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 전 새롭게 시행된 불법 리베이트 억제 정책에 따라 제약·의료기기 업계가 영업대상인 의료인들에게 각종 물질적 로비를 제공한 내역, 즉 ‘경제적 이익 등 제공 내역에 관한 지출보고서’(이하 지출보고서)를 의무적으로 작성하게 됐다. 법 시행 이래 한번도 대외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던 지출보고서 일부를, 뉴스타파가 최초로 입수해 분석했다.
뉴스타파가 자료를 검토한 결과, 업계를 대표하는 제약사, 의료기기업체마저 제품설명회 등 합법적 접촉 수단을 악용해 의료인들을 상대로 고가의 식사 접대 등 비상식적인 영업 활동을 한 기록이 드러났다.
의료계 ‘로비 지출보고서’ 최초 입수·공개...법 시행 3년만
지난 2018년 1월, 의료계와 제약·의료기기업계를 들끓게 한 새로운 법이 시행됐다. 환자의 선택권과 국가의료보험재정을 좀먹는 불법 리베이트와 유착을 억제하기 위한 또 하나의 처방이었다. 현재 ‘K-선샤인액트’로 알려진 정책이다.
▲보건복지부는 2017년 6월 보도자료를 내고 'K-선샤인액트' 시행을 예고했다. (출처: 보건복지부 홈페이지)
제약사와 의료기기업체들은 현행법 테두리 안에서 의사 등 의료인들에게 여러 가지 ‘경제적 이익’을 제공할 수 있다. 청탁금지법의 시대에도 의료인들만큼은 합법적으로 로비를 받을 길이 열려 있는 것이다. 예컨대 의사들이 학술대회에 참가하러 해외에 나가려 한다면, 업체들은 수백만원에 이르는 항공편, 호텔비, 식비, 참가비를 몽땅 지원해줄 수 있다. 이런 합법적 수단마저 악용해 특정 의사들을 밀어주는 불법 로비 행위가 지난해 1월 뉴스타파 보도로 폭로되기도 했다.
그런데 K-선샤인액트가 태어났다. 갑자기 의료계와 업계 사이 오간 금전적 로비 내역을 해마다 일일이 기록하고, 증빙자료와 함께 회사에 보관하게 한 것이다. 업체의 지원을 받은 의료인들의 실명도 기록해야 했다. 또 감독당국인 보건복지부가 요구하면, 언제든 지출보고서를 제출하도록 정했다. 정책명 그대로 해석하면, 마치 햇살(선샤인)처럼 의료계 안의 음성적인 영업활동을 환히 비추겠다는 취지였다. 보건복지부는 법 시행을 앞둔 2017년 6월 보도자료에서 “의약품 및 의료기기 거래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시장의 자정능력을 제고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자평했다. 물론 지금도 해마다 불법 리베이트 사건이 적발되고 있다.
청탁금지법이 공직자 사회를 흔들어놨던 것처럼 K-선샤인액트는 법 시행 초기 의사들과 제약·의료업계 영업사원들의 속을 끓게 했다. 사실상 ‘로비 보고서’를 남기라는 것과 같다고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이 왜 그랬는지, 뉴스타파가 입수한 지출보고서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뉴스타파는 제약사 1곳, 의료기기업체 1곳의 2018년 일년치 지출보고서를 입수했다. 국회 보건보건복지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고영인 의원실의 도움을 받아 자료를 확보했다. 원래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10월 말 업체 4곳에 공문을 보내 받은 자료로, 그 가운데 절반이 올해 국정감사 시기 고영인 의원에게 제출됐다.
지출보고서의 주인공은 업계 선두에 있는 두 업체다. 70년 역사의 한국 대표 제약사 종근당, 그리고 심혈관 스텐트 시장 ‘빅3’ 위상을 자랑하는 글로벌 의료기기업체 한국애보트가 작성한 지출보고서가 뉴스타파 취재진 손에 들어왔다.
▲MS엑셀 파일로 작성된 지출보고서 안에는 업체가 의료인들에게 베푼 경제적 이익 내역이 견본품 제공, 학술대회 지원, 임상시험 지원, 제품설명회, 시판후 조사, 비용할인 등의 항목으로 나뉘어 정리돼 있다. (자료: 2018년 종근당 지출보고서 / 출처: 보건복지부, 고영인 의원실)
호텔, 일식, 한우...종근당 제품설명회, 식사 접대로 변질
뉴스타파는 입수한 지출보고서의 여러 항목 가운데 ‘제품설명회’ 기록에 주목했다.
