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올해로 50주년을 맞습니다. 이 선언으로 당시 동아일보에서 130여 명, 조선일보에서 33명의 언론인이 강제 해직당했습니다. 일터를 잃은 언론인들은 출판,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로 흩어져야 했습니다. 각자의 영역에서 성과를 내기도 했지만, 언론 현장을 떠난 그들 개개인의 삶은 남모를 설움과 고달픔에 시달렸습니다. 뉴스타파는 자유언론실천선언 50주년을 맞아 이들 해직 언론인들의 글을 연재합니다. 지난 50년에 대한 소회와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해직 이후의 생활 등을 담습니다. 이 릴레이 회고록은 기자협회보와 동시에 게재됩니다. 스물두 번째 글은 정연주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위원이 썼습니다. - 편집자 주
1979년 10월 27일 아침, 성동구치소. 정치범만 격리·수용하는 특별사동의 아침은 고요했다. 8·15 특사 때, 긴급조치 9호 위반 대학생들은 모두 석방되고 일반인 정치범 다섯만 남아 있었다. 2층 오른쪽 가장자리 방에 나와 김종철 선배, 고려대 제적생 유구영(1996년 작고), 옆방에는 안종필(동아투위 위원장. 1980년 작고), 홍종민(동아투위 총무. 1988년 작고) 두 선배가 있었다.
특별사동 앞쪽 구치소 담장 너머로 동사무소 깃봉 윗부분이 보였다. 늘 하늘 높이 걸려있던 태극기가 그날 아침에는 낮게 걸려있었다. 아침 점호 때 들린 담당 교도관은 전투복 차림, '간첩 나타났소?'라고 물었어도 그냥 휭하니 가버렸다.
△ 내년 3월 17일 동아일보사 대량 해직 50년을 맞는다. 10년 전, 동아투위 결성 40주년을 맞아 동아일보사 앞에서 시위를 했다. 49년 동안 해마다 해오는 행사다. 10년 전 사진을 보니, 모두 참 젊다. 10년의 세월이 이러한데, 50년의 세월은...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필자 정연주)
면회 소식이 있어 교도관 인솔 아래 면회실로 갔다. 1주일에 한 번, 3분만 허용되는 면회 시간에는 늘 아내가 왔다. 뜻밖에 부모님이 와 계셨다. (아내는 전날 저녁, 전주 친정에 내려갔다). 1년 만에 뵙는 어머님은 줄곧 눈물만 흘리셨고, 아버님은 '몸은 어떠냐' 하시면서 오른쪽 엄지를 뒤집는 시늉을 되풀이하셨다. 왜 그러세요, 물었더니 '허 그놈 눈치도 없네' 하시며 혀를 끌끌 차셨다. 대통령이 총 맞아 죽었다는 말은 끝내 듣지 못했다. 구치소 쪽에서 단단히 겁박한 모양이었다.
사흘이 지난 일요일 아침. ‘지도’(교도관 업무를 보좌하는 기결수)가 사식 주문을 받으러 왔다. 우리를 보더니 의아한 표정으로 '왜 아직 이러고들 계세요?' 그랬다.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툭 내뱉었다. “박정희 총 맞아 죽었잖아요?”
"한마디로 X 같은 재판"...외상 징역의 사연
하늘을 날 것처럼 기뻤다. 주섬주섬 '빵살이' 1년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성님, 나갈 준비합시다", 김종철 선배에게 말했다. 우리는 마음껏 웃으며 푸짐하게 사식을 시켰다. 두목이 죽었으니 유신 체제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지고 새 세상이 올 것이며 이제 우리는 곧 동아일보로 돌아갈 것이다. 무엇보다 곧 석방되어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온몸에 환희의 전율이 흘렀다.
