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의 시작과 끝...이명박근혜와 국정원
2017년 11월 29일 19시 02분
사표를 냈다. 사표가 수리되고 후임자가 왔다. 인수인계가 끝났고 신분증을 반납했다. 퇴직급여청구서도 작성해 제출했다. 그런데… 3개월 뒤 갑작스레 징계위원회에 회부됐다. 징계사유는 귀임명령 거부와 직무 무단이탈. 해임 결정이 났다. 이미 퇴직한 상태였는데 해임 징계를 받은 것이다. 해임 징계를 취소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법원은 징계가 무효라고 판결했다. 그러자 회사는 해임된 날짜에 의원면직된 것으로 다시 인사발령을 냈다. 다시 인사발령 무효 소송을 냈다. 이번에도 법원은 이미 실질적으로 의원면직이 이뤄진 상태였으므로 나중에 내린 의원면직 인사발령은 처분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인사발령의 효력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해임도 효력이 없고 의원면직 인사발령도 효력이 없다. 회사는 처음 사표를 냈을 때 수리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직원은 현직 상태인가? 퇴직 상태인가? 그렇게 법적공방 5년을 포함해 11년이 흘렀다. 회사는 아직도 답이 없다. |
11년에 걸쳐 얽히고 섥힌 이 이야기는 황 씨가 국정원 내부 비리를 고발한 뒤부터 시작된다.
해외정보요원 황 씨는 지난 2006년 이스라엘 주재 한국대사관에 파견됐다.
황 씨가 살 집은 전임자였던 이 모 씨가 월 2천5백 달러에 3년치를 이미 계약해 놓은 상태였다. 주택임차료는 외교부 예산으로 지급되는 돈이다. 지은 지 20년이 넘은 낡은 아파트인데도 월세가 너무 비쌌다. 알고보니 월 5백 달러씩 총 1만8천 달러를 전임자 이 씨가 집수리비 명목으로 챙겨간 상태였다.
2007년 4월 2일.
황 씨는 전임자의 횡령을 국정원 본부에 보고했다. 돌아온 답은 “둘 사이의 문제이니 알아서 원만히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간단히 처리될 줄 알았던 문제는 이상하게 전개됐다. 국정원은 대리 작성한 고소장을 황 씨에게 보내주며 전임자 이 씨를 고소하라고 압박했다. 당시 이스라엘 현지 언론에 이 횡령사건이 알려지자 파견 직원의 외교부 예산 횡령 사건을 개인 간의 분쟁으로 만들어 책임을 모면하려는 국정원의 꼼수였다. 문제가 커지자 전임자 이 씨는 한달여 후에 권고사직했다. 하지만 국정원에서 어떠한 징계도 받지 않았다.
2007년 8월 1일.
국정원이 내부고발자인 자신을 공범으로 몰아가는 분위기가 감지되자 황 씨는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끝에 사표를 제출했다. 그리고 국민권익위원회(당시 국가청렴위)에 국정원의 내부고발 축소은폐 의혹을 신고했다. (전임자 이 씨는 결국 횡령 혐의로 2008년 징역 6개월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았다.) 국정원은 황 씨에게 현지 사직은 불가능하다며 귀국해서 사직 절차를 밟으라고 종용했다.
2007년 9월 7일.
외교통상부는 9월 5일자로 국정원에서 사직허가가 났다며 외교관 신분을 소멸하고 외교관 여권을 회수하겠다는 공문을 보내왔다.
이후 후임자가 배속됐고 퇴직급여청구서를 작성해 제출했다. 공무원이 아닌 민간인 신분이 된 것이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록 퇴직금이 지급되지 않았다. 11월 어느 날, 황 씨는 후임자에게 왜 퇴직금이 나오지 않는지 알아봐달라고 부탁했고, 본부를 통해 알아본 후임자는 이렇게 말했다.
퇴직 상태가 아니라는데요. 자세한 것은 모르겠습니다.
사직이 수리돼서 행정절차도 다 마쳤고, 퇴직 후에 급여도 지급되지 않았는데 퇴직이 아니라니?
2007년 12월 4일.
국정원은 황 씨를 고등징계위에 회부했다. 징계위는 12월 18일, 귀임명령 거부와 직무무단 이탈을 사유로 황 씨를 해임했다.
