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팀 셔록의 워싱턴 리포트 21] CIA가 본 5·18 광주와 전두환의 유산

2019년 05월 20일 10시 03분

미국 중앙정보국(Central Intelligence Agency·이하 CIA)은 전두환이 광주 5·18민주화운동 이후 정권을 장악하고 권력의 정점에 있을 때조차도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에 심각한 의문을 품었다는 사실이 CIA 비밀해제 문서로 확인됐다. 뉴스타파가 지난 1년에 걸쳐 분석한 CIA 문서들은 80년대에 군부통치에 저항하는 야권 세력이 성장함에 따라 전두환과 그의 군부 내 공범들이 CIA를 점점 더 불안하게 만든 상황도 보여준다. 또 1985년 어느 시점에선 미국이 전두환의 재집권에 대응할 방안도 고려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CIA 문서들은 1987년 6월항쟁 무렵 미 레이건 정부가 왜 그토록 전두환을 내려 앉히려고 했는지 부분적으로 설명해준다.

들어가며

그날은 1980년 6월 6일이었다. CIA는 남한의 상황을 우려하고 있었다. CIA 국가정보관(National Intelligence Officer·NIO)은 이날 스탠스필드 터너 CIA 국장에게 "자신의 압도적인 권력을 영구화하려는 전두환의 명백한 결심과 민심 사이에 괴리가 커진다면 추가 봉기를 유발하고, 한국군 지도부의 결속을 깨뜨릴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는 내용의 일급 비밀 보고서를 보냈다.

▲CIA 국가정보관이 1980년 6월 스탠스필드 터너 CIA 국장에게 보낸 일급 비밀 보고서. 전두환의 광주 5·18민주화운동 진압 방식이 추가 봉기를 유발하거나 한국군 지도부 결속까지 깨뜨릴 수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출처: CIA)

이 같은 분석은 전두환의 특수부대가 광주를 다시 무력으로 탈취한 5월 27일로부터 불과 9일 만에 나온 것이다. 5년 뒤 CIA 동아시아 담당 국가정보관은 ‘한국: 전두환의 외줄타기’라는 제목의 비밀 보고서에서 전두환이 억압적 통치 방식 때문에 곧 미국의 지지를 잃을 수도 있다고 암시했다. 1985년 8월 21일, 이 CIA 국가정보관은 "그(전두환)가 만약 본능에 따라 비판 세력을 향해 불필요하게 가혹한 전술을 쓴다면 미국과 충돌하게 될 것은 당연지사다. 미국은 이미 전두환 정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계획된 대안들을 고려하기 시작했다"고 적었다.

이 CIA 국가정보관은 이어 "많은 한국인들이 전두환 정권을 불법적인 것으로 본다. 그가 권력을 장악한 방식과 광주 사태를 다룬 방식 때문이다"라고 덧붙였다. 1987년 6월에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있은 뒤 CIA는 전두환의 광주 살인 진압이 다수 한국인들에게 전두환의 군대가 북한보다 더 큰 위협이라고 여기게 만들었다고 자국 정부에 보고했다.

CIA 정보실(Directorate of Intelligence·DI)은 정보 평가보고서(한국군: 정치적 역할 변하나?)에서 "군의 이미지가 실추되면서 - 매우 평판 나쁜 전두환 정권과 1980년 군대가 광주 폭동(riots in Kwangju)을 잔인하게 진압한 점이 밀접하게 연관된 결과 - 장교들 다수는 국민들이 자신들에게는 적대감을 키우고, 북한의 위협에 대해서는 무감각해졌다고 확신했다"고 썼다.

‘폭동(riot)’, 한국군이 늘 5·18 민주화운동을 비하하며 쓴 그 경멸 섞인 용어는 CIA 보고서 도처에 등장한다. 이는 당시 CIA가 한국 민주화 흐름에서 결정적 국면이 되는 광주항쟁(uprising)의 본질적 의미를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드러낸다.