그런데 바깥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박정희 장례는 국장으로 치러졌고, 이부영 선배는 동아투위 등 5개 단체 성명서 관련으로 계엄포고 1호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게다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해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려는 신군부 의도를 막기 위해 서울 명동 YWCA 강당에서 ‘통대 선출 저지 국민대회’(속칭 명동 위장결혼 사건)가 열렸는데, 임채정 동아투위 위원(전 국회의장), 문학평론가 김병걸 선생, 백기완 선생 등 14명이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그런 가운데 우리 동아투위 열 명을 더 이상 가두어 놓을 명분도, 실익도 없었던지 세 군데 구치소에 분산 수용된 동지들 석방 소식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 1979년 12월 초, 감옥에서 나온 필자 정연주를 환영하는 동아투위 저녁 식사 자리. 아래 보이는 분이 이병주 동아투위 위원장(2011년 작고), 한겨레 창간 주역이자, 초기 총괄상무를 지냈다.
11월 20일 새벽, 교도관이 감방 앞에 와서 내 수감번호를 불렀다. 긴급조치 9호 위반의 형이 집행정지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나가야지, 그리 생각하는데 교도관이 한마디 덧붙였다. ‘외상 징역’ 12일은 마저 살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징역살이에 외상이 생긴 이유는 이렇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투옥되기 몇 달 전인 1978년 여름, 당시 한국 양심범의 상징이었던 김지하 시인의 석방을 위한 기도회가 강원도 원주 원동성당에서 있었다. 서울에서 연대의 마음으로 몇몇이 기도회에 참석했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쪽에서 시인 고은, 소설가 이호철, 송기원(지난 7월 31일 작고), 동아투위에서 박지동(전 광주대 교수), 임채정, 이부영, 김종철, 정연주가 함께 갔다.
기도회 다음날 우리 일행은 고속버스를 타고 서울로 향했다. 고속버스가 막 시내를 벗어나려 하는데, 옆자리 송기원이 ‘뿌리파’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 시절 늘 그랬듯이, ‘박정희는 물러가라 좋다 좋아’, ‘유신헌법 철폐하라 좋다좋아’... 그렇게 우리들 합창으로 이어졌다. 톨게이트 진입 직전, 긴급출동한 원주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에 잡혀갔다. 하루 뒤 긴급조치 9호 위반이 아닌 경범죄 위반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경범죄 재판은 약식재판이 보통인데, 그날 재판은 우리만 불러다 놓고 정식재판처럼 진행되었다. 각자에게 최후진술 기회까지 주어졌다. 내 차례 때 나는 '이 재판은 한마디로 X 같은 재판입니다' 한마디만 했다. 우리 모두에게 경범죄 최고형 구류 30일이 선고되었다. 우리는 구치소를 겸한 원주 경찰서 유치장에 수용되었고, 거기서 8일 지내고 석방되었다. 경범죄 판결 결과를 거부하고 정식 재판을 청구했기 때문이다. 정식 재판을 청구하면 바로 석방해야 한다. 그 뒤 정식 재판 결과 30일 구류에서 20일 구류로 감형되었다. 12일의 ‘외상 징역’이 생기게 된 것이다.
△ 1979년 12월 2일 성동구치소에서 석방, 집에 돌아와 오니 성큼 커버린 두 아이들이 활짝 웃으며 아빠를 맞았다. 사진 왼쪽이 웅세(2살), 오른쪽이 영빈(5살). 그 활짝 핀 웃음도 잠시. 6개월 뒤 다시 기약 없이 헤어졌다.
‘외상 징역’ 12일까지 다 살고, 12월 2일 마침내 감방에서 풀려났다. 아이들은 1년 사이 부쩍 커 있었다. 영빈이는 다섯 살 소년으로 성큼 커 있었고, 두 살 웅세는 깡충깡충 뛰어다니는 꼬마 개구쟁이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 아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콩나물처럼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아빠는 ‘미국 가서 공부하고 이제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멀리서 바라봐야 했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그런데 여섯 달 뒤, 아이들은 다시 아빠와 기약 없이 헤어지게 되었다. 서울의 봄, 5월 17일 새벽, 신군부는 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전날 밤사이 김대중 야당 지도자를 포함하여 이른바 반체제 인사 블랙리스트 인물 8백여 명 가운데 6백여 명을 잡아갔다.
