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태 대법원의 재판거래
2018년 07월 10일 19시 13분
2018년 07월 20일 11시 05분
‘사법권남용 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이 지난 5월 공개한 98개 문건에는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이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청와대와 재판 거래를 시도한 것으로 의심되는 16개 판결이 있다. 이중 박근혜 정부의 노동개혁에 기여한 판결로 △쌍용차 정리해고 사건 △KTX 승무원 사건 △콜텍 정리해고 사건 △철도노조 파업 판결이 등장한다. 이들 판결은 모두 항소심에서 노동자들이 승소했지만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됐다. KTX 13년, 콜트콜텍 12년, 쌍용차 10년. 십수년을 거리에서 투쟁하며 사법부에 일말의 희망을 걸었던 노동자들은 재판거래 의혹에 다시 한 번 좌절하고 있다. 자신들의 잃어버린 세월이, 떠나보낸 동료가 사법부의 ‘정부 협력 사례’로 이용됐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다. 해고노동자에서 재판거래 의혹의 당사자가 된 사법농단의 피해자들. 그들이 동료들에게, 세상에, 사법부에 던지는 이야기를 그들이 직접 쓴 편지로 전한다. |
지연(가명)아 잘 지내지? 여긴 무더위 때문에 다들 고생이야. 넌 잘 지내고 있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헤어진 지 벌써 3년이 다 되어가네.
나는 여전히 매주 목요일이면 퇴근길에 부산역에 가서 시민들에게 우리의 이야기를 알리고 있어. 많은 시민들이 호응을 해준 덕에 벌써 꽤 많은 분들께 서명을 받았어.
2004년, 우리 KTX 승무원으로 입사했을 때 생각나? KTX 승무원에게 지상의 스튜디어스, 준공무원 대우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회사는 철도공사로 전환된 뒤에 정규직 시켜준다고 홍보하기도 했잖아. 그저 열심히 일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입사한 지 2년쯤 됐을 때였나? 정규직으로 전환해주겠다는 회사의 약속은 거짓으로 돌아왔어. 그리고 우리 파업에 들어갔잖아. 그 렇게 시작한 파업이 이렇게 13년 째 이어질 줄이야. 그때로 돌아간다면 같은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우리 정말 열심히 살았다.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20대 청춘을 길바닥에서 보내면서, 노숙에 단식에 삭발과 고공농성까지… 정말 열심히 투쟁했어. 모두가 힘들 수밖에 없는 상황에도 불평 한마디 안 하고 항상 묵묵히 함께 한 네 모습이 특히 기억나. 더운 여름 부산역 천막에서 농성하고 단식할 때 오히려 날 걱정해주던 모습이 힘든 나에게 얼마나 위안이 되고 힘이 되었던지, 그때 고맙다고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해. 정말 고마웠어. 지연아.
1, 2심에서 우리가 이겼을때, 철도공사가 KTX여승무원을 직접고용 해야한다고 법원이 판결을 내렸을때 우리 다들 부둥켜안고 울면서 좋아했었잖아. 기억나?
그 무렵 너도 다른 승무원들과 마찬가지로 결혼하고 아기도 낳고 키우면서 행복하게 살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 부산에서 승무원모임을 할 때도 투쟁했던 이야기로 몇 시간을 수다 떨면서 웃었잖아. 그땐 그저 추억으로 남을 줄 알았지. 우리 모두 예전 일터로 돌아갈 생각하면서 대법원 판결을 애타게 기다렸을 때니까.
2015년 2월 26일. 난 이 날을 절대 못 잊을 거야. 대법원에서 파기환송하던 날.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어. 그 판결로 그동안 받았던 우리의 임금이 빚이 되어 돌아왔고 그 액수가 1인당 8,640만원이라는 사실에 몇 날 며칠 밤을 새며 울었는지 몰라. 이자까지 붙어 하루하루 빚이 늘어나는 현실이 너무 힘들었어. 그때가 투쟁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때 같아. 다들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각자 마음을 추스른다고 서로를 생각하지 못했어. 그래서 더욱 너에게 미안해. 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결혼 뒤 멀리 떨어져 지낸 너가 얼마나 큰 두려움과 불안감에 시달렸을지...
우리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거 기억나? 2016년 3월이었지. 부산에 내려올 일이 있다면서 부산역에서 1인 시위 같이 하겠다고 했잖아. 나 그날 부산역에서 널 계속 기다렸는데 끝내 넌 오지 않았고 연락도 안되더라. 이상했어, 평소에 말 없이 늦게 오는 애가 아닌데 아무 말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으니까. 다른 동료들도 네 소식을 못 들었고 며칠 뒤 전화를 했더니 없는 번호로 돼있더라고.