국정원은 황 씨를 12월 26일 자로 해임한다는 인사명령을 내고 퇴직금과 공무원 연금을 일시불로 지급했다. 지급하지 않았던 3개월치 급여도 이 때 함께 지급했다. 기조실과 해외정보국은 그동안 황 씨의 급여를 개인 계좌로 지급하지 않고 따로 빼내 보관해 놓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의원면직된 줄 알았는데 난데없이 해임조치가 이뤄진 것이다.
2010년 6월 8일.
황 씨는 2년 여에 걸친 소송 끝에 국정원의 해임 징계는 무효라는 확정 판결을 받았다.
그러자 원세훈 국정원장은 황 씨를 2007년 12월 26일부로 의원면직한다는 인사명령을 소급해서 냈다. 날짜는 그대로 두고 해임을 의원면직으로 말만 바꾼 것이다.
그러나 행정법원은 이 인사명령 역시 적법한 처분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의원면직 처분은 이미 9월 5일에 이뤄진 것으로 봐야한다는 것이다.
법원은 그 근거로 황 씨의 퇴직 신청 이후 국정원이 퇴직 관련 서류를 제출받은 점, 국정원이 외교통상부로 사직 허가를 통보한 점, 2007년 9월 5일 이후로 황 씨에게 급여를 지급하지 않았고 업무상 연락도 하지 않은 점을 근거로 들었다.
즉 해임 징계도 무효이고, 해임날짜에 맞춰서 낸 의원면직 인사명령도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법원의 판결을 따른다면 길은 2가지다.
첫번째는 국정원이 황 씨의 사직서 제출 시점에 맞춰 2007년 9월 5일부로 의원면직 처분을 내리는 것이다. 법원은 2007년 9월 5일이 의원면직된 시점이라고 보고 있는데 이에 관한 국정원의 인사명령은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황 씨를 즉각 복직시키는 것이다. 국정원이 내린 해임 결정은 물론이고 의원면직 결정도 공식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황 씨는 현직 신분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국정원은 새로운 처분을 내려야한다. 황 씨도 법원 결정에 따른 처분을 내려줄 것을 국정원에 수없이 요청했다.
그 사이 정부는 MB정부에서 박근혜 정부로, 다시 문재인 정부로 바뀌었다.
그동안 황 씨는 공사현장 노동자로, 마을버스 기사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전전하며 가족 4명의 생계를 책임져야했다. 퇴직금은 오랜 송사로 모두 써버렸고 애매한 신분 때문에 정규직 일자리는 꿈도 꾸지 못했다.
황 씨는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캠프에서 공익제보지원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국정원의 적폐 청산과 개혁을 핵심 공약 가운데 하나로 내건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 자신의 억울함도 풀릴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달라진 것은 없다.
국정원은 황 씨가 사직서를 냈을 때 수리하지 않았다. 수리했다면 징계위원회에서 해임을 결정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외교통상부 공문에는 “국정원이 황 씨의 사직을 허가했다고 알려왔다”는 표현이 나온다. 확인해보니 국정원은 사직을 허가했다는 공문을 외교통상부에 보낸 적이 없다. 국정원이 외통부에 보낸 공문은 외교관 신분 소멸 조치 요청 공문이었다.
당시 황 씨가 근무했던 해외정보파트의 담당 차장(1차장)이었던 이수혁 현 민주당 의원은 뉴스타파와의 통화에서 “이스라엘 파견 직원이 문제가 됐었다는 사실은 기억이 나지만 어떻게 처리됐는지는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나질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본다면 국정원에서 외교부에 보낸 공문은 의원면직 수리 공문이 아니라 외교관 신분 말소를 위한 공문을 보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그 정도 사안은 국장과 인사과 선에서 협조해 이뤄질 수 있는 사안”이라고 얘기했다.
이 의원의 설명대로 당시 국정원이 보낸 공문(위)은 외교관 신분 소멸 조치 요청이었다.
그러데 왜 외통부 공문에는 ‘국정원의 사직 허가’라는 문구가 들어간 것일까?
당시 공문을 작성한 외통부 직원 임 모씨는 황 씨와의 통화에서 국정원 해외정보국 소속 연락관으로부터 사직이 허가됐다는 통보를 받았다고 증언했다.
외교관 신분을 소멸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공문에 근거가 빠져 있어 전화로 물어보니 국정원 측에서 ‘현지 사직이 허가됐다’고 알려줘서 공문에 포함시켰다는 것이다.