동아투위 동지들은 전날 밤, 수유리 뒤쪽 우이산 중턱에 있는 가톨릭 휴양관에 모여서 밤늦게까지 ‘새 시대, 새 언론’을 얘기했는데, 그 덕에 계엄군의 긴급체포를 피할 수 있었다. 새벽에 박종만 선배가 다급한 목소리로 깨웠다. “정연주, 빨리 일어나. 밤새 다 잡혀가고 세상 뒤집어졌어”. 재야인사들 대부분 잡혀가고 몇몇 동아투위 위원들 집에도 계엄군이 들이닥쳤다는 것이다.
김종철 선배와 나는 수유리 뒷산으로 튀었다. 산 위에서 잠시 숨을 돌리면서 우리는 연락처가 적혀있는 수첩을 모두 찢었다. 산에서 내려와 공중전화로 아내에게 전화를 했다. "밤에 누가 왔지요?" 아내는 그렇다고 말했다. "당분간 연락하기 어려우니, 아이들 데리고 잘 지내소". 전화기 너머로 울음을 삼키는 아내의 떨리는 목소리가 전해 왔다. "집 걱정 마시고, 몸 잘 보살피세요. 아침에 미국 시숙이 뉴스 보고 동생 걱정된다며 전화하셨어요."
전날 밤 자정, 총을 찬 계엄군 12명이 군홧발로 20평짜리 아파트에 들이닥쳐 2시간 동안 집안을 샅샅이 뒤지며 온갖 걸 물었다. 책 여러 권과 내 사진 한 장도 가져갔다. 그 사진이 들어간 수배지는 그 뒤 1년 가까이 전국 방방곡곡, 여관과 다방, 골목길 담벼락 등 참 많은 곳에 붙어있었다. ‘수배 사유 국기문란. 체포하면 1계급 특진, 2백만 원 포상’ 문구와 함께.
△ 5·18 수배사진. <한겨레> 2010년 5월 18일자 ‘5월의 얼굴을 기억하십니까’ 기사에 실린 사진이다. 이 사진에는 잘 보이지 않는데, 수배자 사진 아래쪽에는 생년월일, 본적, 주소, 수배사유, 인상착의가 적혀 있었다. 나의 수배사유는 ‘국기문란’. ‘체포하면 1계급 특진, 포상금 2백만원‘ 문구도 있었다. ⓒ한겨레신문 보도 일부 캡쳐
아내의 외사촌 오빠 오홍근 형님(당시 중앙일보 기자. 전 국정홍보처장. 육군정보사령부 요원에게 식칼 테러 당함. 2022년 작고) 편으로 아내 소식과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가끔씩 은밀하게 전해 들었다. 놈들이 나를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단단히 엮어 놓아 심하게 정 서방을 찾고 있으니 잡히지 말고 조심하라고 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 조작을 위해 잡혀간 이들이 온갖 고문을 당한 이야기는 수없이 들었던 터다.
아내와 아버지를 차례로 잡아가서 나의 행방을 캐물은 그 야만적 행태, 나와 인연이 있는 거의 모든 이들, 학교 동기들은 물론 아주 어릴 때 헤어지고 연락이 두절되다시피한 먼 친척까지 찾아간 계엄군과 경찰들, 전북 부안 한적한 시골에서 양봉하는 아내 큰 언니 집에 와서는 내 흔적 찾는다며 두엄더미까지 뒤졌다고 했다.
그해 11월, 어머니와 아버지가 미국 형님 초청으로 서울을 떠나시게 되었다.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다급해졌다. 공항에 나가면 잡혀갈 게 뻔한 터여서, 떠나시기 전 얼굴이라도 뵈어야 했다. 아버지와는 동네 목욕탕 사우나에서 몰래 만나기로 연락해놓았다. 그날 저녁, 아버지와 나는 벌거벗은 몸으로 사우나 안에서 만났다.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아버님이 우시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날 밤 나는 삼성동에서 그때 숨어 살던 철산리까지 하염없이 걸었다. 걷는 내내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어머니는 만날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큰아이 영빈이 어린이집 끝나고 함께 집으로 걸어가는 그 시간에 맞춰 그 앞길을 버스를 타고 수없이 오갔다. 어느 날 하늘이 도와 손자의 손을 잡고 걸어가시는 어머니의 자그마한 모습을 뵐 수 있었다. 하늘도 무심하지, 손자 손잡고 귀가하시던 어머니의 그 모습, 목욕탕 사우나에서 만난 아버지의 벌거벗은 그 모습, 그 모습이 육신으로 뵌 마지막이 될 줄이야.
