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소비자

즉시연금사태 : 또다시 가동된 보험사의 '탈출 마술'

2018년 08월 16일 10시 16분

알토란 같은 목돈을 맡길 투자처를 찾지 못하셨다고요? 제가 솔깃한 제안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 상품은 ‘연금’보험 상품입니다. 같은 이자 수익을 본다고 해도 ‘투자’ 상품이라고 하면 아무래도 거부감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대신 연금이라고 하면 위험 부담도 덜하고, 남 보기에도 훨씬 점잖아 보이지 않습니까?

가입 조건도 더할 나위없습니다. 남들처럼 10년, 20년 보험료를 부을 필요가 없습니다. 목돈을 납입한 다음달부터 바로 연금이 지급됩니다. 정해놓은 계약기간이 끝나면 납입한 보험료는 고스란히 돌려드립니다.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요즘이잖아요. 이 상품은 안정적입니다. 최저보증이율이 있어서 일정 수준 이상의 연금이 보장됩니다. 요즘 공시이율 아시죠? 4.5~4.9% 수준입니다. 원금을 보장하면서 안정적으로 이만한 수익 볼 수 있는 상품 없습니다.

사실 이 상품의 알짜배기 혜택은 따로 있습니다. 남모르는 세금 걱정, 상속 걱정 많으시죠?  이 상품 가입해서 발생하는 수익은 전액 비과세, 세금이 한푼도 붙지 않습니다. 상속형 상품으로 가입해 두시면 나중에 상속세 부담도 덜 수 있습니다.

얼마까지 넣을 수 있냐고요? 놀라지 마세요, 상한선 없습니다. 납입한 보험료가 많으면 많을 수록 돌려받는 수익이 커집니다. 요즘 강남부자들이 건물 팔아 즉시연금 가입한다는 얘기 못들으셨나요? 정부에서 내년이면 비과세 혜택을 없앤다하니 서둘러 가입하세요.  

연금도 받고, 원금도 보장되고...2012년 ‘즉시연금’ 광풍

솔깃하시죠? 하지만 서랍에서 꺼낸 인감도장은 다시 넣어 두시기 바랍니다. 아쉽지만 6년 전 얘기입니다. 당시 판매된 ‘즉시연금보험’ 상품의 사업방법서와 언론보도를 토대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아니나다를까 당시 많은 사람들이 목돈을 들고 ‘즉시연금’을 찾았습니다. 특히 2012년 8월 정부의 세제 개편 발표가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습니다. 이듬해부터 즉시연금의 비과세 혜택을 없애겠다는 내용이 발표되자 비과세 혜택의 막차를 타려는 사람이 판매 창구에 몰렸습니다.

은행과 보험사도 때를 놓치지 않고 이른바 '절판 마케팅'에 열을 올렸습니다. 금감원은 불완전판매가 우려된다며 소비자 경보까지 발령했지만 즉시연금 광풍은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당시 금감원이 발표한 주요 7개 생명보험사의 즉시연금보험 판매 현황은 즉시연금 광풍이 어느 정도였는지 보여줍니다. 정부의 비과세 폐지 계획이 발표된 직후 한달 사이(2012.8.9~9.9), 하루 평균 334.4건의 즉시연금 신규 계약이 이뤄졌습니다. 같은 해 상반기의 하루 평균 계약건수(112.9건)의 3배 수준입니다.

즉시연금 가입금액 규모는 더 크게 늘었습니다. 상반기 하루 평균 184.4억원이었던 가입규모가 정부 발표 직후에는 하루 평균 634.1억원 수준으로 크게 늘었습니다.

즉시연금 광풍 6년, 가입자들의 운명은?

즉시연금 광풍이 분 지 6년이 지났습니다. 비과세 혜택 막차를 탄 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앞선 금감원의 통계에서 드러나 듯, 은행과 보험사는 절판 마케팅의 특수를 누렸습니다. 2012년 1월부터 9달 사이 즉시연금에 쌓인 보험료는 4조원 이상, 신규 가입건수는 2만4천 건이 넘었습니다. 최근 금감원 발표에 따르면, 즉시보험 현재 가입자 수는 16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즉시연금에 목돈을 넣은 가입자들은 연금이 지급될 때마다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습니다. 다달이 줄어드는 연금액 때문입니다. 가입 당시에 예상했던 최저보장액보다 적게 지급되는 일도 종종 생깁니다. 하지만 얼마가 적정한 연금액인지도 알 길이 없어 속앓이만 하기 일쑤입니다.  