앞서 언급한 문서들은 ‘크레스트’(CIA REcords Search Tool·CREST)라 불리는 CIA 기밀해제 문서 데이터베이스에서 발굴됐다. CREST는 1995년 미 대통령 행정명령에 근거해 2006년 처음 설치됐다. 그러나 처음에는 미국 메릴랜드주 칼리지파크에 있는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 NARA)의 몇 대 안 되는 컴퓨터 단말기에서만 이용할 수 있었다. 2017년 공익단체 먹락(MuckRock)이 소송을 제기한 뒤에야 크레스트는 온라인에 연결됐고, 이제는 인터넷에서도 제약 없이 검색이 가능하다. 미국의 다른 정부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CIA도 문서가 생산된 지 25년이 지나면 기밀 해제를 위해 문서를 검토해야 한다. 그러나 CIA는 국가 안보 상의 사유로 문서의 일부를 ‘삭제(redact)'하거나 검열할 수도 있다. 뉴스타파가 검토한 많은 문서들도 검게 처리된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CIA 문서들은 전두환이 광주 유혈참사(the bloodshed in Gwangju) 책임을 극구 부인하던 시기에 그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CIA 문서들은 또 다른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80년 당시 CIA는 CIA 한국지부장 로버트 브루스터를 통해서 미국의 한국 관련 의사 결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브루스터는 당시 주한미국대사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미군사령관 존 위컴과 더불어 전두환과 및 한국군 수뇌부와 정기적으로 접촉한 미국 관리 3인방 가운데 한 명이었다.

필자가 미국 정보공개법을 통해 2006년 입수한 문건을 보면 CIA는 1980년 5월 22일자 일급 비밀 보고서에서 "광주 반란(the insurrection in Kwangju)은 계엄사령부의 권위에 심각한 도전을 제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CIA는 또 군부가 "(광주 시민과) 휴전을 위해 협상을 시도하고 있”지만 “반란(the rebellion)을 종결시키려면 아마도 무력을 사용해야만 할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당시 백악관 고위급 회의에는 터너 CIA 국장도 참석했다. 필자는 1996년 최초로 이 회의 내용을 공개했는데 당시 입수한 비밀 회의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향후 광범위한 무질서의 씨를 방치하기보다는 불가피한 무력을 최소한으로 사용해 한국 정부가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는 점에 전반적인 합의가 있었다." 회의록은 또 "일단 질서가 회복되고 나면 더 높은 수준의 정치적 자유가 진전을 이루도록 우리는 한국 정부와 특히 군을 압박해야만 한다는 합의도 이뤘다"고 덧붙인다. 카터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태도가 미국의 입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단기 지원, 정치적 진화를 위한 장기 압박."

▲1980년 5월 22일 백악관에서 열린 미국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회의록은 "단기 지원, 정치적 진화를 위한 장기 압박"이라는 당시 미국 정부의 입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출처: Cherokee Files)

그러나 뉴스타파가 새로 발굴해 분석한 CIA 문서들을 보면 CIA는 당시 합의된 미국의 입장이 정당화되기 어려울뿐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이익을 해칠 수 있다고 인식한 것이 분명하다. 다른 문서들은 CIA가 1980년대 전두환과 남한 군부에 대한 북한 정책과 행동의 영향을 판단하는 데 몰두했음을 보여준다.

1987년 11월 벌어진 이른바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 사건’에 대한 CIA 보고서 2건은 놀랍다. 1987년과 1988년 작성된 이 보고서들은 전두환 정권 기간 CIA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이 문서들은 미 정보요원들이 북한 공작원으로 지목된 김현희(일본명 하치야 마유미)의 초기 심문에 깊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 CIA가 이 사건이 김현희의 소행이라는 한국 정보기관의 주장에 대해 반신반의했다는 점도 파악된다. 김현희 심문 당시 CIA의 역할은 이제껏 밝혀진 적이 없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 다시 다룬다.

이제 전두환 관련 CIA 문서들을 연대순으로 분석해본다.

“국가정보위원회 ‘경고회의(Warning Meeting)’ 안건”-국가정보국장, 1980.6.6

CIA 경고 담당 국가정보관 대행이 보낸 이 문서는 미 국가정보위원회(National Intelligence Council·NIC)의 주간 “경고회의(Warning Meeting)” 용으로 작성된 분석 자료다. 이 문서는 5·18의 피비린내 나는 여파 속에서 CIA는 1979년과 1980년 전두환의 연쇄 쿠데타(rolling coup)의 목적이 박정희 ‘유신 체제’의 현상 유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당연히 그것은 1979년 10월 26일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한 후 격동의 수 개월 동안 대다수 한국인들이 공유한 인식이었다.