그러다가 너희 가족에게 듣게 된 네 죽음. 우리에게 힘들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조용히 세상을 등졌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고 힘들었어. 1달 동안은 널 생각하면서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웠고, 미안한 마음과 죄책감에 시간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이 안나. 그렇게 예뻐하던 세살 짜리 예쁜 딸을 두고 왜 하필 이런 선택을 해야만 했을까. 조금만 참고 버틸 순 없었을까. 우리 생각은 왜 해주지 않았던 걸까. 처음에는 널 원망도 했지만, 누구보다 마음 아프고 힘들었을 널 생각하니 이해할 수 있었어.
시간이 흐르면서 비로소 네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지만, 얼마 전 내 마음이 다시 요동치게 된 일이 있었어 . 사법부가 우리 대법원 판결을 갖고 청와대와 거래를 했었다는 거야. 우리 사건이 대법원이 박근혜 정부와 협력한 대표적인 사건이래. 그때 대법 판결을 두고 다들 정치적 판결이라고 의심했었잖아. 그게 사실로 드러난거야.
너무 억울했어. 그래서 우리는 그 길로 대법원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어. 대법원장의 면담을 요구 했지만 면담은 하지 못했고 아직까지 사법부는 사과 한마디 하지 않고 있어. 심지어 사법부가 재판 거래 의혹으로 수사 받고 있는 와중에 대법관들은 단체로 우리 판결에 대해 문제가 없다고 입장을 내기도 했어.
그 이야기를 듣고 너가 가장 먼저 생각날 수밖에 없었어. 그 판결로 너는 세상을 등졌고, 남은 우리는 여전히 길거리에서 천막을 치고 노숙을 하는데 누구 하나 책임을 지는 사람이 없는 거야. 우리가 마지막으로 의지하고 기댄 것이 대한민국 법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이런 상황에 사람들이 어떻게 법을 믿을 수 있을까.
지난 10년 동안 정부는 우리 이야기 단 한 마디도 듣지 않았고 사법부는 우릴 거래 수단으로 삼고. 우리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다고 우리에게 이리 가혹하게 하는지 정말 화가 나. 재판 거래 의혹이 터지기 직전에 우린 다시 서울역에 천막을 치고 농성을 시작했어.
지나가는 승무원들을 볼 때면 어쩔 수 없이 우리 예전 생각이 나더라. 24살 갓 대학을 졸업하고 들어와서 비슷한 나이 또래들과 같이 일하면서 우리 참 즐겁게 일을 했었잖아. 가끔씩 진상 승객들 때문에 힘들긴 했어도, 우리끼리 수다 떨고 맛있는 것 먹으면서 스트레스 날려버리고... 그 시간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너의 빈자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만약 대법원 판결이 달랐다면 너는 지금 우리 옆에 있을 수 있었겠지? 아마도 지금쯤은 같이 유니폼을 입고 KTX 열차안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드니 마음이 더욱 미어져.
재판 거래 의혹이 불거졌지만 회사도, 정부도 별 움직임이랄 건 없어. 문제를 좀 빨리 해결해줬으면 좋겠는 마음에 얼마 전에는 오랜만에 유니폼을 꺼내 입고 청와대로 행진도 했어. 하필이면 엄청 더울 때 행진을 해서 땀은 물흐르듯 흘렀고, 오랜만에 구두를 신어서 발은 다 까지면서도 우리 다시 한번 다짐했어. 이 싸움 포기할 수 없다고. 이렇게 많은 부분들이 잘못되었다고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데 우리가 여기서 포기하면 안되잖아.
무엇보다 아직 6살 어린 네 딸이 나중에 컸을 때 너가 세상의 부당함에 대항해 싸웠던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그래서 KTX 승무원이었다는 사실이 부끄럽지 않은 엄마로 기억할 수 있도록 우리가 더 열심히 싸울거야. 많은 분들이 우리 문제에 대해서 다시 관심을 가져 주시고 응원도 많이 보내주시기도 해서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매년 널 찾아올때마다 다음에 다시 올 땐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올 거라고 다짐했는데 아직 지키지 못해서 너무 미안해. 아직 달라진 게 없고 제자리에 있지만 조금만 더 기다려줘. 다들 지금 많이 힘들어하지만 우리 힘을 내서 KTX 승무원으로 돌아가는 날, 다같이 널 보러 올게. 그때까지 아무 걱정말고 그곳에서 편안히 있어줘. 사랑한다 내 친구.