당시 외통부 직원 임 씨와 통화했던 국정원의 이 모 연락관은 황 씨에게 “외통부 직원에게 사직이 허가됐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외통부에서 과대해석해서 공문에 포함시킨 것”이라고 해명했다.
황 씨는 국정원이 자신을 내쫓기 위해 공작을 펼친 것으로 보고 있다. 외교부까지 관련된 오랜 관행을 문제 삼고 횡령 사실이 이스라엘 일간지에 보도되는 등 문제가 확산되자 자신을 좋게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당시 황 씨가 속했던 해외정보파트의 담당 국장은 전옥현 현 자유한국당 서초갑 당협위원장이다. 전 위원장은 MB정부 들어 국정원 해외 1차장을 지냈다.
전 위원장은 뉴스타파와의 통화에서 “외통부에 보낸 공문의 문구나 세부적인 행정절차는 국장이 일일이 알지 못한다”면서 “밑에 있는 단장이나 정보국에 속해있는 행정과에서 처리하기 때문에 국장인 자신은 알지 못한다”고 해명했다. 또 “사직수리가 되지 않았는데도 퇴직급여청구서를 작성하게 하고 급여를 지급하지 않은 문제도 단장이나 행정과 선에서 처리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전 위원장은 또 “당시 황 씨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도록 최대한 기다려서 처리하고 나중을 위해서라도 서류 등의 근거는 확실하게 작성해 보존하라고 지시했다”면서 “황 씨가 징계를 받고 힘든 시간을 보낸 것은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일처리에 있어 잘못한 것은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황 씨는 “당시 자신의 문제는 해외정보파트에서 상당히 큰 문제였다”면서 “해직 공작은 해외정보국과 감찰실, 기조실의 총무과와 인사과 등이 한 몸으로 움직여서 나온 결과”라고 주장했다.
당시 국정원 인사과장으로서 징계위원회에 간사로 참여했던 김병기 현 민주당 의원 측은 “징계는 해당부서에서 비위사실을 감찰실에 보고하면 감찰실에서 징계위 회부를 결정하게 된다”면서 “인사과는 징계위원회의 회의록 작성 등 전후 실무 행정절차만 진행할 뿐인데 해임과정에 인사과장이 관여했다는 것은 맞지 않는 주장”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지난 1월 하순쯤, 국정원의 기조실 직원이 황 씨를 찾아와 면담하고 돌아갔다.
국정원 측은 황 씨를 복직시키고 싶지만 법원 판결이 부담된다고 전했다. 법원이 2007년 9월 5일을 의원면직 시점이라고 판단하고 있어서 이와 배치되는 복직 명령을 내기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9월 5일을 의원면직 시점으로 인사명령을 내는 것도 국정원으로선 곤혹스러운 일이다.
의원면직 시점을 2007년 9월 5일로 되돌리면 그 후 12월에 벌어진 국정원 징계위의 해임 결정은 사기극이 돼 버린다. 의원면직된 직원을 다시 해임한 셈이 되기 때문이다.
잘못된 징계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하고 국정원과 당시 간부들은 민형사상 책임을 져야한다.
황 씨 사건을 맡았던 장유식 변호사는 “원칙적으로 따지면 지금이라도 의원면직을 신청했던 2007년 9월 5일 퇴직한 것으로 처리하는 것이 가장 공정한 방법이지만 그럴 경우 이후의 징계 결정이 문제가 될 것이고, 황 씨가 그동안 겪은 피해를 생각하면 복직시켜 명예를 회복시켜준 뒤 퇴직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수 있을테지만 그럴 경우 형평성 문제가 생겨서 국정원이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황규한 씨 부부는 인사명령이든 복직이든 그동안 요구했던 조속한 인사처분과 함께 국정원의 진정어린 사과를 바라고 있다. 중동전문가로서 사지의 분쟁지역을 넘나들며 20년 젊음을 국가를 위해 바친 베테랑 정보요원에게 국가는 너무나 큰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서훈 원장 체제의 국정원은 더 늦기 전에 증명해보일 수 있을까?
국정원의 대선개입 댓글사건을 외부로 알린 내부고발자 직원을 ‘조직을 팔아먹은 파렴치한 배신자’로 낙인찍었던 지난 정부의 국정원과 다르다는 것을.
취재: 최기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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