부모님이 미국으로 떠나시던 날, 경찰 여러 명이 공항에 나타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집을 떠나시기 전, 어머니는 막내 얼굴 못 보고 떠나는 것이 끝내 가슴 아파 아파트 문 손잡이를 부여잡고 발을 떼려 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소리 내어 통곡하시면서.
고문으로 꾸며낸 '자백서'...나를 지켜준 도움과 인연들
이듬해 전두환이 체육관 선거에서 대통령에 당선되어 취임한 3월 3일 나는 집으로 들어갔다. 귀가하고 얼마 뒤 강남서 정보과의 내 담당 최 형사가 집에 들렀다가 나를 보고는 바로 본서에 연락했다. 검은 지프차가 바로 왔다. 그날 밤 강남서 보호실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나는 청량리 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아니, 왜 청량리서로 가요? 아무 연고도 없는데... 동아투위면 종로서가 관할이고, 내 집은 강남서 관할이 아니오?" 최 형사는 자기도 아는 게 없다고 했다.
청량리서에 도착해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마침내 나는 그들이 왜 그토록 나를 잡으려 했는지, 무엇을 어떻게 조작하였는지, 왜 청량리서에서 조사를 받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서울의 봄, 내가 경희대 신문에 쓴 ‘70년대 한국 언론’ 중 일부가 경희대생 3명이 주도한 시위 때 뿌린 성명서에 인용되었고, 이들이 계엄군에 잡혀가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김대중으로부터 수십만 원의 자금을 받은 정연주가 △ 그 자금을 경희대생 3명에게 모월 모일 모시 모처에서 만나 전달, 이를 데모 자금으로 사용, △ 해직기자 정연주가 학생시위의 배후세력'이라는 것이었다.
경희대생 3명과 나는 생면부지, 서로 알 리 만무했으니 학생들은 놈들이 원하는 ‘자백서’에 날인할 때까지 얼마나 무지막지한 고문을 당했을까. 결국 그들은 자백서에 날인했다. 청량리서에서 조사받던 어느 날, 대학생 3명이 저만치 와서 정보과 형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모진 고문 끝에 거짓 자백을 했다는 확인서를 쓴 모양이었다. 경희대는 청량리서 관할이었다.
한 달 동안 청량리서 보호실에 장기 투숙자로 머물다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 바깥에 나오니 봄이 제법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바로 부모님께 전화드렸다. 연로하신 부모님은 나더러 하루빨리 미국 오라고 하셨다. "네, 곧 갈게요. 건강하게 기다리고 계세요." 그 시절, ‘국기문란자’인 내가 미국 가는 일은 쉽지 않았다. ‘유학’이 유일한 길이고, 여권 받는 일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 있는 추모공원의 부모님 묘비. 어머님이 먼저 돌아가시고 2주 뒤 아버님이 뒤를 따라가셨다. 온갖 우여곡절 끝에 부모님 세상 떠나시고 다섯 달 뒤, 우리 가족 은 휴스턴에 도착하여 부모님께 절을 올렸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미국 가는 준비를 하는 도중, 나의 부모님은 1982년 6월, 2주 간격으로 세상을 떠나셨다. 휴스턴대 대학원 경제학과에 입학하고, 그 힘든 여권과 비자를 발급받고, 마침내 미국에 도착하여 부모님이 영면하고 계시는 공원묘지를 찾은 게 1982년 11월 말. 아내와 두 아들 우리 식구 넷이 부모님 묘소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회한과 슬픔, 그리움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하늘에서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연주, 식구들 데리고 잘 왔구나”.
수배 중 나를 숨겨준 민주 교도관의 맏형 전병용 선생, 재야의 온갖 뒷일을 감당했던 김정남 선생(김영삼 대통령 시절, 청와대 교육문화사회 수석비서관), 친구 박기봉 등 많은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꼼짝없이 잡혀 모진 고문 끝에 조작된 자백서에 날인했을 터다. 그 고마움, 평생의 큰 빚을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