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부정선거 확인하려고 국정원이 선관위 보안점검 했을까?
2024년 12월 20일 17시 25분
지난 9월 12일 새누리당 당사 앞.
“천벌을 받아라. 죽어서도 천벌을 받아라. 박정희 살인마. 박정희 살인마. 죽어서도 천벌을 받아라. 지옥에서 나오지 못하게..”
“나는 인혁당은 이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내 목숨 걸고 말할 수 있습니다.“
30여 년 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남편의 영정을 든 노인들. 이른바 두 개의 판결을 주장한 새누리당 박근혜 대선후보의 최근 인혁당 발언을 항의하면서 면담을 요구합니다. 당시 16살, 고등학교 1학년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송철환씨.
[송철환(53) 고 송상진의 아들] “우리 유가족 어머니들이 노구를 이끌고 여기에 선 이유는 40년 가까이 온갖 박해와 냉대를 받으며 간첩의 자식으로 살아온 자식들에게 부끄러운 역사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다시는 이 땅에 인혁당 재건의 사건과 같은 무고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새누리당과 박근혜는 역사와 국민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해야 합니다.”
경찰에 막혀 새누리당을 방문하지 못한 채 어머니와 함께 고향인 대구로 내려갑니다. 몸은 이미 지쳤습니다.
[송철환(53) 고 송상진의 아들] “8시 반, 9시 정도 되어서 골목이 떠들썩하더라고요. 어머니가 나무목각에 뼈만 담은 아버지 곽을 모셔왔더라고요.”
송씨는 다음날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모신 묘소를 찾습니다. 한동안 독재 권력에 의해 비석조차 세우지 못했습니다.
[김진생(79) 고 송상진의 부인] “출입을 못하게 하더라고 법원에... 그때 바로 사형을 시킨 겁니다.” (면회 할려고 하면 교도소 출입을 안 시켜주고. 그 사이에 사형을 시켜서는...) “참 못되게 굴었지...”
이곳에는 송상진씨 외에도 인혁당 사건으로 사형을 당한 이가 3명이 더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버지의 죽음을 막기 위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기도 했습니다.
@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 1974년 11월 3일
“저희 형이 경북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입학금 때문에 걱정을 하던 중 아버지께서 친구 분에게 돈을 꾼 것을 공작금으로 받았다는 너무 억울한 일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억울한 재판을 하였는가하여 슬프고 억울한 마음밖에 들지 않습니다. 저희 가정에도 행복이 찾아올 수 있도록 각하께서 돌보아 주신다면 저는 조국의 한 민주시민으로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각하께서 어버이의 은혜로 보살펴 주십시오. 바쁜 시간이나마 저희들의 아픈 가슴을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1974년 11월 3일 일요일 경북 대구시 경상중학교 3학년 5반 송철환.”
그러나 절대 권력은 냉정했고 아무런 답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새벽 느닷없는 죽음을 당한 사람은 모두 8명입니다. 쉰세 살의 서도원, 마흔 한 살에 김용원, 마흔 살의 이수병, 마흔 여섯 살의 우홍선, 마흔 일곱 살의 송상진, 서른 두살의 여정남, 마흔 네 살의 하재완, 당시 쉰 두 살의 도예종. 1975년 4월 9일. 서대문 형무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인혁당 사형수입니다.
@ 1975년 4월 8일 대법원 판결
하루 전날 이들은 모두 대법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른바 피고인 없이 이루어진 궐석 재판으로 진행됐습니다.
[이영교(77) 고 하재완의 부인] “‘그래도 재심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아라’ 했는데 빈 법정에 판사 열 몇 명이 싹 들어와 앉더니 아무도 없는데 그때 얼굴이라도 보겠다고 찾으니까 사람들은 없고 빈 법정에 호명만 하더라고. 누구, 누구, 누구.. 그러고 나서는 사형, 사형, 사형.. 무기(징역) ‘탕탕’ 치고는 나가더라고.”
그리고 사형 확정 16시간만인 다음날 새벽 4시 반. 서도원을 비롯해 8명 전원에 대한 사형 집행이 전격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한 사람 당 30분 간격으로 진행됐습니다. 사상 초유의 사법살인이 일어난 것입니다.
