 안 씨를 부러워 했다. 방직회사는 처우가 좋기로 유명했다. 명절, 김장철이면 두둑한 보너스가 나왔다. 당시엔 흔하지 않던 해외 업무를 경험할 기회이기도 했다. 장차 무역 전문가로 성장하겠다는 것이 신입사원 안 씨의 포부였다.
1985년 안 씨는 회장 비서실에 발령을 받았다. 회사 내에선 실세 중 실세로 불리는 자리였지만 두려운 마음이 더 컸다. 당대의 재벌 회장 곁에서 수족 역할을 해야하는 일이었다. 대개 2, 3년 비서실 생활 후엔 다시 일선 업무에 복귀하는 것이 관행이었다. 발령 당시엔 안 씨 자신도 그러리라 생각했다.
△ 1985년 비서실 발령 당시 안형열 씨의 모습.
안 씨가 설원식 회장의 눈에 들었던 데에는 일화가 있었다. 비서실 발령 이전, 안 씨는 설원식 회장의 고민을 알게 됐다. 설원식 회장 장충동 집이 매년 재산세 순위를 발표하는 신문 지면에 실려 골머리를 앓는다는 것이었다. 안 씨는 담당 공무원을 만나 방법을 물었다. 집의 필지를 분할하면 재산세 순위에서 빠지게 된다는 묘책이 나왔다. 안 씨는 이 내용을 상부에 보고했고, 이듬해 설원식 회장의 이름은 재산세 순위에서 사라졌다.
비서실 생활은 녹록지 않았다. 집안의 장남이었지만 제사조차도 갈 수 없는 지경이었다. 대신 설 씨 일가의 시시콜콜한 집안일이 모두 안 씨 몫이 됐다. 설 씨 집안에 청구되는 각종 요금을 처리하고 장충동 집 경비원들을 관리했다. 설원식 회장 손자의 이름을 짓기 위해 효자동 유명 작명가를 찾아 나선 일도 있었다. 훗날 악연을 맺게 되는 설원식 회장의 아들 설범에겐 보호자 노릇을 했다. 장난감 보트를 띄우자는 설범의 말에 함께 나갔다가 물에 빠진 보트를 꺼내기 위해 안 씨가 물에 뛰어들어야 했던 일도 있었다.
돈 찍는 기계
비서 업무 4년 차, 안 씨는 상사였던 종합조정실 유 모 상무로부터 특별한 업무를 인계받았다. 노트와 통장, 인감을 넘겨받고 작성 요령을 배웠다. 유 상무는 안 씨에게 이 업무가 사람들의 눈에 띄어선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작업은 회사가 아닌 집에서 해야 했다. 설씨 일가와 유 상무 이외에게는 업무 내용을 말해서도 안 됐다. 주식의 '주' 자도 알지 못했던 안 씨는 그렇게 설원식 회장의 차명 주식 관리인이 됐다.
인계받은 노트에는 설원식 회장 일가와 친인척, 대한방직 임직원들의 이름, 계좌번호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노트의 각 면에는 거래 일자와 내용, 사고 판 주식의 수와 거래 대금, 잔액 등이 기록되어 있다.
△ 안형열 씨가 관리한 대한방직 설씨 일가의 차명주식 거래장부.
많을 땐 관리하는 차명 계좌의 수가 250개에 이르렀다. 금융실명제 시행 등을 거치며 2001년 퇴직 때는 50명 정도로 줄었다. 인계 당시 설원식 회장이 가지고 있는 차명주식은 대한방직 전체 주식의 60% 수준, 가장 많았을 땐 전체의 70% 수준이었다. 공시된 지분은 20~30% 수준이었지만 실제는 회사 주식의 대부분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있었던 셈이다.
매매는 유 상무의 지시에 따라 이뤄졌다. 그가 이른바 '와꾸', 큰 틀의 계획을 정해주면 나머진 안 씨가 알아서 처리했다. 주식 매매를 하려면 장충동 설원식 회장 자택에 가서 배우자 임 모 씨를 만나야 했다. 설 회장의 지시라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임 씨가 종이로 된 실물주권을 안 씨에게 내주었다. 일을 처리하고 남은 돈과 주식은 다시 장충동으로 돌아갔다. 장부까지 정리하고 나면 설원식 회장에 보고를 하고 확인 서명을 받았다.