이른바 즉시연금사태의 시발점이 된 민원인 강 모 씨도 같은 의문을 가졌습니다. 강 씨는 2012년 9월 즉시연금 광풍 속에 삼성생명의 만기환급형 즉시연금보험 상품에 가입했습니다. 가입금액은 10억원, 보험기간은 10년, 보험형태는 즉시상속형이었습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첫 연금 지급액은 305만원, 이듬해 9월까지 연금액은 이 수준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 꾸준히 연금이 줄더니 급기야 2017년 10월에는 반토막도 되지 않은 136만원이 지급됐습니다. 보험사 공시이율에 따라 연금액이 변동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납득하기 힘든 액수였습니다.

강 씨는 즉시연금을 가입할 때 보장받았던 최저보증이율(2.5% , 연복리)을 적용해 직접 계산을 해봤습니다. 아무리 공시이율이 떨어져도 208만원(사업비, 위험보험료 공제를 감안하지 않은 단순 추산치)은 지급되야 한다는 것이 강 씨의 결론이었습니다. 2017년 10월 지급액을 보면, 약 70만 원을 덜 받은 셈입니다.

약관에 없는 연금 산출법을 만드는 보험사의 '마술'

결국 강 씨는 '계약에 따라 최소 208만원의 연금을 지급하라'며 삼성생명을 상대로 금감원 금융분쟁조정위원회에 조정 신청을 했습니다. 삼성생명 측은 과소 지급은 없다며 맞섰습니다. 연금이 적어보이는 건 '상품 구조에 대한 고객의 이해가 부족한 탓'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정말 고객의 이해가 부족해서 연금액이 적어보인 것일까요? 강씨가 가입한 '삼성생명 파워즉시연금보험1종 (무배당)' 상품의 약관을 살펴봤습니다.

보장개시일로부터 만1개월 이후 계약해당일부터 연금지급개시시의 연금계약의 적립액을 기준으로 계산한 연금 월액을 보험기간동안 매월 계약해당일에 지급 (약관 제13조)

이 보험의 연금계약 순보험료에 대한 적립이율은 매월 1일 회사가 정한 공시이율로 하며, 매월 1일부터 당월 말일까지 1개월간 확정 적용합니다. (약관 제16조)

가입자가 납입한 보험료 가운데 위험보험료와 예정사업비 등을 빼고 남은 보험료를 순보험료라고 합니다. 이 순보험료에 보험사가 매달 정하는 공시이율을 계산해 그 달의 연금지급액을 정한다는 얘기입니다. 공시이율이 최저보증이율 이하로 떨어졌을 때는 최저보증이율을 적용해 연금액을 산출합니다.

약관을 통해 가입자가 알 수 있는 내용은 여기까지입니다. 어디를 찾아봐도 최저보증이율 보다 낮은 이율이 적용된 연금이 지급될 수 있다는 근거는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보험사의 마술’이 시작됩니다. 약관을 꼼꼼히 검토한 가입자조차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보험사의 비법. 가입자는 듣도 보도 못한 또 하나의 문서가 바로 그 비밀입니다.

‘보험료 및 책임준비금 산출방법서’, 줄여서 '산출방법서'라고 부릅니다. 가입자에게 제공되지 않는 보험사 내부의 문건입니다. 당연히 가입자는 내용은 물론, 존재 자체도 알 수 없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보험 가입자 강 씨의 사례에 대한 삼성생명의 설명은 간단합니다. 산출방법서에 모든 근거가 있다는 것입니다. 산출방법서에는 가입자에 지급되는 연금은 공시이율을 적용해 산출된 운용 이익에서 계약 만기시 지급할 환급금으로 쓰일 일정액(만기보험금 지급재원)을 뺀 나머지라고 되어 있습니다.

약관에는 나오지 않지만 연금 지급 이전에 차감되는 별도의 비용이 있다는 설명입니다. 연금지급액이 최저보증이율 수준 보다 적게 지급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삼성생명의 이같은 설명은 위에서 말씀드린 즉시연금 가입자 강 씨의 민원에 대한 금융분쟁조정위원회 결정문에 그대로 나와있습니다. 그 내용을 도식화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지난해 11월 금융분쟁조정위원회는 강 씨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과소지급한 연금액과 이자 일체를 지급하라고 결정했습니다. 약관만 놓고 보았을 때 최저보증이율 이상의 공시이율을 적용한 연금을 매월 지급하기로하는 계약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 위원회의 판단입니다. 삼성생명이 주장한 산출방법서의 내용은 약관에 편입되었다고 볼 근거도 없다고 봤습니다.