[유인태 국회의원 / 당시 민청학련 사건 사형수] “방에 두런두런 소리가 나서 깼어요. 깼더니 같이 있던 사람들 거의 다 깨있더라고요. ‘넥타이공장 돌리나봐’ 그러더라고요. 기상시간이 지났는데 기상도 안 시키고 배식도 안 하고 조용하니까 전 그 소리 딱 듣는 순간에 설마 하면서 머리가 쭈뼛하더라고요. 딱 보니까 뒷모습을 보니 여정남 선배가 끌려가더라고요.” (아 그때요?) “네. 그게 마지막 집행이었을 거예요. 여정남 선배 끌려가는 뒷모습을 보고 조금 지나니까 이제 기상나팔을 불고 배식에 들어갔거든요.”
[강순희(80) 고 우홍선의 부인] “다음 날 새벽에 죽여서 재심청구도 못했죠. 나는 희망을 가지고 괘씸하지만 우리 변호사한테 재심 청구하러 가면 되겠지, 하고 12시쯤 변호사님 만나러 갔는데 벌써 이미 죽인 거야, 아침에 뉴스가 나오는 거예요.”
모두 무죄를 주장했지만 피고인으로서 최소한의 방어권도 주어지지 않았던 상황. 이 때문에 대한민국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었습니다.
이들은 왜 이렇게 급하게 죽임을 당해야 했을까. 1972년 초헌법적인 유신으로 독재의 길을 가던 박정희 정권. 그러나 장준하 선생과 대학생들의 반독재투쟁과 유신철폐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박정희 독재정권은 1974년 긴급조치 4호를 전격 발표합니다.
민청학련에 가입한 사실만으로도 사형 등 가혹한 처형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대학생들의 시위를 막기 위한 위헌적인 조치였습니다.
[김동춘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유신헌법 자체가 헌법 자체를 비판할 수가 없게 되어 있던 것이고. 그 다음에 대통령이 거의 전권을 가지고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민주주의 절차 제도자체가 종식, 완전히 끝난 상황이고 국회의원 3분의1을 대통령이 임명할 수 있는 사회였기 때문에 어떤 저항도 불가능한 사회였죠. 그러니까 그 시대는 암흑기죠. 일제 말기의 암흑기하고 거의 비슷하죠.”
곧이어 민청학련 사건과 그 배후를 조종했다는 이른바 인혁당 사건을 발표합니다. 북한의 지시에 따라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는 내란음모죄가 적용됐습니다. 인혁당 사건을 주도했던 곳은 당시 중앙정보부 정보6국이었습니다.
변호인의 접견도 차단되고 면회도 사실상 불가능했던 상황. 긴급조치 사후에 따라 민간인임에도 불구하고 군법회의에 회부됐습니다. 특히 전기고문과 물고문 등 온갖 고문이 가해진 가운데 허위 자백으로 혐의가 조작됐습니다.
[김형태 인혁당 재심사건 변호인] “그러니까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서울에서 몇 분이 잡혀 갔는데, 어느 다방에서 여섯 사람이 모였는데 ‘몇 월 며칠 날 모여서 무슨 얘기했지 않느냐’ 그렇게 해서 조서 다 썼어요. 막 때리고 두들겨 맞고 강제로 찍고 해서 ‘우리 여섯 명이 무슨 다방에서 모여서 무슨 얘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조서를) 만들었는데 보니까 그 중 두 명이 감옥에 들어가 있는 거야. 1차 인혁당에 관여됐던 박중기 선생이나 이런 분들이 감옥에 가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기들이 (조서를) 받아놓고 ‘감옥에 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모일까?’해서 다시 조서를 써서 4명으로 줄여요. 두 번째는, 그러니까 이런 수사를 한 거예요.”
그러나 폭압적인 군 법정에서 고문당한 사실조차 털어놓지 못했습니다. [이창복 인혁당 사건 피해자 (당시 징역 15년)] “공포증. 문을 열어도 사라마 앞에 가면 벌벌 떨리는 그런 공포증에 (밖에) 나와서도 시달리고 그 안에서도 불면증으로 생활하다가 나중에 정신질환 초기 단계에서 병원에서 그런 아픔을 겪었습니다.”
