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외무성 "계엄군 5·18 진압은 효과적, 다행"...외교문서 최초공개

2019년 08월 13일 07시 59분

광주 전역을 무력 제압(光州全域を武力制圧) -요미우리신문
계엄군이 광주 제압(戒厳軍が光州制圧) -마이니치신문
계엄군, 광주를 제압(戒厳軍、光州を制圧) -아사히신문

1980년 5월 27일, 일본 주요 일간지 석간 1면

전두환의 신군부가 군홧발로 광주를 장악한 1980년 5월 27일. 일본 주요 일간지들은 광주 소식을 앞다퉈 전했다. 일본의 눈은 광주를 향해 있었다. 헤드라인에서 읽히듯 계엄군이 광주를 기어이 유혈 진압했다는 인식이 뚜렷했다. 아사히신문은 ‘정세 안정을 멀리서 지켜보다: 광주 진압에 대해 외무성’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당시 일본 정부의 입장을 전한다. 신문은 “외무성은 공식 코멘트는 피하고 있다”면서도 한 외무성 ‘간부’를 취재원으로 인용한다.

외무성은 공식 코멘트는 피하고 있으나 광주시 중심부의 전라남도청사를 시작으로 공관청에서 무장한 과격파가 배제되고, 일단 정부의 관할 아래로 돌아온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광주시의 질서 회복이라는 점에서 제1관문은 돌파했다"(간부)고 보고 있다.

1980년 5월 27일, 일본 아사히신문 석간

아사히가 인용한 일본 외무성 익명 취재원의 시각은 ‘무장한 과격파 배제’, ‘질서 회복’에 방점이 찍힌다. 일본에게 5·18민주화운동(이하 5·18)은 신냉전시대의 국제 정세 안에서 한반도 남쪽을 정치적 소용돌이에 빠뜨릴 수 있는 일대 사건이었다.

뉴스타파, 日외무성 ‘1980 한국 정세’ 보고서 최초 공개

일본정부가 전두환 신군부의 출현과 광주학살을 어떻게 봤는지는 위에서 언급한 아사히신문 기사 외에는 지금까지 별다른 기록이 공개되지 않았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2014년부터 최근까지 일본 외무성이 비밀해제한 1980년 전후 외무성 기록을 입수해 처음으로 당시 일본정부의 시각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를 공개한다.

이 일본외무성 기록은 1980년 전후 한국에 주재한 일본 외교관들이 한국 정세를 분석한 문건으로, 주한일본대사관과 부산총영사관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들이다. 이를 보면 1980년에서 1981년 사이 일본 당국이 5·18과 신군부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알 수 있다.

5·18 이후 8개월 지난 1981년 1월 주한일본대사 스노베 료조(須之部量三, 1977. 7.∼1981. 5. 재임)는 본국 외무대신 앞으로 ‘1980년 한국 내정 회고와 전망’이라는 제목의 ‘관내정세 보고’서를 제출한다. 일 외무성이 공개 결정을 내리기 전까지 ‘극비’로 분류됐던 스노베의 자필 기록이다.

▲1981년 1월 스노베 당시 주한일본대사가 외무대신에게 발송한 정세보고서에는 1980년 5·18민주화운동 전후의 한국 정치변동과 신군부에 대한 분석이 담겨 있다. (출처: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日대사 “한국 정치풍토 악폐가 군의 정치개입 불렀다”...쿠데타명분 용인

스노베 대사는 보고서에서 1980년 한국 정세를 ‘5·17조치 이전’과 ‘5·17조치 이후’로 나누어 서술한다. 일본 당국 역시 전두환의 신군부가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한 사건을 정세의 분수령으로 인식한 것이다. 스노베 대사는 ‘5·17조치 이후’라는 소제목 아래 “200일의 서울의 봄은 종언을 보기에 이르렀다”고 썼다.

그럼에도 스노베 대사는 보고서에서 5·17 조치로 대표되는 신군부의 정치 개입은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취지의 인식을 보여준다. “한국적 정치 풍토의 악폐”가 5·18 등으로 상징되는 “혼란과 대립”을 초래해 군부의 정치 개입을 불러왔다는 해석이다. 스노베 대사의 정세 평가는 전두환과 신군부의 쿠데타 명분을 사실상 용인하는 것이다.

권력의 공백 상태가 생겨난 가운데… 기성 정치인의 권력 획득을 위한 여러 활동, 민주화의 급속한 변혁을 요구하는 학생들의 움직임 등이 ‘흑백논리, 파벌의식, 극한대립’이라는 한국적 정치 풍토의 악폐를 일시에 분출시켜 정세에서 미증유의 혼란과 대립(5월 중순 학생 데모, 그리고 계속된 광주소요)를 불러왔다. 이상의 정세 혼란과 대립이 결국 5월 17일 군의 정치 개입을 불러온 결과가 되었고….