처음에는 그저 시키는 대로 움직였다. 하지만 나중엔 안 씨도 은밀한 차명 주식의 흐름을 알게 됐다. 250개에 이르는 차명계좌, 그리고 회사 전체 주식의 70%에 이르는 차명 주식은 한마디로 돈을 찍어내는 기계였다.
△ 안형열 씨가 처음 인계받은 차명계좌의 수는 250개에 이르렀다. 현재는 50개 가량의 인감, 통장만 남았다.
특별한 호재가 없었을 땐 차명 주식을 팔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시장에 주식 물량을 풀어야 누군가 '미끼'를 물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 시세를 유지할 필요가 있을 때는 반대로 주식을 사들여 시세를 끌어올렸다. 차명계좌로 회사 주식 70%를 쥐고 있다 보니 감독 기관의 눈에 띌 정도로 거래량이 적었다. 때론 차명계좌끼리 주식을 사고팔며 거래를 꾸며내는 일도 해야 했다.
주식 시장에서 금지되어 있는 내부정보 활용은 거리낄 게 없었다. 차명 계좌를 이용해 주식을 사들이면 감시망을 쉽게 피해 갈 수 있었다. 호재를 앞두고 있을 땐 내부정보를 활용해 차명계좌으로 주식을 잔뜩 사 모았다. 그러다 다른 개미들이 붙어서 시세가 올라가면 처분해 차익을 봤다. 설씨 일가에겐 언제든 개미를 유인해 돈을 빨아들일 수 있는 필승 투자법이 있던 셈이다.
이 업무에 투입되는 돈은 회사에서 나왔다. 설원식 회장의 확인을 받아 자금부에 가면 돈이 지급됐다. 어느 정도의 회사 내 비자금이 공공연하던 시절이었다. 관행적으로 연 매출의 5% 수준의 비자금이면 감독기관도 손을 대지 않았다. 어차피 그 일부는 정치헌금이나 촌지 몫이었다. 1996년 공시에 나온 대한방직의 연 매출액은 1900억 원 수준, 5%의 비자금이 있었다고 치면 약 100억 원 정도의 회사 자금이 설원식 회장 개인 돈으로 쓰였다는 얘기다.
△ 차명주식 거래를 통해 나오는 수익과 배당금 등은 모두 설원식 회장의 배우자 임 모 씨에게 전달됐다.
각 차명계좌로 들어오는 수익과 배당금은 모두 설 씨 일가의 몫이었다. 해마다 나오는 배당금을 정리해 장충동에 전달했다. 회사의 수장은 설원식이었지만 장충동의 수장은 배우자 임 씨였다. 임 씨는 회사로부터 넘어오는 모든 검은 돈을 관리했다. 안 씨의 가방에 있는 자료 곳곳에는 각 차명계좌의 배당금을 정리하거나 계좌의 예치금을 현금화한 뒤 임 씨에게 전달된 기록이 남아있다. 여기에 임 씨의 서명이 있는 것은 물론이다. 예를 들어 대한방직 회사 문서에 수기로 기록된 2000년 10월 12일자 서류를 보면 3개의 차명 계좌에 들어있던 2억 5천만 원을 통장째 넘긴 것으로 되어있고, 통장을 인수했다는 임 씨의 서명도 남아있다.
안 씨는 자신의 업무가 정상이 아니라고 느꼈다. 결국 회사 돈을 빼돌려 설 씨 일가를 배불리는 일이었다. 입사 때부터 원했던 해외 업무로 복귀하고 싶었지만 허락되지 않았다. 2001년 퇴직 때까지 그는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 그렇게 17년간 그는 설원식 회장의 그림자로 살았다.
캐딜락, 목장, 화가 이인성
설원식 회장의 특별한 비서가 된 이후, 안 씨에겐 새로운 삶이 펼쳐졌다. 설 씨 일가의 식솔이 되어 재벌의 화려한 삶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대외적으로는 검소한 것으로 알려진 설원식 회장이지만, 그 또한 재벌이었다. 평소 사냥과 골프를 즐기고 미술가, 건축가들과 어울렸다. 차에 대한 사랑이 각별했다. 캐딜락 플릿우드, 메르세데스 벤츠 S클래스 등 세계의 명차를 사 모았다. 군부 독재의 엄혹한 분위기 속에서 재벌이 이런 차를 들여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방법이 있었다. 설원식 회장이 갖고 있던 주한 파나마 명예영사 지위를 이용했다. 영사관 의전차량이라는 명목으로 들여오고 차는 장충동 차고에 보관됐다. 삼성 이병철 회장이 메르세데스 벤츠 구형 모델을 타는 동안, 설 회장이 신형 모델을 탈 수 있었던 비결이다.
