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들][해방70년 특별기획] '꽃바위 하나오카의 눈물'
2015년 08월 17일 07시 05분
지난해 12월 1일 일본 정부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메이지시대 근대산업시설에 대한 ‘보전상황보고서’를 제출했다. 2015년 7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던 근대산업시설들을 어떻게 보전하고 있고, 유네스코의 권고사항을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 지 등을 보고한 내용이다. 이 보고서는 일제시대 한국인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등 일본의 역사왜곡이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보고서를 보면 아베 정부는 일제시대 한국인 등 강제동원 사실을 제대로 기술하라는 유네스코의 권고를 이행할 생각이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등재 당시 사토 구니 일본 유네스코 대사는 성명을 내고 “일본은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많은 한국인들과 외국인들이 그들의 의사에 반해 끌려와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로 일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할 준비가 돼 있다”고 약속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보고서에 실린 내용은 “제2차 세계대전 전과 전쟁 기간, 그 후에 일본 산업을 ‘지원한’ 한국인이 많았다”고 돼 있다. 강제로 끌려가 일을 해야했던 한국인들을 마치 자발적으로 지원해서 일한 것처럼 기술한 것이다.
지난해 12월 ‘산업유산국민회의’라는 단체가 만든 ‘군함도의 진실’이라는 인터넷 사이트와 동영상을 봐도 일본 정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있다. 이 단체는 과거 군함도에 살았다는 주민들을 인터뷰해 “조선인에게 위험한 일은 안 시켰을 것이다”, “군함도와 관련해 잘못된 정보가 세계로 퍼지고 있다”, “있지도 않은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데 더 이상 좌시하지 않겠다”는 등의 내용을 한글과 영어 동영상으로 만들어 홈페이지에 올렸다. 하지만 해당 주민들의 신상은 물론 언제 군함도에 살았던 사람인지도 알 수 없고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 당사자들의 목소리도 빠져 있다.
일본이 제출한 보전상황보고서에 따르면 이 단체는 한국인을 포함한 강제동원 노동자들과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는 책임기관으로 지정돼 있다. 산업유산국민회의는 2013년 9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는데 이사진이 대부분 아베의 측근인 재계, 관료계 인사들로 채워져 있다. 가토 교코 내각관방 참여(총리 자문역)를 포함해 현재 한국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손해배상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일본 기업 미쓰비시중공업, 신일철주금 관계자 등이 이사와 고문으로 참여하고 있다. 일제시대 강제노동을 부정하고 있는 당사자들이 한국인 강제동원 노동자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는 주체로 지정됐다는 점은, 일본 정부가 유네스코의 권고를 이행할 생각이 전혀 없음을 내비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베 총리는 올해 들어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유독 강조하고 있다. 양기호 성공회대 일어일본학과 교수는 “아베 총리는 전후 체제로부터의 탈피라는 측면에서 과거 영광스러웠던 일본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데 굉장히 관심이 많다”며 “그 전형적인 것이 메이지 일본”이라고 말했다.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선도자였던 요시다쇼인은 군비확장과 대외침략을 주장했다. 그 사상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다. 평소 요시다쇼인을 존경한다고 밝혀온 아베 총리는 지난 2015년 요시다쇼인이 관여했던 서당인 쇼카손주쿠까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다.
아베 총리를 중심으로한 일본 보수세력이 역사를 왜곡하는 동안 한국 정부는 어떤 대응을 했을까?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 외교부와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강제동원의 역사를 함께 알려야 한다”는 유네스코의 권고를 이끌어낸 것은 나름의 성과였다. 외교부는 “일본이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 중에 있다”며 “지난해 12월 19일 한일 외교장관 회담시 양측은 실무협의를 해나가기로 했다”고 밝혔다. 문화재청은 “일본 정부가 제출한 보고서에 유네스코의 지침이 담겨 있는지, 담을 계획이 있는지 등을 분석하고 있다”며 “올해 6월에 있을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정식안건으로 채택해서 논의할 수 있도록 외교부와 협조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강제동원 문제에 대한 관심과 장기적 비전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근대산업시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시켰던 그해 12월, 한국에서는 박근혜 정부와 국회의 무관심 속에 ‘일제강점하강제동원피해 진상규명위원회’가 문을 닫았다. 진상규명위원회는 2004년 설립돼 해방 후 처음으로 정부 차원에서 강제동원 관련 진상규명을 추진했다는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부족한 인력과 예산으로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다 결국 2015년에는 정부와 국회의 무관심 속에 활동 기한을 연장하지 못했다.
강제동원 문제에 관한 한국 정부 내 컨트롤 타워가 없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각 부처별로 현안대응 정도는 하고 있지만 종합적이고 장기적인 계획이 없다는 것이다.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대법원에서 강제동원 손해배상 소송 확정판결이 나는 순간 강제노동 문제가 한일 간의 뜨거운 현안으로 제기될 것”이라며 “강제동원 문제는 여러 부처가 연결돼 있는데 아직까지는 종합적인 컨트롤 타워가 없다”고 말했다. 지난 2000년에 처음 제기된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일본 기업 상대 손해배상 청구소송은 1심, 2심 판결에서 패소했다가 2012년 5월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돼 2013년 7월 파기환송심에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이 났다. 최종 판결은 현재 5년째 대법원에 계류돼 있고, 일본 정부는 대법원 판결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오히려 일본에서는 시민단체들이 한국의 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라는 조직까지 만들었고 각 지역마다 강제동원의 실태를 조사하고 실상을 알리는 시민단체들이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상태다.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는 최근에도 민족문제연구소와 연대해 세계문화유산 가이드북을 펴내는 등 강제동원 진상을 드러내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8·15 경축사에서 “남북관계가 풀리면 남북이 공동으로 강제동원 피해 실태조사를 하는 것도 검토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문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들에 비하면 강제동원 문제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문 대통령이 소속돼 있던 법무법인도 현재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을 담당하고 있다. 4월 말로 남북정상회담이 예정된 상황에서 일제시대 강제동원에 대한 남북 공동조사가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응하는 새로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나오고 있다.
취재 : 조현미, 연다혜
촬영 : 김기철
편집 : 윤석민
CG : 정동우
영상 · 자료 제공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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