NIC는 "전두환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체제의 근간을 영구화하려는 의도를 보이고 있으며, 그가 정치 자유화라는 허울뿐인 제스처만 보여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대중의 인식이다"라고 적었다. 더불어 CIA는 전두환의 정책이 "추가적인 폭동을 부를 수 있는 심각한 위험"을 수반하고, 한국군의 결속을 위태롭게 한다고 우려했다.

▲미 국가정보위원회(NIC)는 주간회의에서 한국 대중들은 전두환이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 체제 근간을 영구화하고 자유화를 위해서는 허울뿐인 제스처만을 취할 것으로 보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출처: CIA)

문건은 또 무력하고 군부의 허수아비로 잘 알려진 최규하 대통령이 1980년 5월 초 민주화 시위에 대한 군사 진압이 "한미동맹을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한 것으로 전해졌다”고 언급했다. 이 문서는 CIA 요원들이 한국 중앙정보부(중정) 측과 폭넓은 의견 교환을 이루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보고서를 보면 “중정 고위 관계자들”은 전두환이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자 “시위 사태를 진정시키기보다 혼란을 가중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나 이후 중정은 전두환 군부의 무력 진압 때 체포된 학생과 활동가들을 감금하고 고문했다.

이 문서의 상당 부분은 1980년 남한의 격변기에 북한의 의중을 분석한 내용이다. 문서에 따르면 CIA 분석관들은 김일성이 “서울 정권을 겨냥한 무력 도발 임무로써” 전두환 암살, 특수부대 남파를 시도하는 등 “위험한 행동에 사활을 건 도박을 벌일” 수도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CIA는 김일성이 "이승만 정부를 무너뜨린 1960~1961년의 혼란상을 이용하지 못했던 교훈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북한이 이 같은 극단적 수단을 선택할 유일한 조건은 남한이 "무질서와 실질적인 내전 상황에 빠져야 한다. 말하자면, 한국군의 지휘 계통과 군율이 붕괴되는 것"이라고 CIA는 결론 지었다. 즉, 향후 북한군이 개입할 가능성이 극히 적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만 이 보고서는 현재도 한국 우익 일각에서 주장하는 ‘북한군 5·18 광주 침투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한국: 커가는 전두환의 정치적 자신감”-국가정보위 동아시아 분석실 정보평가, 1983.6

5·18 광주항쟁이 일어난 지 3년이 지나자 CIA는 전두환의 장래를 낙관적으로 봤다. 이 CIA 문서는 1983년 5월 시점의 전두환 재임 기록을 평가하면서 "전반적인 안정을 이끌고, 경제성장률을 5~6 퍼센트대로 끌어올렸으며 미국, 일본과의 유대 관계를 강화했다"며 “상당한 진전"이라고 높이 샀다.

CIA는 전두환이 “카리스마도, 인기도 없는 지도자”라고 인식했다. 매우 절제한 표현이다. CIA는 "허나 그는 경제, 국제부문 성과에 대해서만큼은 대다수 한국인에게 적어도 마지 못한 존경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나 CIA가 한국 국민을 얼마나 이해하지 못했는지 보여주는 징후도 나타난다. CIA 분석관들은 전두환이 “노동계와 유대를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대목이다. 전두환과 그의 보안부대가 무자비하게 탄압했던 그 노동계 말이다.

“한국: 전두환, 이제 어디로 가는가?”-CIA 한국지부, 1985.2.22

1985년, 미국 정부는 전두환이 김대중의 귀국을 어떻게 다룰지 면밀히 지켜보고 있었다. 또 국회에서 수적으로 열세인 야당의 첫 저항을 주시하고 있었다. CIA는 1985년 2월부터 공식 정보보고서에서 일련의 사건들 때문에 "쉽사리 비껴가지 않을 정치 개혁의 요구가 커졌다"고 말했다. CIA는 전두환이 "자신 역량이 정국의 전개 방향을 설정하기에는 명백히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CIA는 전두환에 대한 군 내 지지가 확고하다는 데 만족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이익에는 긍정적인 상황이라고 본 것이다.