'약관 허가의 원죄' 금감원을 향한 기대와 우려

삼성생명이 위원회의 조정 결정은 수용하며 사태는 일단락 되는 듯 했습니다. 삼성생명은 이후 즉시연금의 약관에 '만기보험금 지급 재원을 제외하고 연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을 추가했습니다. 기존 약관이 갖고 있는 문제를 인정한 셈입니다.

하지만 이미 즉시연금에 가입되어 있는 5만5천 명 가입자(미지급금 규모 4300억 원)에 대해 어떻게 조치할 지에 대해서는 금감원과 삼성생명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금감원은 기존 약관의 문제가 드러난만큼 전체 즉시연금 가입자에 과소지급분을 일괄 지급하라는 권고했습니다. 삼성생명은 금감원의 일괄 지급 권고를 거부했습니다. 또 다른 민원인에 대해 채무부존재 민사소송을 제기하며 법적 공방을 예고한 상황입니다.

이어 지난 10일 생명보험업계 2위 보험사인 한화생명(미지급금 규모 850억 원)도 즉시연금 과소지급분을 지급하라는 금융분쟁조정위원회의 결정을 거부했습니다. 개인 민원에서 시작된 즉시연금 사태가 생보업계와 금감원의 물러설 수 없는 대결로 확대되는 양상입니다. 금감원은 즉시연금에 대한 가입자들의 소송을 지원하겠다는 방침입니다. 전체 생보사들의 즉시연금 과소지급액 규모는 약 1조 원으로 추산됩니다.

이같은 보험업계와 금감원의 충돌은 낯설지 않습니다. 3년 전 ‘자살보험금’ 사태 때도 업계와 금감원은 날선 공방을 벌였습니다.

자살보험금 사태의 쟁점 역시 약관이었습니다. 즉시연금 사태가 '없는 약관'을 적용한 것이 문제라면, 자살보험금 사태 때는 '있는 약관'을 지키지 않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보험사가 '자살 사망자에 대해서도 재해사망특약 보험금을 지급한다'는 약관이 담긴 재해사망특약 상품을 판매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가입자들은 '약관대로 보험금을 지급하라'고 요구했고, 이에 보험사는 '오표시 무효의 원칙'으로 맞섰습니다. (관련기사 : 보험의 배신① 사라진 자살보험금 100억...약관의 마술)

2001년 재해사망특약 상품 출시 이래 끊임없이 잡음을 낳던 자살보험금 사태는 2016년 대법원 판결에 가서야 실마리를 찾았습니다. 대법원은 '작성자 불이익의 원칙'에 따라 약관이 의미하는 그대로 보험사가 보험금을 지급해야한다는 판시했습니다.

시종 자살보험금 사태에 미온적이었던 금감원이 움직인 것은 대법원 판결이 나온 이후였습니다. 보험사들에 미지급 보험금과 지연이자를 일괄 지급할 것을 권고했고, 이를 따르지 않는 보험사에 대해선 중징계를 내렸습니다. 결과적으로 사태의 매듭을 짓는 역할을 했지만 후한 평가는 받지 못했습니다. 십수 년 간 문제를 방치해 오다 상황에 떠밀리듯 나선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즉시연금사태 전면에 나선 금감원을 바라보는 보험소비자들의 시선도 기대 반 우려 반입니다. '금융소비자 우선'을 내세우며 약관의 문제를 들춘 것은 환영할 일이지만, 그 이전에 문제를 뻔히 알면서도 약관을 허가해왔다는 '원죄'도 제기될 수밖에 없습니다.

제아무리 금감원이 나서도 결국 보험사가 반대하면 안된다는 전례를 남긴 것도 사태를 지켜보는 보험소비자들에겐 실망스러운 대목입니다. 자살보험금 사태 때 '약관에 나온 그대로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상식을 법적으로 확인받기 위해 걸린 시간은 16년입니다. 이제 수면 위로 오른 즉시연금사태가 법정에서 결론에 이르려면 또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릴 지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보다 강력하게 금융소비자 권익을 보호할 수 있는 새로운 독립 기구에 대한 논의, 즉 '금융감독체계 개편'이 다시 거론되는 이유입니다.

일각에선 금감원이 즉시연금사태 전면에 나선 것이 '뜬금없다' 반응도 나옵니다. 즉시연금은 특성상 '부유층을 위한 절세 상품'이라는 인식이 많습니다. 세제 혜택을 염두에 두고 즉시연금에 가입한 당사자들이 과소지급 문제에 얼마나 적극적으로 나설지도 의문입니다.

금감원 내에는 이미 약관의 문제가 드러난 민원이 산적해있습니다. 뉴스타파가 앞서 보도한 암입원보험금 문제보험사 자문의 문제가 대표적입니다. 금융소비자 보호에도 우선순위를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 보험소비자단체의 주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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