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 외면한 ‘폭력’ 몰이
2013년 07월 25일 10시 05분
4월 18일 밤, 한 장의 사진이 인터넷에 떴다. 같은 날 광화문에서 열린 세월호 추모 집회에서 한 남성이 작은 태극기를 불태우는 사진이었다. 처음 이 사진은 집회 현장을 다룬 흔한 보도 사진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후 몇몇 언론이 이 사진을 특별한 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태극기를 불태운 반국가적이고 반사회적인 세월호 시위대”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됐다.
태극기가 불타는 자극적인 장면을 먼저 적극적으로 보도한 것은 종편이었다. 집회 다음날인 19일, 채널A는 오후 뉴스와 저녁 뉴스를 통해 이 사진을 부각하는 뉴스를 거듭해서 내보냈다.
어제 서울 도심 교통을 마비시켰던 세월호 1주기 시위에서 일부 시위대가 태극기를 불태웠습니다. 경찰은 이런 짓을 한 사람들과 극렬한 폭력 행위자는 끝까지 추적해 모두 형사 처벌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 채널A 종합뉴스 앵커 멘트
다음날인 20일 아침. 이번에는 조선일보가 바통을 이어받았다. 조선일보는 1면에 태극기를 불태우는 남성의 사진을 배치하고, ‘태극기 불태운 시위대’라는 제목을 뽑았다. 이 남성 개인의 행위에 세월호 집회에 참여한 다수 시민들이 동참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신문은 사설에서 세월호 집회가 유족들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정치적 색깔을 띠는 방향으로 변질되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경찰에 연행된 100명 가운데 세월호 유가족은 20명뿐"이라고 덧붙였다. 더 많은 유족들이 연행돼야 정치적이지 않은 집회가 되는 것인지 의문이다.
동아, 조선이 앞서가자 지상파가 뒤따랐다. KBS와 MBC는 조선일보가 1면 기사를 실은 20일 저녁 뉴스에서 이 사건을 주요하게 다뤘다.
새누리당도 나섰다. 4.29 재보궐선거 현장대책회의를 위해 서울 관악구를 찾은 새누리당 지도부는 수 차례에 걸쳐 태극기 훼손 사건을 언급했다.
유승민 원내대표는 “정부와 새누리당이 세월호의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노력을 하고 있는데도 세월호 집회가 반정부 폭력시위로 변질됐다”며 혐의자에 대한 엄정한 처벌을 촉구했다. 김을동 최고위원은 “국가적 비극 앞에서 국가정체성을 부정하며 끊임없이 정쟁을 야기하는 반국가세력들을 철저하게 엄단”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군현 사무총장도 “자기 나라의 태극기를 불태우는 것은 살아있는 부모를 불태우는 것과 같다”며 관련 당국에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여당의 요구에 정부도 적극적인 수사방침을 밝혔다. 지난 20일 있었던 국회 법사위 회의에서 김진태 의원은 “태극기를 불태운 것은 대한민국 국민을 불태운 것과 똑같은 것”이라며 황교안 법무부 장관에게 엄정한 대처를 요구했다. 황 장관은 이에 화답해 “태극기 방화 용의자가 처벌에 대한 여러 가지 면피책을 쓸 것까지 고려해 철저하게 수사하겠다”고 밝혔다. 이렇게 태극기 방화범 수사가 시작됐다.
처음 경찰은 <뉴스1>이 최초 보도한 사진 한 장을 핵심 증거로 삼았다. 이를 바탕으로 근처의 CCTV를 살펴보고 용모가 비슷한 사람을 찾고, 내부 정보를 이용하거나 제보를 받아 수사를 진행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성균관대 4학년 조형훈(24) 씨는 지난 23일 오후 아르바이트 중 꺼 놓았던 스마트폰을 켠 뒤 깜짝 놀랐다.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여러 통의 부재중 연락이 와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고 자초지종을 들은 조 씨는 당황했다. 자신이 태극기를 방화한 혐의를 받고 있다며 경찰이 아파트를 찾아왔고 아버지도 만났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조 씨를 수사한 관할 경찰은 경기지방경찰청 지능범죄수사대였다. 수사 관계자는 집회 당일 조 씨가 쓴 모자와 안경이 방화 용의자와 80% 정도 일치해 조 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처음 경찰과 연락이 닿았을 때 조 씨는 당일 만나지 말고 일주일 후에 만나자고 약속을 정했다. 조 씨는 경찰에서 수사를 받는 경험이 처음이어서 법적인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을 알아보려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조 씨와 일주일 후 만나기로 약속을 정한 뒤 경찰은 바로 조 씨의 어머니에게 연락을 했다. 담당 수사관은 어머니에게 확인할 것이 있다면서 직장으로 찾아가도 되겠는지 물었다.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조 씨의 어머니는 경찰의 연락에 부담을 느꼈다. 회사로 오지 말고 경찰이 직장 근처로 오면 나가겠다고 말한 뒤 아들에게 연락을 했다. 어머니의 전화를 받고 이 사실을 알게 된 조 씨는 황당했다. 이미 만날 약속을 잡은 상황에서 경찰이 왜 어머니를 찾아가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찰의 갑작스러운 연락과 방문에 부모님이 모두 당황하자 조 씨는 결국 변호사 없이 바로 수사를 받는 것에 동의했다. 그날 저녁 인근 지구대에서 조 씨 가족과 경찰이 만났고, 결국 수사관 한 명이 집까지 찾아와 조 씨의 옷장 등을 조사했다. 경찰은 이 과정에서 수색영장 없이 임의 조사 방식으로 수사를 진행했다.
경찰은 이에 대해 “임의 수사의 한 방법으로 보호자를 만나서 용의자인 아들에 대해 탐문하는 일종의 수사 과정”이라고 말했다. 또한 “진범도 아닌데 변호사를 대동하고 출석을 한다니까 (조 씨의 결백 주장에 대한) 의구심이 들었고, 사진 속의 인물이 정말 조형훈 학생이 아닌지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 어머님한테 연락한 것”이라고 밝혔다.
박주민 변호사는 “법적으로 직권남용은 공무원이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일반인이 굳이 해야 할 의무가 없는 일을 하게 만들 경우 성립한다”며 조 씨를 수사한 경찰을 직권남용으로 볼 소지가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렇게 무리한 수사를 진행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조 씨는 수사가 늦어진다는 이유로 윗 선에게 “혼났다”는 말을 담당 수사관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전했다. 이 사건을 처음 맡아 수사를 진행한 종로경찰서의 수사 관계자도 “상급 경찰청에서 관심이 많아 수사를 열심히 하고 있다”고 뉴스타파 취재진에게 말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김근만 수사 2계장은 “(용모가) 유사한 사람들을 (내부 자료를 통해) 받았으며, 일반 시민이 신고한 것들도 있어서 여러 건을 확인 중”이며 “(조 씨는) 그 중에 하나”라고 말했다. 경찰이 “관심”을 가지고 “열심히” 수사를 하는 동안, 앞으로 조 씨와 같은 엉뚱한 시민들이 용의자로 몰려 경찰 조사를 받을 우려가 높아지고 있는 셈이다.
태극기 훼손은 어떤 이유에서도 정당화되기 힘들다. 하지만 특정 세력이 이를 과도하게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고, 수사기관도 무리한 수사로 인권을 침해하는 것 또한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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