△ 설원식 회장이 살던 장충동 자택 전경.
건축에 대한 남다른 사랑은 장충동 자택에 나타났다. 평소 교류하던 일본인 건축가, 조경예술가가 동원돼 6년 동안 집을 지었다. 장인이 직접 손으로 빚어 만든 건물 외벽이 특징이다. 높은 담장에 가려진 집의 내부는 더 화려했다. 2000제곱 미터에 이르는 넓은 대지 안에는 정원과 수영장, 농구장, 사우나 시설 등이 놓였다. 모두가 해외에서 들여온 최고급 자재로 만들어졌다.
설 씨 일가는 비자금으로 조성된 막강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전국의 부동산을 사 모았다. 경관이 좋은 곳, 입지가 좋은 곳엔 어김 없이 설 씨 일가의 땅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재 서울 잠실 롯데월드타워 인근 신천동 땅이 대표적이다. 이 땅은 설원식 회장이 과거에 살던 집이 개발로 수용되면서 받은 대토였다. 현재 마사회가 운영하고 있는 제주도 최대 규모의 목장도 과거에는 설원식 회장 개인소유였다. 설 회장은 제주도에 출장 온 안 씨에게 승마를 권했다. 지금은 지역 최고의 입지가 된 대한방직의 대구공장, 수원공장, 전주공장 부지 인근에도 설원식 개인 땅이 있다. 그 자리에는 대형 쇼핑몰이 들어서 있다.
차명 주식 뿐만 아니라 차명 부동산도 있었다. 안 씨는 매년 설원식 회장의 재산세를 납부하기 위해 A4용지 한 장 분량의 토지 명단을 받았다. 검토하다 보면 명의가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땅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천혜의 경관으로 유명한 여주 강천면 일대, 가평 설악면 일대의 땅이 안 씨의 기억에 남아있다. 안 씨가 지금까지 갖고 있는 자료 중에는 2000년 설원식 회장이 납부한 종합토지세 영수증이 있다. 납입 금액은 1억 3천억 원. 당시 종합토지세 세율 0.3%를 반영해 단순 계산하면 당시 설원식 회장이 갖고 있던 땅의 가치는 당시 돈 400억 원 이상으로 추정된다.
△ 설원식 회장은 재벌가의 사교모임으로 불리는 현대미술관회의 발기인이자 최장기 회장이었다.
90년대까지만 해도 설원식 회장의 미술품 컬렉션은 삼성가에 비견됐다. 그는 홍라희 전 삼성미술관 리움 관장을 비롯한 재벌가 회장, 배우자들이 회원으로 되어있는 현대미술관회의 발기인이다. 3대에서 12대까지 최장기 회장직을 맡기도 했다. 안 씨는 현대미술관에서 주요 전시회가 있을 때마다 회장을 수행했다. 집에 돌아가는 길엔 어김없이 새로 구매한 작품 한 두 점이 손에 들려있었다. 이우환, 김환기, 김창렬, 이인성 등 현재는 작품당 가격이 수억 원을 넘는 유명 화가들의 작품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그의 컬렉션에는 이인성 화백의 작품이 유독 많았다. 주요 대표작을 포함해 40여 점을 혼자 독식하고 있어서 화랑업계에는 설원식 없이 전시회를 열 수 없다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까다로운 미술품 관리 업무도 안 씨에게 맡겨졌다. 서울 모처의 아파트를 아예 창고로 꾸몄다. 회사 돈으로 산 미술품이지만 소장은 개인이 한 것이다. 90년대 말 당시 보험사가 잡은 미술품들의 보험가액은 80억 원 수준이었다. 현재는 그보다 감정가가 훨씬 높아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설원식 회장 일가의 화려한 삶을 떠받치고 있던 것은 안 씨가 마련해온 검은 돈이었다. 설씨 일가는 점점 부유해졌지만 정작 회사는 점점 부실해지고 있었다. 1990년대 재계의 호황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1997년 IMF 경제 위기라는 전례 없는 사태가 닥치면서 그들의 파티는 갑자기 끝이 났다. <어느 재벌 재산관리인의 고백> 2편 '도망친 선장'에서는 IMF 경제 위기 당시 대한방직 설 씨 일가가 어떻게 손실을 회사에 떠넘기고 일가의 재산을 지키는 데 성공했는지 보도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