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의 배신 ② "나는 삼성생명 보험설계사였습니다"
2018년 03월 29일 23시 07분
※ 2018년 9월 19일 업데이트 현대라이프생명(현 푸본현대생명) 소속 전속설계사들의 싸움이 승리로 마무리됐습니다. 보험설계사가 단체행동에 나서 보험사의 일방적 조치를 막아낸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지난 15일, 현대라이프생명 측이 설계사 노조의 요구를 수용해 상호합의서를 작성하면서 372일 간의 투쟁이 마무리됐습니다. 사측은 폐쇄된 지점을 점차적으로 복구하는 한편, 수당 삭감, 지원금 환수 등의 조치를 철회하기로 약속했습니다. 투쟁 기간에 회사를 떠난 사실상의 해촉 설계사들의 복직도 합의됐습니다. 보험설계사들에 대한 사측의 사과도 합의서 내용에 포함됐습니다. |
설계사는 보험사의 ‘거위’이다. ‘황금알’을 낳는다. 그런데 우화 속에 나오는 농부와 거위의 관계와는 조금 다르다. 보험사는 현명한 농부와 달리 거침없이 거위의 배를 갈라 황금알을 꺼내고 거위를 버린다. 어리석은 행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거위는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보험사가 거위(설계사)를 다루는 방법은 간단하다. 보험사는 설계사를 최대한 많이 뽑는다. 그리고 설계사는 친인척과 지인 등을 활용해 보험 영업을 한다. 어차피 포화 상태인 보험 시장에서 신규 고객을 모집할 방법은 그리 많지 않다. 설계사 중 절반 이상은 1년 안에 그만둔다. 그리고 그만둔 설계사가 받아야 할 (잔여)수수료는 보험사의 몫이 된다. 보험사는 사업비를 절감할 수 있고, 이같은 사업비 차익은 보험사 수익의 절반이 넘는 비중을 차지한다.
보험사는 설계사를 많이 모집하고 많이 내보내는 게 수익의 원천입니다.
현대라이프생명 전속 보험설계사 김진아 씨(가명)는 회사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보험 영업의 '에이스'다. 설계사 경력 14년, 관리하는 고객이 1700명이 넘는다. 소위 잘 나가는 설계사지만 불볕 더위를 피할 사무실조차 없다. 여의도 한복판에 설치된 농성 천막에서 고객을 관리한다. 농성장 생활이 벌써 1년이다.
지난해 7월말 현대라이프는 78개 전 지점을 폐쇄하고 보험설계사에 지급하던 모집 수수료를 절반으로 삭감하겠다고 밝혔다. 불과 한 달 전까지 새로운 보험 상품이 출시됐다며 '돈 많이 벌어가시라' 외쳤던 회사였다. 굴지의 재벌 현대자동차 그룹 계열사가 그럴리 없다고 믿었지만 회사는 거침이 없었다.
사업가형 지점장들이 먼저 잘려 나갔다. 지점도 하나씩 문을 닫았다. 늘 우수한 영업 성과를 냈던 김 씨의 지점도 피해갈 수 없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던 출근길, 김 씨의 짐이 닫힌 사무실 문 앞에 놓여있었다. 1달만에 지점 폐쇄 작업은 마무리됐다.
고객 관리도, 영업도 할 수 없었다. 교육도, 심사도 멈춰섰다. 일을 하게 해달라 요구했지만 회사는 재택근무를 하라는 얘기만 반복했다. 수수료 삭감은 회사를 떠나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였다. 같은 계약을 성사시켜도 벌이가 절반이면 굳이 현대라이프에 남을 이유가 없었다. 회사는 뒤늦게 일부 지점을 다시 열었지만, 한때 2000명이 넘었던 전속 설계사의 수는 50명도 채 남지 않았다.
남은 설계사들은 회사의 일방적인 조치에 항의했다. 법률 자문을 받아 회사의 조치에 동의할 수 없다는 '미동의서'를 보냈다. 이에 대한 회사의 답은 간결했다. 1년짜리 계약이 끝나면 바로 해촉이라는 내용이었다. 대신생명과 녹십자생명을 거쳐 현대라이프가 되기까지 30년 세월을 내리 회사에 몸바친 60대 설계사도 마찬가지였다.
잃은 것은 일터만이 아니었다. 회사를 떠나게 되면 벌어놓은 돈도 몽땅 회사에 두고 나와야 했다. 이른바 '잔여수당 부지급', 업계에서는 이미 오래된 불문율이다.