종근당의 지출보고서를 보면, 영업사원들이 의사, 약사와 접촉면을 직접 접촉하는 수단으로 제품설명회를 적극 활용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영업사원들과 의료인들이 만나는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특히 제품설명회는 관련법과 업계 규약상 허용되는 경제적 이익 제공 방식이다. 한국제약바이오협회·글로벌의약산업협회·의료기기산업협회 공정경쟁규약상 “제품에 대한 과학적·교육적인 정보를 전달하고 환자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는 수단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종근당은 2018년 1월과 2월 두 달간 개최한 제품설명회 내역을 지출보고서에 기록했다. 같은해 3~12월, 즉 나머지 열달간 제품설명회 개최 내역은 기입하지 않았다. 기록대로라면 이 기간에는 제품설명회를 단 한 번도 열지 않았다는 뜻이다. 작성된 기록을 근거로 1~2월 두 달 사이 열린 제품설명회 횟수만 집계했다. 모두 81회(복수요양기관 8회, 개별요양기관 73회)에 이른다. 설명회 참석자 규모는 최소 1명부터 최대 24명까지 다양하게 나타났다.
종근당은 2018년 1~2월 총 81번의 제품설명회를 열고 모두 식사, 음료비를 지출했다. 이 가운데 의료인 1인당 한끼 5만원 이상 식사비를 지출한 것으로 기록한 제품설명회만 모두 37회다. 의료인들이 한 번에 9만~10만원에 이르는 식사를 접대받은 경우도 18회로 집계된다.
식사 접대비가 커지는 이유는 뭘까. 당연히 고급 식당을 골라 제품설명회를 열기 때문이다. 종근당이 제품설명회 참가 의료인 1인당 식사비로 5만원 이상 지출한 식당 업종을 열거하면 ▲호텔 레스토랑 ▲이탈리안 레스토랑 ▲대게집 ▲일식·스시집 ▲한우구이집 ▲민물장어집 등으로 압축된다.
종근당, 저녁시간에 고액 접대 자리 집중
종근당이 단일병원, 약국 등을 대상으로 개최한 ‘개별요양기관 제품설명회’ 내역, 총 73회를 분산형 차트로 분석한 결과, 이 회사는 주로 아침, 점심, 저녁식사 시간에 제품설명회를 여는 것으로 나타났다.
▲의약품 제품설명회가 저녁시간대에 열릴 경우 의료인에게 제공하는 식사비 지출이 커지는 경향이 뚜렷하다. (자료: 2018년 종근당 지출보고서 / 출처: 보건복지부, 고영인 의원실)
특히 설명회 개최 시간이 늦어질 수록 식사 접대비가 대폭 늘어나는 경향도 두드러졌다. 종근당이 2018년 1, 2월 11회에 걸쳐 오전 시간(08~12시)에 개최했다. 의사들에게 커피, 빵, 샌드위치 등을 제공했으며, 1인당 지출비용은 모두 1만~2만원대에 그쳤다. 반면, 저녁 시간(18~22시)에 설명회를 연 경우에는 고가의 식사 접대가 집중돼 있었다. 저녁 시간대 제품설명회 총 31회 가운데 단 한 번을 제외하고 모두 1인당 5만원 이상 식사를 제공한 것으로 집계된다.
원칙적으로 식사 접대가 목적인 제품설명회는 금지돼 있다. 공정경쟁규약이 “보건의료인 모임 등에서 필요한 식음료를 지원하기 위한 제품설명회를 개최해서는 안 된다”고 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규약은 “제품설명회 개최 시 행사장소, 행사내용 및 개최방법 등이 불공정행위로 오해받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라고도 경고하고 있다.
그러나 원칙은 원칙에 불과하다. 합법적으로 허용된 제품설명회의 식사 접대비 한도가 방만하기 때문이다. 공정경쟁규약상 업체는 제품설명회 개최 시 의료인 한명당 하루 15만원 한도 내에서 식사와 음료를 제공할 수 있다. 또 한끼당 10만원까지 식사비로 쓸 수 있게 돼 있다. 제품설명회 자체가 의료인들에게 고가의 식사 로비를 할 기회를 제공하는 구조다.
일본만 해도 한국보다 접대 기준이 엄격하다. 일본 제약업계의 공정경쟁규약에 따르면 제약사가 ‘의약품 설명회’(제품설명회)를 열 경우, 의료인에게 3000엔(약 3만원) 이내의 식음료를 제공할 수 있다. 우리나라 한도의 5분의 1 수준이다. 제공할 수 있는 먹거리는 도시락과 음료로 제한하고 있다.
애보트, 고깃집서 식사 접대...전용장비 없이 시약 설명?
지금까지 반복적으로 언급한 합법적 로비 규정과 원칙을 기억하면서, 글로벌 의료기기 수입판매사 한국애보트의 지출보고서로 넘어가 보자.
