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도 조세피난처에

2013년 06월 06일 10시 28분

사파이어빛 바다에 한가로이 떠있는 요트들. 황금빛 해변에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 카리브해에 있는 영국령 버진아일랜드는 원래 휴양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그러나 뉴스타파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의 조세피난처 프로젝트로 인해 최근 이 섬은 부자들의 은밀한 재산 도피처로 더 유명해졌습니다. 그런데 서구권이나 우리나라 사람만 이곳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버진아일랜드에 본사를 둔 커먼웰스 트러스트, CTL사입니다. CTL은 전 세계 기업과 부자들을 위해 페이퍼컴퍼니 설립을 대행해 주는 회사입니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ICIJ가 입수한 CTL의 고객정보 데이터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전혀 예상치 못한 주소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대한민국 평양시 모란봉 구역 긴말 2동. 지난 2004년 버진아일랜드에 설립된 래리바더 솔루션이라는 페이퍼컴퍼니의 이사이자 주주, 문광남이란 인물의 주소입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모란봉 구역내에 긴말동이라는 직접적인 표현보다도 긴마을 1동, 긴마을 2동 이러한 지명이 있는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보통 이런 표기는 남북한이 분단된 현상이기 때문에 국제사회에서 자신이 직접 표기하지 않는 한 불러준 대로 한다면 이렇게 오류가 날 가능성이 상당히 많습니다.”

지난 1999년 북한에서 발행된 조선지도중 평양시 중심부를 확대한 지도입니다. 뉴스타파가 입수한 이 지도에는 모란봉구역 긴마을 2동이 있습니다. 이 지역을 구글 지도로 검색해봤습니다. 이 곳은 북한주재 중국대사관이 들어서 있을 정도로 평양의 가장 중심부입니다.

페이퍼컴퍼니를 만든 문광남은 누구일까. 북한 주요기관 단체 인명록을 찾아봤습니다. 통일부 정치군사분석과가 매년 발간하는 자료입니다. 문광남. 자강도 성간군 농촌경리위원회 위원장.

평양방직에서 근무했던 문광남이란 사람도 있습니다. 이 사람은 특허를 출원한 적도 있는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그러나 이 중 누가 페이퍼 컴퍼니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단정하긴 어렵습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 “동명이인일수 있어요. 인민위원회 행정을 맡은 사람과 과학자, 발명을 맡은 사람과 차이가 나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당이라든지 인민위원회 엘리트들이 발명이라든지 과학계통은 드뭅니다.”

북한 군부가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는 추정도 나옵니다. 문광남의 주소지로 기재된 긴마을 2동이 그만큼 특별한 곳이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홍순경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 “긴마을에 (있는) 아파트에 살았다면 긴마을동, 인민무력부 소속 사람일 수도 있다. 무력부가 무기거래도 많이 해요. 북한산 뿐아니라 러시아산, 중국산도 받아서 되팔거든요.”

실제로 이 페이퍼컴퍼니와 관련된 자료에는 탈세 등을 목적으로 설립된 유령회사와는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보통의 페이퍼 컴퍼니에는 없는 선적 주소가 기재돼 있습니다. 러시아 연방의 영수증을 발급할 때와 무역서류의 송장을 보내는 주소로 사용하도록 돼 있습니다. 실제 무역 거래에서 이 페이퍼컴퍼니를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특히 CTL에 이 페이퍼컴퍼니 설립을 중개한 GSL이라는 법률회사의 주요 고객은 러시아 마피아 조직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뉴스타파 취재진은 CTL의 내부 고객 정보에서 문광남이 설립한 페이퍼컴퍼니 이외에도 북한과 연관돼 있는 것으로 보이는 페이퍼컴퍼니를 추가로 발견했습니다. 천리마, 조선, 고려 텔레콤. 북한과 관련이 없는 회사라면 붙이기 힘든 이름들 입니다. 이들 페이퍼 컴퍼니는 2000년 11월 말부터 이듬해 2월까지 차례로 설립됐습니다.

이들 페이퍼컴퍼니 이사 명단에는 임정주라는 한국 이름과 웡유콴이라는 중국 이름 공통적으로 등장합니다. 웡유콴은 현재 동방명주석유라는 홍콩회사의 회장으로 확인됐습니다. 이 인물은 1999년 북한의 국제자동전화 및 이동통신 사업권의 50%를 랜슬럿 홀딩스라는 업체로부터 300만달러에 매입한 적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임정주라는 인물은 맨 처음 북한의 이동통신 사업권을 따낸 랜슬럿 홀딩스의 창업자입니다. 그러나 임씨의 신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2000년 홍콩증권거래소 기록에는 동방명주그룹의 텔레콤 부문 임원으로 등재돼 있습니다.

이들이 공동으로 북한에서 이통통신 사업을 벌인 그 시점에 북한식 이름으로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잇달아 만든 이유는 뭘까? 정확한 내막을 알기는 불가능하지만 설립 시점에 주목해볼 필요는 있습니다.

2000년 초반 북한은 2차 북핵 사태로 인한 국제적 제제로 인해 곤욕을 치릅니다. 같은 해 대북 강경론자인 조지 W. 부시 가 미 대통령에 당선됐고, 9.11테러로 북한에 대한 경제 재제가 한층 강화됐습니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당시 북한이 경제 봉쇄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라고 분석합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 “북한에 대한 제재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북한으로서는 우회적으로 무역이랄지, 해외송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천리마, 조선, 고려텔레콤 등은 북한 사람이 직접 만든 것이란 증거는 없지만 여러 정황들을 볼 때 북한 관련 사업가를 통해 북한이 우회적으로 설립한 유령회사가 아니냐는 추정은 가능합니다.

지난 2010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 당국은 북한 정권의 비자금 관리부서인 노동당 39호실이 자국 내 은행계좌를 이용해 미국의 금융제재를 회피하고 있는지 여부를 조사한다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번 ICIJ가 입수한 CTL 내부 자료에서 북한의 평양 모란봉구역을 주소로 기재한 사람이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사실이 확인됐다는 것입니다.

뉴스타파 황일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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