@ 인혁당 재심 무죄 판결 2007년 1월 23일 뉴스
“유신정권의 사법 살인이라는 비판을 받아왔던 인혁당 사건 기억하시죠? 오늘 열린 재심 선거 공판에서 법원이 32년 만에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결국 이 같은 고문과 허위자백으로 이루어진 인혁당 사건은 마침내 지난 2007년 재심 결과 법원은 사형 집행을 당한 8명 전원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김형태 인혁당 재심사건 변호인] “그때 재심 재판할 때 검사도 논고를 하면 구형을 해야 하잖아요. 근데 구형을 안 했어요. 징역 몇 년 사형, 이렇게 안 하고, 그냥 재판부에 ‘정당하고 합당한 판단을 바랍니다’ 이렇게 논고를 끝냈고, 재판부도 선고하면서 ‘우리가 무죄를 선고했다고 돌아올 리는 없고 그렇지만 국가를 대신해서 우리가 사과한다’ 이런 취지의 얘기를 재판부가 했고.”
정부의 배상조치도 이루어지면서 32년 만에 명예회복이 됐습니다. 그러나 2007년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의원은 사형선고를 내린 판사들의 명단을 공개한 것은 나에 대한 정치 공세라며 강력 반발했습니다. 또 지난번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이고 이번에도 법에 따라 한 것인데 하나가 잘못된 거 아니겠느냐, 이렇게 반발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5년 전과 같은 맥락으로 말을 한 박근혜 후보. 그녀의 발언을 놓고 비판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아버지 박정희의 유신체제를 옹호하는 나머지 역사적 사건의 진실은 물론 사법부의 판단마저 무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판이 거세지자 새누리당은 한 발 물러섰습니다.
[김종인 새누리당 국민행복추진위원회 위원장] “본인의 판단에 의해서 발언이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제3자가 이러쿵 저러쿵 얘기하는건 온당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박근혜 후보가) 두 개의 판결이라고 말씀하셨는데요. ) “그거는 좀 오류가 있었던 것 같아요.” (어떤 오류?) “판결이라는 것이 하나니 둘이라는 게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니까.” (그렇죠.)
하지만 대선 후보이자 문제발언의 당사자인 박근혜 후보는 인혁당 법원판결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내놓지 않은 채 당이나 박 후보의 선거캠프 대변인들만 나서고 있는 모양새입니다.
[조윤선 새누리당 대변인] “새누리당의 공식입장은 박근혜 후보와 마찬가지로 인혁당 두 번째 사건과 관해서 판결이 두 번에 걸쳐서 있었고, 두 번째 판결, 재심 판결에 의해서 재심판결이 최종적인 사법부의 의견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입장을 같이 합니다.”
급기야 인혁당 재심 결과에 대한 사과 발언을 놓고 당 대변인이 사의를 표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몸통인 박근혜 후보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주변 참모들만 우왕좌왕 하고 있습니다.
박근혜 후보의 불통 문제가 또 다시 제기되는 이유입니다.
[안병욱 카톨릭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박 후보는 ‘내가 대통령이 됐을 때 결단코 유신시절이나 아니면 군사정권의 망령이 살아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내가 보증한다.’ 그렇게 해서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의혹, 의구심을 덜어줘야 합니다. 그런데 박 후보의 행적은 거꾸로, 그 점에 대해서 오히려 의구심을 더 키워주는 측면이 있거든요? ‘5.16은 불가피했다’ 유신시절에 대해서도 결코 비판적이거나 반성하는 얘기를 하지 않습니다.”
인혁당 사건의 최대 피해자인 유가족들이 박근혜 후보에게 인혁당 판결에 대한 명확한 입장을 요구하고 있는 가운데 인혁당 무죄판결에 대해 5년 전에도, 그리고 최근에도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박근혜 후보.
[박근혜 대선 후보 당시] “인터뷰 안 해요. 오늘은 인터뷰 안 합니다.”
과연 유신독재의 사법 살인을 진정 옹호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녀의 역사적 판단의 기준은 무엇일까.
[김동춘 성공회대학교 사회과학부 교수] “자연인 딸로서 아버지에 대한 옹호를 하고 정당화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죠. 우리 누구도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 입장에서 그거를 옹호하고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지만, 공인으로서 또 차기의 대통령 후보로서의 그 지금 우리가 이미 10년의 민주화의 경험, 민주화 정권, 그 다음에 20년 이상의 민주화 경험을 겪은 나라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사람의 시각은 굉장히 보수적인 즉, 70년대적 사고에 갇혀 있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87년 이후에 20여 년 동안 우리 사회 변화가 이 사람에게 별로 접수가 안 되어 있는 느낌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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