-KTX 해고승무원이자 네 친구인 미경이가
‘안녕하세요’라는 평범한 인사도 건네기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쌍용차 문제가 끝난 줄 압니다.
하지만 쌍용차 해고자 복직의 마지막 순서인 저는
회사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분향소에서 이 편지를 씁니다.
이런 편지를 22명 희생자들의 분향소를 차렸던
대한문 앞으로 다시 돌아와 쓰고 있다는 사실이 괴롭습니다.
괴로움만큼 지켜주지 못했다는
미안한 마음이 앞섭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고 김주중 동지.
서른번째 희생자.
그가 왜 세상을 떠나야 했을까.
대체 우리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을까.
어쩌다 10년을 동지들과 가족들이 고통속에 살아야했고,
우리는 왜 10년 째 거리에서 농성을 하고 있어야 하는 걸까.
김주중 동지는 회사의 강제 정리해고에 내몰리고,
용역과 구사대 폭력에 내몰리고,
살인적인 경찰폭력에 내몰린 피해자였습니다.
폭력의 트라우마 속에서도
쌍용차 해고노동자라는 주홍글씨를 달고서도
투잡에, 일용직에 정말 열심히 살았던 친구였는데..
하지만 국가는 그를, 우리를 가해자로 만들었습니다.
2009년 77일간의 파업이 끝나고 최후까지 남은 평조합원들과,
당시 집행부와 간부들은 모두 구속이 되었습니다.
집행유예를 받고 출소한 노동자들이
돌아간 집은 이미 폐허가 됐습니다.
가족이 해체된 사람도 있고,
아내들은 경력단절을 딛고, 당장 할 수 있는 일용직 노동에 나섰습니다.
부모의 사랑과 보호 속에 한껏 어리광을 피워야 했던 우리 아이들은 너무 일찍 어른이 되어버렸습니다.
경찰은 우리가 헬기와 장비를 부쉈다고
국가손해배상을 청구했습니다.
고 김주중 동지에게도 국가손해배상이 걸려 있었습니다.
회사도 손대지 못한 노동자들의 퇴직금에까지 손을 댔습니다.
끔찍한 가압류가 해고노동자들을 10년의 고통에 밀어넣었습니다.
구속노동자, 쌍용차 파업 참가자라는 사회적 낙인은 재취업마저 가로막았습니다.
너무 억울해서 송전탑에도 오르고, 굴뚝에도 오르고,
단식투쟁도 하고 심지어 직접 정치권에도 뛰어들어 보고
정말 안 해본 일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매달렸던 ‘사법부’.
그곳에도 ‘정의’는 없었습니다.
우리의 정리해고가 회사의 회계조작에 의한 부당해고였다는
사실이 드러나 2심에서 승소한 그 날,
희망에 가득찼던 그날의 기억을
악몽으로 만들어버린 대법원 정리해고 무효소송 뒤집기.
양승태가 퇴임할 때 언론사들은 양승태 대법원 최악의 판결로
서슴없이 쌍용차 정리해고에 대한 대법원 판결을 꼽았습니다.
그런데 그 재판이 단순히 ‘최악의 판결’이 아니라고 합니다.
사법농단, 양승태 대법원이 저지른 ‘검은거래’의 제물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끔찍한 일들이 노조를 혐오하는 정권에게
경찰과 사법부가 충성을 바치고 정부와 사법부가 거래한 댓가라는 겁니다.
3000명의 정리해고자들, 그 가족들 그리고 30명의 희생자들이 제물이 됐습니다.
최근 드러난 사법농단의 증거들을 마주하면서
또 한 번 안타까움에 가슴을 칩니다.
서른명 그 죽음이 너무나 아까워서 차오르는 황망함과 분노를 말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노조혐오로 가득찬 이명박 정부가 죽였습니다.
박근혜 정부가 죽였습니다.
정권에 충성해 개인의 사리사욕을 챙기려 했던 양승태, 조현오가 우리를 죽게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목숨을 놓고 거래한 그 대법원에
경찰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도 계류돼 있습니다.
대법원이 경찰의 손을 들어준다면,
우리는 17억원의 손해배상금을 갚아야 합니다.
정의를 잃은 ‘사법부’가 살아남은 우리들의 목숨줄을 또 움켜쥐고 있습니다.
2009년부터 매년 사람이 죽었습니다.
2017년 단 1년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회사가 복직약속을 하고, 1차, 2차, 3차복직까지
이뤄지는 동안은 죽음의 행렬이 멈췄습니다.