CIA 정보실은 보고서에서 "육군 고위 장교들의 전두환 지지가 심각할 정도로 흔들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말한다. 또 "이는 군부에 대한 전두환의 배려, 한미 안보관계 강화 성공, 육군 장교단 핵심층과의 끈끈한 유대, 그리고 충성스러운 후배들을 주요 지휘관직에 배치한 점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고 분석했다. 이 다음 몇 문장은 삭제돼 있다. 아마도 CIA가 군 내부에서 전두환의 심복들에 대한 민감한 정보를 얻기 위해 활용한 “정보원과 수단”을 감추기 위해서일 것이다.

전두환과 군부 결속을 낙관적으로 보면서도 CIA는 여전히 5·18 진압이 전두환의 정치적 장래와 한미 관계에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 상당히 우려했다. 보고서는 마지막에 전두환의 정치적 입지에 대한 “잠재적 위협”을 다루고 있는데 광주가 두 번째로 나온다. 첫 번째는 '대규모 가두 시위'의 가능성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가 가장 중요하다. "향후 야당이 1980년 광주 사태와 전두환 정권의 정당성에 정면 도전하는 쟁점을 다루는 국회 토론을 열려고 시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뒤이어 CIA는 전두환이 무력 진압에 나설 수도 있다는 불길한 예측을 내놓는다.

우리(CIA 한국지부) 관점에서 만일 전두환이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육군에 도움을 청해야만 할 상황에 이른다면, 고위 장교들은 자신들 중 하나가 전두환의 자리를 대신 차지할 그 어느 때보다도 좋은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CIA는 분명 한국 육군과 정보기관 내에 고위급 정보원을 두고 있었을 것이다.

“한국: 전두환의 외줄타기”-CIA 국가정보관/동아시아 분석국, 1985.8.21

불과 여섯 달 뒤 CIA 동아시아 담당 최고위 분석관들은 전두환에 대한 모든 낙관론을 잃었다. 이제는 전두환의 시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고 솔직히 말하고 있었다. 이들의 보고서는 바로 이렇게 시작한다.

그(전두환)가 만약 본능에 따라 비판 세력에 불필요하게 가혹한 전술을 쓴다면 미국과 충돌하게 될 것은 당연지사다. 미국은 이미 전두환 정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계획된 옵션들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필자가 1985년 워싱턴 주재 기자로 일할 때 정부 관료들이 개인적으로 들려준 전두환에 대한 회의적인 의견이 기억난다. 그러나 그때는 전두환에 대한 분노가 이 문서에 나타난 것처럼 이토록 깊은 줄은 상상도 못 했다. CIA에 따르면 당시 “일부 국무부 관리들은 이미 미국이 개입해서 전두환을 압박하고, (전 정권의) 현 정책을 누그러뜨려야 한다는 입장을 지지하고 있었다.” 즉, 미국 외교관들과 정보요원들의 판단이 일치했다는 얘기다.

다시 강조하자면, 전두환의 가장 큰 취약점은 5년 전 광주에서 저지른 진압이었다. CIA는 보고서에서 "많은 한국인들은 전두환 정권이 불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가 정권을 잡은 방식과 광주 사태를 다룬 방식 때문이다"라고 결론 지었다. CIA에 따르면 전두환은 “그의 ‘천명(Mandate of Heaven)’을 지키려고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었다.

“한국군: 정치적 역할 변화?”-CIA 정보 평가 비밀보고서, 1987.11

1987년 6월 대규모 민주화 시위의 결과로 전두환은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수십 년 군부독재를 꾀했던 전두환의 야욕은 꺾였다. 그로부터 넉 달 뒤 CIA는 이 보고서를 작성한다. 1987년 11월 무렵 미국의 관심은 한 달 뒤에 치러질 한국 대통령 선거에 쏠렸다. 이에 따른 정권 변화에 군부와 대중이 어떻게 반응할지, 그리고 대선 결과가 미국의 군사·정치적 이해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대선을 겨우 17일 앞둔 11월 29일 북한이 연루된 ‘KAL기 폭파 사건’이 터졌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아래에서 들여다 볼 CIA 보고서가 작성된 지 불과 며칠 만에 벌어진 사건이다.