현대라이프생명 전속 설계사들은 성사시킨 계약의 수수료를 36개월에 걸쳐 나눠받는다. 별도의 기본급이 없는 설계사는 이 수수료가 '벌어놓은 월급'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수수료를 모두 지급받기 전 회사를 그만두게 되면 이유를 불문하고 남은 수수료는 지급되지 않는다. 사실상 해촉이나 다름없는 조치를 내렸던 현대라이프 사태 때도 마찬가지다.
반면 회사를 떠나도 '환수'의 의무는 끝까지 설계사를 따라다닌다. 현대라이프를 포함한 일부 보험사들은 고객이 일정기간을 채우지 못하거나 불완전판매에 대한 민원을 제기하여 계약을 해지한 경우 설계사에게 지급한 수수료를 환수하는 규정을 두고 있다. 환수 액수나 기준도 보험사가 정한 복잡한 수식에 의해 이뤄진다. 일개 설계사로선 보험사가 책정한 환수액을 그대로 내는 수 밖에 없다. 많은 설계사가 퇴직 이후에도 생각 못했던 채권 추심에 시달리는 이유다.
이 '기울어진 운동장'의 근거는 보험사와 설계사가 맺은 위촉계약서다. 보험설계사는 노동법의 적용을 받지 못하는 특수고용직노동자다. 때문에 근로계약서가 아닌 별도의 위촉계약서를 작성한다.
취재진이 입수한 현대라이프생명의 보험설계사 위촉 계약서에는 잔여수당 부지급와 수수료 환수의 근거 조항들이 포함돼 있다. 계약 해지 시에는 일체의 수수료를 부지급한다(6조 6)든지, 내부의 수수료 지급기준에 따라 수수료 및 제반 지원비 환수가 가능하다(6조 7)는 식이다.
지점 폐쇄나 수수료 삭감 등 해촉에 가까운 계약 변경이 가능한 근거도 있다. 위촉계약서에는 회사가 합리적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계약 내용을 변경할 수 있고 그에 대한 설계사의 동의를 받는다는 내용이 있다(5조). 계약서에 명시된 '동의'는 형식에 그칠 수 밖에 없다. 계약기간을 1년으로 특정한 조항(3조) 때문에 회사의 요구에 동의하지 않는 것은 곧 1년으로 계약이 끝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번 현대라이프 사태 과정에서 결성된 현대라이프보험설계사노조는 공정거래위원회에 위탁계약서 내용에 대한 심사를 요청했다. 이에 대해 공정위는 지난 6월 '심사 종료 및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세부 내용에선 위촉계약서가 불공정하다고 본 것에 가까웠다. 계약서 내용에 보험설계사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내용이 있어 약관법 위반으로 무효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잔여수당 미지급과 환수 조치, 일방적 해촉 등 주요 사항에 대해선 유보적이었다. 최소한의 요건을 지켰기 때문에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일부 지적 사항에 대해선 회사가 자진해서 수정을 한데다, 당사자 간의 동의에 의한 계약이기 때문에 기관으로선 제지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에이스' 설계사 김 씨의 경우, 잔여 수수료가 1억 원이 넘는다. 스스로 떠나거나 계약기간이 끝나 해촉을 당하게 되면 고스란히 이 돈을 회사에 넘겨야 한다.
설계사 일을 하며 그동안 어떤 불합리한 일이 있어도 참았어요. 사실상 회사는 자신이 부담해야할 비용까지 모두 설계사에 전가해가며 수익을 늘려 온 거죠. 영업과 관리를 위해 들어가는 비용은 일체 지원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고객에 서류를 발송하기 위해 필요한 비닐 한장, 택배 봉투 한장 지원하지 않아요. 택배비도 전부 저희 돈으로 다 보내요. 1원 한장 해준 것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갑질을 하니 억울하죠. 그 돈(잔여 수수료)은 앞으로 우리 가족 희망이라 생각하고 회사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개척해 저축해 놓은 것이예요. 그걸 회사가 다 가져가려고 이렇게까지 하니 너무 억울해요.
만성 적자에 시달려온 현대라이프생명은 지난 1분기 극적으로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지난해 4분기 600억 원 대 적자였던 것이 109억 원 흑자로 크게 올랐다. 보험설계사를 대폭 줄이면서 생긴 잔여 수수료가 이익의 폭을 넓혔다. 경영책임자인 정태영 현대카드·현대캐피탈 부회장은 1분기 흑자 전환 소식에 대해 SNS에 이렇게 남겼다.