45명이 복직했고, 120명이 남았습니다.
120명은 해고노동자가 아닌 복직을 약속받은 복직대기잡니다.
그리고 제가 그 마지막 순서입니다.
그런데 회사는 다시 복직을 기약하지 못하겠다고 말합니다. 희망은 절망이 됐습니다.
마힌드라와 쌍용차에, 정부와 경찰에,
우리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행렬을 막을 수 있도록 120명 해고노동자 복직을 결단해달라고
정 어려우면 시기만이라도 알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2009년 경찰이 우리에게 폭력을 저지르기 위해
투입한 장비와 인력에 대해 배상하라는
‘국가손배’소송을 철회해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렇게 무리한 요구였던 걸까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쌍용자동차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 모든 것을 방치한 국가가 우리를 죽였습니다.
김주중 동지가 세상을 떠나고, 지부 사무국장이
매일같이 남은 해고노동자들의 안부를 묻는 전화를 돌립니다.
전화를 받지 않는 조합원이 있으면 불안함에 전전긍긍해 합니다.
매일매일 서로의 생존을 확인해야 하는 현실이 참담합니다.
어차피 망가진 삶을, 10년의 고통을,
없었던 일로 되돌릴 순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고통 속에서 누군가가 또 죽도록 더이상 내버려 둘 수는 없습니다.
다시 희망을 걸어 봅시다.
촛불 정부를 자부하는 문재인 정부는 '사람이 먼저인 나라', ‘노동존중’을 약속했습니다.
‘약속’이 지켜질 때까지 계속해서 목소리를 내고 악착같이 버팁시다.
우리 버팁시다.
해고 10년 내에는 우리 모두가 함께 공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확신과 희망을 가지고 다시 한 번 마음을 추스려 봅시다.
살아서 올해엔 공장으로 출근합시다.
마지막 복직대기자인
제가 반드시 돌아가겠습니다.
그날, 우리 함께 다시 웃으며 일합시다.
-2018년 7월 19일 쌍용차 마지막 복직대기자 김득중 드림
2007년 정리해고 이후 12년 째 복직투쟁 중인 콜트콜텍 노동자들. 콜트악기는 일렉트로닉 기타를, 콜텍은 어쿠스틱 기타를 만드는 기타 제조업체로 사실상 같은 회사다. 콜트 노동자들은 2012년 대법원에서 부당해고 확정판결을 받았지만, 회사가 폐업해 돌아갈 곳이 없다는 이유로 다시 해고됐다. 사측은 폐업이 아닌 인도와 중국으로 공장을 옮긴 것이었다. 콜텍 노동자들은 2심 정리해고 무효소송에서는 승소했으나 대법원에서 뒤집혔다. 2014년 대법원은 ‘미래에 다가올 경영상의 이유로 정리해고를 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취지로 고법에 파기환송했고, 노동자들은 끝내 패소했다. 이같은 콜텍의 대법원 파기환송도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부가 정부에 협력한 사례 중 하나로 포함됐다.
저희들이 12년 동안 투쟁하게 된 이유는 고등법원에서 정리해고는 무효라고 승소 판결을 받았는데, 대법원에서 파기 환송이 되서 그 파기환송 판결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그 파기환송 판결이 양승태 대법원장의 재판거래의 수단이 됐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저희는 더욱더 대법원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고, 복직되는 그 날까지 투쟁을 계속할 예정입니다.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복직 투쟁 중에 콜트콜텍 기타노동자밴드 ‘콜밴’을 만들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콜밴이 만든 노래 ‘고공’과 ‘서초동점집’으로 대신 전한다. ‘고공’은 콜텍 노동자들이 양화대교 남단 송전탑에서 30일간 고공 단식농성을 한 후 만들었고, ‘서초동점집’은 2014년 대법원 파기환송 판결 이후 사법부를 풍자하며 만든 노래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인생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해고는 살인입니다. 당신은 수많은 노동자들의 생명을, 목숨을 가지고 박근혜 정부와 거래를 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의 사법부에서 법은 약자들을 보호하기 보다는 강자들을 보호하고, 강자들을 위한 법이 되었습니다. 그런 법이 아니라 진심으로 국민을 위하는 법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촬영 : 정형민, 최형석, 신영철
편집 : 박서영, 정지성
연출 : 신동윤, 홍여진
2018년 07월 10일 19시 13분
2018년 06월 05일 16시 39분
2016년 01월 29일 18시 17분
2015년 02월 12일 20시 06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