▲ 1987년 12월 15일 오후, 김포공항을 통해 서울로 압송된 김현희

CIA의 1987년 11월 평가보고서는 전두환 정권 시기 군부를 깊이 이해하게 해준다. 또 1987년 대선 기간 중 또는 이후 군부가 계엄령을 선포할 수 있는 요인을 밝히고 있다. 보고서를 보면 CIA는 당시 한국군 고위 장성과 장교들이 대중뿐 아니라 군부 내 일각에서도 "북한의 위협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한다. 그리고 한반도 내 미국의 영향력을 고려하던 CIA의 머릿속에서는 또 다시 5·18 광주 학살과 항쟁이 커다란 의미로 자리잡게 됐다.

“광주의 유산”이라는 소제목이 붙은 단락에서 CIA는 5·18 학살로 인해 한국군과 미국이 입은 엄청난 이미지 손상에 대해 놀랍게도 인정하고 있다. 이 단락에서 CIA는 학생들과 노동계의 불만과 동요가 고조되는 경우 등 또 다른 군사 쿠데타가 벌어질 수 있는 여러 시나리오를 예측하고 있다. 이러한 예측에 따라 CIA는 김대중이 대선에서 승리하면 군부의 국내 정치 개입을 촉발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게 분명하다.

그렇기에 곧 닥칠 KAL기 사건을 중요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87년 11월 CIA 보고서를 보면 한국군 정보당국이 이른바 ‘북풍’ 사건을 조작하려는 동기를 강하게 갖고 있었던 게 아닌지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추가적인 탄압을 정당화하거나, 임박한 대선에서 국민들이 군부의 후보자, 노태우를 선택하도록 납득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비밀 보고서 여러 장이 아예 삭제된 채 공개된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 보고서의 핵심은 아래와 같다.

-CIA는 또 다른 쿠데타를 경계했다. "군 장교들이 과거에 국내 소요와 북한의 위협을 끌어 대어 두 차례 중대한 시점에 군사 개입을 정당화했다. 그러한 사실은 그들이 또 한 번 그럴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하게 한다." 그러나 "한국 정세가 다시 또 1961년 또는 1980년 규모로 군사 개입의 씨를 품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광주 5·18 민주화운동은 한국인들이 북한을 덜 두려워하게 된 주요 요인이었다. “군의 이미지가 실추되면서 - 매우 평판 나쁜 전두환 정권과 1980년 군대가 광주 폭동을 잔인하게 진압한 점이 밀접하게 연관된 결과 - 많은 장교들은 국민들이 자신들에게는 적대감을 키우게 됐고, 북한의 위협에 대해서는 안일해졌다고 확신했다.” ‘폭동’, 신군부가 한결같이 5·18을 비하하던 그 경멸의 말은 CIA 보고서 전반에 등장한다.

▲1987년 CIA 보고서에는 한국 장교들이 국민들이 자신들에게는 적대감을 갖고 북한의 위협에 대해서는 안일할 정도로 전두환 정권을 부정적으로 본다고 느끼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출처: CIA)

-광주항쟁 이후 7년에 걸쳐 CIA는 미국이 전두환의 5·18 진압을 지지했기 때문에 한국 국민들이 미국에 반감을 갖고 있다는 점을 미국 정부에 상기시키고 있었다. "광주 시민 대부분이 정부와 군은 물론 미국에도 반감을 갖고 있다. 전두환이 한미연합사령부 소속인 20사단의 병력을 동원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이 같은 사실을 자국 국민들도 알 수 없도록 주도면밀하게 숨겼다. 1980년 자신들의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말이다.

-‘김대중 당선’ 가능성은 군부가 국내 정치에 개입할 명분을 품게 했을 하나의 유력한 시나리오였을 것이다. "... 군부는 특히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면 1971년 대선 때 내세운 공약(평화통일론, 국방예산 삭감 등)과 비슷한 정책을 도입할지 모른다는 점을 우려했다.