취재진은 현대라이프 측의 입장을 듣기 위해 수차례 연락을 취했지만 취재에 대한 회신을 받지 못했다.
2006년 알리안츠생명(현 ABL생명)은 ‘파워덱스연금보험'이라는 상품을 출시했다. 알리안츠생명은 상품 출시 초기 설계사를 대상으로 원금보장과 고수익이 동시에 가능한 획기적인 상품이라고 교육했다. 뉴스타파가 확보한 당시 알리안츠생명 교육자료에는 ‘최저 수익률 보장’이라는 문구가 자주 등장한다. 설계사들은 교육받은 대로 상품을 소개했고, 보험 상품은 큰 인기를 끌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주가폭락으로 인해 큰 손실이 발생하자 회사는 태도를 바꿨다. 고객의 민원이 제기되면 허위·과장의 책임이 설계사 자신에 있다는 동의서를 쓰도록 설계사에게 요구했다. 민원이 발생한 계약 건에 대해서는 설계사에게 지급한 수수료를 전액 환수했다.
제주도에서 만난 전 알리안츠 전속 보험설계사 정상기 씨는 회사의 동의서 작성 요구를 거절했다. 대가는 가혹했다. 4년간 회사와 법정에서 싸워야 했다. 결국 2016년 보험사의 책임이 80%라고 항소심 판결을 끌어냈지만 가정도, 사회 생활도 모두 망가져 있었다.
호소할 곳도, 싸울 여력도 없는 많은 설계사들은 그대로 동의서를 쓰고 회사의 잘못을 덮어 썼다. 빚을 끌어 보증보험의 구상금 청구를 막거나 신용불량자가 됐다. 아예 민원을 막기위해 고객에게 직접 돈을 건네는 설계사도 있었다. 이른바 ‘보험왕’이 사비로 고객의 민원을 막다 지쳐 아파트에서 투신하는 일도 생겼다.
사태는 최근에 와서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정 씨의 소송 이후 알음알음 피해 설계사들이 모였다. 환수금 반환 소송이 전국 곳곳에서 진행 중이다. 지난 1월 서울지역 44명 보험설계사가 제기한 소송에서 법원은 회사에 80%의 책임이 있다고 판단했다.
취재진은 ABL생명 측에 파워덱스 사태와 최근 판결에 대한 입장을 물었으나 답변을 받지 못했다.
보험연구원 '보험회사 수익구조 진단 및 개선방안'(2014.11) 연구에 따르면, 국내 보험사들의 사업비 차익은 전체 수익구조의 절반이 넘는다. (회계년도2011, 54.5%) 사업비 차익은 예정된 사업비 가운데 실제 지출된 사업비를 제하고 남은 수익으로 위험률 차익, 이자율 차익과 더불어 보험업의 주요 수입원이다. 주로 보험설계사 수수료를 비롯해 인건비와 각종 경비을 절감하면서 나오는 수익을 뜻한다.
주요선진국이 위험률 차익과 이자율 차익을 통해 주로 수익을 창출하는 데 반해, 국내 보험업계의 사업비 차익 의존도가 높은 것은 '많이 뽑고, 많이 내보내는' 특유의 리쿠르팅(recruiting, 설계사 채용) 문화와 닿아 있다. 많은 설계사가 들어와 단기에 퇴사하게 되면 많은 잔여 수수료가 발생하고, 이는 곧 사업비차익에 반영되는 구조다. 지난해 생명보험사의 13개월차 설계사등록정착률은 38.6%에 그쳤다. 손해보험사는 50.3%이다. 절반 이상이 1년을 채우지 못한다는 말이다.
보험사 입장에선 설계사를 많이 모집하고 많이 내보는 것이 수익의 원천입니다. 그간 설계사들의 노동 뿐만아니라 수수료까지 부당하게 가져감으로써 보험업계가 성장해왔는데 고용보험 적용을 앞두고 업계가 보험설계사의 고용 안정을 걱정하고 있다는 것은 의문입니다. 설계사들의 고용 안정이 '황금알 낳는 거위' 죽이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엄살을 떠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이 부분을 도려내기가 업계로서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취재 : 오대양
촬영 : 신영철, 정형민
편집 : 박서영
CG : 정동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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