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정의

1984 처벌받지 않은 자들

2018년 01월 26일 21시 36분

“보안사요? 언제 적 얘기를 하시는 건가요?”

1980년대 보안사에서 벌어진 간첩조작 사건 피해자들이 최근 재심에서 잇달아 무죄를 선고받고 있는데 대한 입장을 묻자 국방부 대변인실 직원에게서 나온 첫 반응입니다. 기무사라는 이름으로 바뀌면서 많이 잊혀졌지만, 보안사는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한번 끌려 들어가면 성한 채로 나올 수 없다던 악명 높은 군 수사 정보기관이었습니다.

▲기무사 보안분실 터

국방부 대변인실 직원의 말처럼 그동안 강산이 세 번이나 바뀌었지만, 당시 간첩으로 조작당한 피해자들은 다른 기억은 몰라도 고문 받을 당시의 고통만은 생생하게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번 취재를 위해 만난 대다수의 피해자들은 그 당시 자신이 어떤 혐의로 체포되었는지, 수사관들과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있지도 않은 혐의 내용을 들이대며 자백을 강요했던 것이니, 30년이나 지난 지금 그 세부 내용이 떠오를 리가 없었던 겁니다. 하지만, 보안사에서 받은 고문만큼은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당시의 이야기를 들려줬습니다. 대부분이 수십 일 동안을 지옥과도 같은 곳에 갇혀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으니 말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졌던 것일까. 1984년 1월 청와대 영빈관에서 당시 대통령이던 전두환이 했던 발언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 내려오라 이거야, 내려와야 우리 군인들 전과 올리고 훈장 타고 진급 되고 이런 기회가 생기지 않느냐, 이거예요. 공로를 세우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도록 여러분들이 잘 당부해서 금년 한 해 아주 멋있게 북한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는 그런 한 해가 되도록 우리가 다 같이 노력해 주기를 바랍니다.

1984년 1월 21일 청와대 영빈관 대간첩대책중앙회의

김영진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은 이 육성 녹취를 듣고 소름이 돋았다고 합니다. 수많은 간첩조작 피해자들을 제물 삼아 공포를 조장하며 정권을 이어간 전두환 씨의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난 발언이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최고 권력자의 이 같은 인식 하에 당시의 수많은 대공수사관들이 무고한 국민들을 상대로 고문과 조작을 저지르고 훈장과 포상금까지 챙겨갔던 겁니다.

2000년대 후반부터 과거 억울하게 잡혀들어간 간첩조작 피해자들이 재심을 통해 속속 무죄를 선고받고 있습니다. 국정원과 경찰이 조작한 피해자들을 제외하고 보안사가 조작한 간첩사건의 피해자만 24명이 무죄 판결을 받은 상태입니다. 고통스러운 과거를 다시 떠올리기 싫어 재심을 꺼리는 이들까지 감안하면 실제 피해자들은 훨씬 더 많습니다.

하지만 당시 고문과 조작에 가담했던 대다수의 대공 수사관들은 지금까지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법적으로는 그때의 범죄 행위에 대한 공소시효가 이미 만료됐기 때문입니다. 보안사를 운영해온 정부 부처인 국방부 역시 지금껏 책임 있는 사과를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 이례적으로 당시의 고문 수사관이 처벌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1984년 보안사에 끌려가 간첩 누명을 쓴 윤정헌 씨의 2012년 재심에서, 당시 보안사 학원반장이었던 고병천 씨가 ‘고문을 가한 적이 없다’며 명백한 위증을 했기 때문입니다.

윤 씨 측은 즉각 고병천 씨를 모해위증죄로 고소했습니다. 고 씨가 윤 씨의 재심 무죄판결을 방해할 목적으로 위증을 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검찰은 고소 이후 거의 5년이 흘러간 지난해 12월에서야 고 씨를 위증죄로 축소해 기소했습니다. 재심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성 여부는 판단하지 않고 단순히 법정에서 허위 진술을 한 부분만 인정한 것이었습니다.

고병천 씨의 위증은 명백합니다. 앞서 2008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 당시, 고 씨의 보안사 학원반 부하였던 이덕용 씨가 “고병천 수사관님이 수사를 주도적으로 했다”고 진술했었습니다. 또 2014년 윤정헌 씨가 제기한 손해배상 소송에서도 법원은 고 씨가 고문에 가담하거나, 적어도 지시나 협의를 했다고 인정해 3천만 원 배상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에 대해 고병천 씨는 항소를 포기했습니다.

대공수사기관과 정보기관들의 간첩조작은 과거엔 납북어부에서 재일동포로, 최근 들어 다시 탈북자로 대상만 바뀌고 있을 뿐, 사실상 중단되었던 적이 없습니다. 국가폭력 피해자들을 위한 모임인 ‘민들레' 소속 장경욱 변호사와 김영진 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관은, 최근 청와대가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경찰로 이관하기로 한 방식이 의미가 없지는 않지만, 궁극적으로는 물리적 심리적 압박을 통한 자백만으로 손쉽게 간첩을 만들어낼 수 있는 현행 대공수사 시스템에 대해 강력한 제어장치를 마련하지 못한다면 과거의 비극은 미래에도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뉴스타파는 국가기관의 간첩 조작으로 긴 세월 동안 고통받았던 피해자들, 그리고 이들에게 끔찍한 고문을 자행했던 전직 대공 수사관들을 만나 각각의 기억과 입장을 들어보고 영상에 담았습니다.

취재 : 신동윤
영상취재 : 정형민, 최형석, 오준식
영상편집 : 정지성, 이선영
CG : 정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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