-북한과의 긴장 완화를 추구하는 조치는 군부가 정치에 개입할 명분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CIA는 판단했다. "우리(CIA)의 견해로는 남북간 지속 가능한 협정 - 예컨대 적극적인 대화의 진전, 군사적 긴장 완화, 경제·문화 교류 합의 - 이 이뤄지면 군부가 정치 개입을 목적으로 국가 안보를 근거 삼는 일이 어려워질 것이다." 다시 말해, 북한 위협설을 어느 때보다 세게 유지하는 게 당시 군부에는 이익이었다.

이 같은 결론은 1987년 11월 KAL기 폭파 사건을 다룬 마지막 2건의 문서를 보면 더욱 의미가 커진다.

“북한: KAL기 폭파 사건의 책임”-CIA 테러리즘 리뷰, 1988.2.11

이 보고서는 1987년 11월 29일 KAL 858기 폭파 사건의 배후가 북한일 것이라고 판단한 CIA의 첫 보고서다. 또 CIA가 한국의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와 얼마나 깊이 얽혀 있었는지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CIA 자체가 KAL기 사건 용의자 심문에 관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보고서의 결론은 기묘하다. (보고서에 따르면 “마유미(김현희)는 미국 관리들과의 면담에서 1980년부터 북한 대외정보조사부 소속 공작원이었다고 인정했다.”)

이 보고서는 사건 용의자인 김현희와 동료 김승일(일본명 하치야 신이치)이 돌이킬 수 없는 비행에 나서기 전 며칠 동안 미 정보당국이 이들의 행적을 추적했을지도 모른다는 증거가 들어 있다. 다만 곳곳이 삭제 처리돼 있다. 요약하자면 보고서는 "우리(CIA)는 이번 폭파 사건이 (서울 올림픽) 대회 출전자 및 참석자들의 안전을 보장해야 할 한국의 역량에 대해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작전의 일환으로 나온 첫 번째 사건이라 판단한다"고 결론 짓는다. 보고서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삭제된 부분은 용의자들의 "북한 정보기관과의 연계" 혐의와 그들의 물리적인 이동 경로와 관련 있다.

▲미 정보당국은 비밀문서에서 1987년 KAL 858기 폭파 사건이 서울올림픽 대회 출전자와 참석자들의 안전을 보장할 한국의 역량에 대해 의구심을 일으키키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판단했다.(출처: CIA)

이 문서는 지난 3월 보도된 KAL기 사건 관련 전두환 정권의 대응에 관한 한국 언론기사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의미가 깊다. 3월 31일 뉴스타파를 비롯한 한국 언론매체들은 전두환 정권이 1987년 대선을 앞두고 KAL기 사건을 정치 공작에 이용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기밀 해제된 외교 문서에 따르면 당시 전두환 정부는 12월 16일 대통령 선거 전까지 김현희를 한국으로 압송해오려고 했다.

외교 전문을 보면 김현희가 체포된 바레인에 특사로 파견된 박수길 당시 외무부 차관보가 12월 10일 “(김현희가) 늦더라도 (대선 전날인) 15일까지 서울에 도착하기 위해서는 12일까지는 바레인으로부터 인도 통고를 받아야 한다”고 상부에 보고한 사실이 확인된다. 김현희가 김포공항에서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압송된 다음 날, 민정당 노태우는 양김 후보를 제치고 대선 승리를 거뒀다. CIA 기밀 해제 문서를 보면 CIA는 이 사건이 1987-1988년 한국에서 정치적으로 폭발성을 발휘할 사건이라는 걸 알고선 더 잘 통제하기 위해, 김현희의 체포 과정에서부터 일찍이 개입했을 수 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해당 CIA 문서의 요점은 아래와 같다.

-CIA는 김현희를 접견해 면담했다. 또 안기부가 KAL기 폭파에 김현희가 가담했다고 결론 내리는 데에도 CIA가 관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CIA는 이렇게 쓰고 있다. “범인들은 명백히 북한 정보기관과 연관돼 있다. 김현희와 직접 말해보거나 목소리를 들은 영-한 언어 원어민 전문가들은 김현희가 민족적으로 북한 사람이라는 데 이의 없이 동의한다.”

