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병에 정치를 처방한 의학자

2015년 05월 20일 17시 42분

1865년 프로이센(현재의 독일). ‘철혈 재상’으로 유명한 비스마르크는 정부의 해군예산 증액안을 거부하는 국회 예산위원장에게 결투를 신청한다. 수상이 국회의원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건 당시에도 이례적인 일. 다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전혀 이유가 없던 것도 아니었는데, 비스마르크의 강병 정책에 대해 국회예산위원장이 딴지를 건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장신의 비스마르크와 달리 국회예산위원장은 왜소한 체구의 소유자였다. 심지어 ‘의학자’ 출신으로 결투와는 거리가 먼 인물. 하지만 그는 당황한 기색 없이 유머로 맞받아친다.

수상이 메스(수술용 칼)로 결판을 내는 것에 동의할 경우 도전을 받아들이겠소.

그의 유머에 동료 의원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비스마르크의 결투 신청은 해프닝에 그치고 만다. 시대를 호령했던 수상에게 이처럼 유머로 맞받아쳤던 국회예산위원장은 당연히 평범한 국회의원은 아니었다. 의학자 출신의 ‘루돌프 피르호’. 이번 미니다큐의 주인공이다.

가난한 시골 출신이지만 어릴 때부터 우등생 자리를 놓치지 않던 피르호는 요즘 말로 하면 ‘엄친아’였다. 돈이 없어 수업료를 면제해주는 군의관 양성 대학에 입학했지만, 논리학, 역사 등 인문학적 소양 쌓기도 게을리 하지 않은 착실한 모범생이었다. 심지어 졸업한 지 불과 3년 만에 백혈병의 존재를 발견하고, ‘혈전’을 최초로 설명하는 등 젊은 나이에 두각을 나타낸다.

여기까지만 놓고 보면 출세 길이 보장된 전도유망한 젊은이라고 할 수 있다. 누가 봐도 인정할 만한 충분한 ‘스펙’아닌가?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스펙’으로 인해 그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극빈층이 모여 사는 실레지아 지방에 발진티푸스가 발병했는데, ‘젊고 유능한 의학자’인 피르호를 질병 퇴치 조사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피르호는 이 일로 인해 세계관 자체가 송두리째 바뀌게 된다. 병리학적 측면을 조사하러 갔던 피르호의 눈에 들어온 건 병 자체보다는 극빈층의 너무나 열악한 생활환경이었고 피르호는 가난한 이들의 처참한 모습에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아니나 다를까 3주 후 그의 보고서엔 병리학적 분석 이상으로 극빈층의 열악한 생활환경에 대한 문제가 지적되어 있었고, 심지어는 ‘처방’으로 ‘급진적인 제도 개혁’을 제시한다. 전염병 퇴치 방법으로 ‘정치를 똑바로 해야 한다’는 처방을 내린 것이다.

전면적인 민주주의보편적인 학교 교육 가난한 노동자나 농민으로부터 받던 세금을 부자 지주에게 전환할 것

의학자가 내린 처방치고는 다소 지나치다고 생각될 수도 있지만 당시 실레지아의 실상을 들여다보면 너무나 정확한 처방이었다. 피르호가 만난 발진티푸스 환자 중에는 영양결핍증의 하나인 ‘콰시오커’ 증상을 앓는 이가 있을 정도로(주로 배가 부풀어 오르는 현상으로 요즘엔 기근에 시달리는 아프리카 어린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실레지아 지방의 극빈층의 생활환경은 너무나 열악했다. 이러한 환경이 근본적으로 개선되지 않는 이상 전염병은 언제라도 다시 발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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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피르호의 처방을 정부가 받아들이는 기적은 발생하지 않는다. 결국 피르호는 얼마 후 발생한 혁명에 직접 참여하여 바리케이드를 치고 정부와 맞서 싸우게 되는데, 이로 인해 일하던 병원에서 해고되고 베를린에서도 내쫓겨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이때부터 피르호의 삶은 성공이 보장된 ‘엄친아’에서 이탈하여 고생길이 훤한 진보적 성향의 사회의학자로 변경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의학자 피르호의 실력이 무뎌진 건 아니었다. 정치로부터 멀어져 연구 활동에 몰입하는 동안 기존의 불명확하던 의학적 가설들을 검증하였고 결국 세포가 질병의 기본 단위라는 사실을 발표함으로써 전 유럽에 엄청난 명성을 얻게 된다. 베를린에서 쫓겨난 지 7년 만이었다.

그 덕에 다시 베를린 병리학 연구소 소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하는 피르호. 이젠 정말 연구에만 몰두해도 될 것 같은데, 정작 그가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실행에 옮기는 건 7년 전 자신이 내렸던 처방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질병에 대한 최고의 해결책(예방책)은 민주주의 확립과 불평등 해소라는 처방 말이다. 이를 위해 그는 직접 현실 정치에 뛰어든다.

1859년에 베를린 시의원으로 선출된 피르호는 1862년엔 프로이센 하원의원에 당선 되고, 같은 해 독일 진보당을 창당한다. 이후 진보적 성향의 정치인으로 많은 활동을 했지만 특히 평범한 사람들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오물 썩는 냄새로 유명하던 베를린의 하수도를 정비하는 것은 물론, 병원을 개혁하고, 공립학교 위생기준을 개정하고, 식품검사법을 제정하고, 간호사 교육제도를 개선하는 등 요즘 흔히 ‘공중보건’이라고 부르는 보편적인 의료 서비스의 기틀을 마련한다. 그렇게 자신이 20대 초반에 내렸던 처방을 이후 정치인으로서 활동한 40년 동안 하나씩 하나씩 현실에서 구현해 낸다.

동시에 의학이 단순히 미시적으로 질병을 치료하는 분야가 아니라 사회과학으로서 존재해야 함을 끊임없이 주장한다. 언뜻 들으면 의학을 과대평가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최후에 지켜내는 건 결국 ‘의사’라는 점에서 그가 의학자로서 느낀 책임감을 단순히 비약이나 과장이라고 치부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의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정치에 대한 그의 정의는 100년이 훌쩍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의학은 사회과학이며 정치는 대규모의 의료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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