애보트는 2018년 한해 동안 국내에서는 단 한 차례 제품설명회를 열었다고 보고서에 썼다. 2018년 3월 28일 저녁 6시에 시작된 제품설명회는 밤 9시에 끝났다. 장소는 부산시 동래구에 있는 한 한우 식당이었다.
의료기기업계 공정경쟁규약에 따르면 의료인을 대상으로 한 제품설명회 등 경제적 이익 제공 활동은 “활동의 목적에 부합하는 적절한 장소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기준으로 보면 애보트의 제품설명회 개최장소가 적절하지 않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해당 설명회에서 다뤘다는 제품의 특성부터 살펴보자.
애보트의 제품설명회에 등장한 제품은 지출보고서상 기기명 ‘Architect’, 모델명 ‘Procalcitonin’이라고만 적혀 있다. 프로칼시토닌이라는 혈중 단백질 물질을 측정해 감염증 검사를 할 수 있게 한 검사시약(허가번호 체외수인 17-4206)을 뜻한다. 애보트사가 2009년 국내 출시한 자사 혈액진단검사장비 ‘아키텍트’ 전용이다. 부산 제품설명회 개최 일년 전인 2017년 4월 국내 수입허가를 받은, 당시로서는 새로운 시약이라고 볼 수 있다.
▲애보트의 검사시약키트(좌)와 전용진단검사장비 '아키텍트'(우)
아키텍트 시리즈 장비는 진단검사의학과 검사실에서 사용한다. 한 대당 높이 1.2m, 폭 1.5m, 무게 490kg에 이르는 육중한 장비다. 애보트가 고깃집에서 설명했다는 프로칼시토닌 검사 시약은 이러한 전용검사장비 아키텍트가 없으면 무용지물이다. 시약은 냉장보관하도록 돼 있다. 또 애보트의 시약 설명서에 따르면 기존 장비에 신종 시약을 넣어 새로운 검사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해야 한다. 즉, 새 시약에 맞는 검사 프로그램을 다시 설치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은 흔히 쓰지 않는 씨디롬(CD-ROM)을 사용해야 한다.
그렇다면 신제품 시약 설명회에 가장 적합한 개최장소는 어디일까. 애보트 영업사원은 답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직접 시연까지 할 수 있도록 전용장비를 갖춘 병원 검사실이 정답이다. 설명자료와 기념품을 돌리고, 식사 대접만 할 목적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 제품설명회 참석 대상은 혈액 및 면역검사실에서 실제 시약을 사용·관리하는 진단검사의학과 의료진이어야 타당하다. 애보트의 지출보고서를 보면 의료인 14명이 해당 제품설명회에 참석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들의 소속과 실명은 확인되지 않았다. 뉴스타파가 입수한 지출보고서에서 보건복지부가 의료인 정보는 삭제한 탓이다. 다만 14명 모두 ‘A병원’ 소속으로 기록돼 있기 때문에 병원 1곳 소속이라는 점은 확인된다.
애보트는 부산 소재 단일 병원에서 진단검사의학과 의료인 14명을 모을 수 있었을까.
제품설명회가 열린 한우집 반경 약 5km 안에는 부산시의료원 등 주요 종합병원 3곳이 있다. 통틀어도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는 각각 1명씩, 3명뿐이다. 15km 가량 떨어진 부산 최대 의료기관 부산대병원 사정은 어떨까. 진단검사의학과 전문의는 5명뿐이다.
지출보고서 원본 파일, 언론·시민사회에 공유
뉴스타파는 종근당과 한국애보트, 단 두 곳에 불과하지만 입수한 2018년치 지출보고서 파일을 아래와 같이 공유한다.
이번 보도에서 모두 다루지 않았지만, 공개된 지출보고서에는 여전히 분석과 취재보도로 확장될 수 있는 정보가 많이 남아 있다. 원본 파일에는 나오지 않는 의약품·의료기기의 허가일자, 특징 등에도 주목해야 한다. 1원 단위까지 쪼개진 영수증 금액이나 제품설명회 개최 장소 등이 단초가 될 수도 있다. ‘의료계-제약-의료기기업계’의 부적절한 유착, 그리고 이를 억제하려고 탄생한 K-선샤인액트에 대한 언론, 시민사회의 감시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이어지는 2편에서는 제약사, 의료기기업체가 문제의 지출보고서를 얼마나 엉터리로 작성해왔는지 확인하고, 보건복지부의 안이한 감독 실태를 다룬다. 나아가 법 태동 과정부터 삐걱거렸던 K-선샤인액트가 입법 취지에 맞게 탈바꿈할 대안을 조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