-CIA는 국가안보국(National Security Agency·NSA) 같은 미국의 다른 정보기관의 도움을 받았기에 김현희 일당의 범행 전 행적을 역추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CIA는 보고서 '작전 일정표' 섹션에서 "우리는 마유미(김현희)가 자신의 파트너(김승일)와 임무 도중 택했다고 밝힌 우회 경로의 일부를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힌다. 이는 NSA가 금융거래 내역을 추적하기 위해 신호정보를 수집(Signals Intelligence·SIGINT)했을 뿐 아니라 영상·지도정보수집(Imagery and Mapping Intelligence) 기술도 사용했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보고서의 한 섹션은 1987년 11월 말 김현희가 모스크바에서 부다페스트를 거쳐 베오그라드(옛 유고슬라비아·현 세르비아 수도)로 간 경로를 서술한다. CIA의 정보원과 정보수집 방식을 밝혀놓았을 가능성이 있는 단락은 삭제돼 있다.

-CIA의 결론은 과학수사적 증거보다는 북한의 과거 행태에 더 근거를 둔 것으로 보인다. CIA는 KAL기 사건에 대해 "인간의 생명을 도외시하고 국제 규범을 우습게 여기는 북한의 과거 행동 방식을 따르고 있다"고 결론 지었다. 보고서는 또 김승일의 자살과 김현희의 자살 시도가 “북한 정보요원의 방식에 부합한다”고 덧붙였다.

“남북한: 항공기 폭파 자백”-CAI 국가정보 일일보고, 1988.1.7

KAL기 폭파 사건과 관련해 마지막으로 주목해야 할 문서다. CIA는 북한 “테러리스트”들이 여객기를 폭파한 책임이 있다는 한국 측 발표에 대해 격주 사전경고 보고를 한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일부 CIA 분석관들은 이러한 한국 측 결론에 대해 의심하거나 확신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보고서의 일부는 삭제돼 있다. 삭제된 정보는 아마도 정보의 출처와 입수 방법을 표시했을 것이다.

보고서의 요점은 아래와 같다.

-보고서에 따르면 CIA는 당시 KAL기 참사에 대한 한국 측 의중이 불명확했다고 봤다. 보고서는 이렇게 분석한다.

한국이 북한의 방해공작 건을 어떻게 다룰지 아직 확실치 않지만, 대중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추가 도발을 억제할 최선의 방책이라고 여기고 북한의 신뢰성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녀(김현희)의 자백을 이용할 수도 있다.

-CIA는 북한이 관련됐다면 주되게는 다가올 서울 올림픽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하기 위한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의혹 제기가 역풍을 부를 수 있다고도 판단했다.

북한의 위협을 극대화하려는 시도는 올림픽에 대한 한국의 안보 능력에 의문을 제기하는 식으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게 될 수 있다.

-CIA는 북한의 공격 동기에 대해 어느 정도 의구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북한의 동기는 여전히 불명확하다...분리된 사건으로서, 여객기 파괴는 9월 경기에 의미 있는 영향을 미치기에 너무 일찍 일어났다.

CREST 온라인 데이터베이스에는 1980년대 전두환과 한국에 관한 CIA 문서들이 더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보고서는 미국 정보기관이 자국 지도세력에게 어떤 보고를 했는지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일 뿐이다. 그렇게 보고된 내용은 상당 부분 한국 국민들이 수년 간 직접 겪고, 알고 있었던 일이다. 바로 전두환이 1979년과 1980년 두 차례 연쇄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무자비한 군부 독재자라는 사실, 그리고 그가 부패한 유신 독재 체제를 가능한 한 오래 유지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 말이다. 전두환의 시도가 결국 비참하게 실패한 것은 오롯이 한국인들의 강력한 민주화 운동 때문이었다. CIA는 유신 국가가 한국 국민의 힘으로 무너지는 것을 방관자처럼 지켜볼 뿐이었다.

취재: 팀 셔록(워싱턴 DC)
번역: 홍우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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