1981년 1월 16일, 관내정세보고(2), 스노베 료조 주한일본대사

日 외교 “5·18, 과격파가 무기 탈취”…“효과적 진압, 질서·평정 찾아”

당시 주한일본대사관과 부산총영사관 보고서를 보면 5·18 당시 일본 정부는 광주시민들이 군에 대항할 무력을 갖추게 된 상황을 가장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주소요) 서울을 중심으로한 극도의 혼란과 대립은 비상계엄령이 전국에 확대된 5월 18일 당일 광주로 비화하여 전남대학 학생 수백명이 가두데모에 나섰으나 이를 진압한 군·경찰 측의 과잉경비가 시민의 반감을 사고, 전통적으로 반체제의식의 뿌리가 있는 광주시민의 감정에 불을 지른 결과가 됐다. 일부 과격파가 무기를 탈취하고 군·경측과 총격전을 전개하는 등 27일 계엄군에 의한 사태 수습까지 열흘 간 국가 존망이 걸릴 정도로 긴박한 사태를 경험했다. 본 소요에 의해 189명이 사망하고 380명이 부상당했다. 또 주모자 175명이 검거되었다.

1981년 1월 16일, 관내정세보고(2), 스노베 료조 주한일본대사

스노베 대사는 정세보고서에 5·18에 대해 한 문단 분량의 평가를 남긴다. 짧은 기록 속에서도 광주시민과 계엄군에 대한 그의 인식을 읽을 수 있다. “일부 과격파가 무기를 탈취”하면서 사태가 긴박해졌으며 계엄군이 결국 사태를 “수습”해냈다는 것이다.

서울의 일본대사관과는 별도로 부산에 있는 일본총영사관도 5·18 무력 진압의 결과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보고서를 본국에 보냈다. 당시 부산총영사관은 대구와 광주 지역도 관할에 두고 있었다. 부산총영사관은 1981년 1월 작성한 정세보고서에서 5·18을 “전례 없는 비극”이라 평가하면서도 계엄군의 진압은 ‘효과적’이었고 ‘다행’스러운 일이었다고 분석한다. ‘질서와 평정’을 회복하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이었다는 시선이다.

당관 관내 광주에서 5월 18일 발생한 광주소요사건은 민간인 148명, 군인 22명, 경찰 4명 총 174명의 사망자가 나왔으며 전례에 없는 비극이며 다행히 5월 27일 계엄군의 효과적인 진압으로서 질서와 평정을 찾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1981년 1월, 관내정세보고, 재부산총영사관
▲일본 부산총영사관이 1981년 1월 작성한 정세보고서에서는 5·18을 회고한 기록도 확인된다. 계엄군의 무력 진압에 대해 "다행히(幸いにも)", "효과적인 진압(効果的な鎮圧)" 등의 평가를 남겼다. (출처: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日이 바라본 신군부…“‘개혁주도세력’이 정식 정치무대로”

사회개혁 주도세력이 처음에는 대단한 열의와 정의감을 가지고 출발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들이 부패하고 사명감을 상실하기 때문에 국민으로부터 불신을 받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새 시대에는 결단코 이와 같은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1980년 9월 1일, 전두환 대통령 취임사

전두환은 광주의 피가 채 마르지 않은 1980년 9월 제11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취임사에서 새 시대의 ‘사회개혁 주도세력’을 자처한다.

▲스노베 대사는 1981년 1월 정세보고서에서 쿠데타로 집권을 꾀한 전두환의 신군부를 ‘개혁주도 세력’으로 평가했다. (출처: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스노베 대사 역시 1981년 1월 정세보고서에서 전두환 일당을 ‘개혁주도 세력’으로 거듭 평가한다. 일본 정부가 인식한 전두환과 신군부는 군사반란을 일으킨 군부 쿠데타 일당이 아니라 개혁세력이었던 셈이다. 스노베 대사는 ‘신체제 만들기’라는 소제목 아래 “광주소요의 수습과 함께 군인을 중심으로 한 ‘개혁주도 세력’이 정식 정치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했다”며 “새로운 통치 기구 만들기, 구세력 숙정, 각종 개혁조치가 속속 실시됐다”고 보고서에 썼다. 기존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금지한 가운데 전두환의 집권을 위해 창당한 민주정의당(민정당)에 대해서도 “개혁주도 세력을 중핵으로 한다”고 평가했다.

대통령 직접선거를 지지하는 다수 의견은 개혁주도 세력의 대두와 함께 흐지부지됐다.

1981년 1월 16일, 관내정세보고(2), 스노베 료조 주한일본대사

스노베 대사가 스스로 평가하듯이 전두환과 신군부 세력이 주도하는 개혁이란 반민주적 시도였다. 그럼에도 당시 일본 당국이 신군부를 다각도로 이해하고 지원해온 정황도 확인된다.

일본이 신군부를 지원했다고 주장한 학계 논문에 따르면 일본 당국은 1979년 10·26 사태 직후부터 전두환의 신군부가 쿠데타를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전두환 측이 미리 계획을 알려주고 양해를 구한 것이다. 이때 전두환이 접촉한 인물이 바로 스노베 대사다.

스노베 대사는 논문 저자인 박선원 현 국가정보원장 특보(당시 연세대 국제학연구소 연구교수)가 논문을 작성할 때 인터뷰를 통해 1979년 11월 말 보안사 안가에서 당시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이던 전두환과 그의 측근인 주일한국대사관 수석공보관 허문도를 비밀리에 만났다고 증언했다. 당시 비밀회동에서 스노베 대사에게 허문도는 전두환이 새로운 체제를 창출할 것이라고 거듭 말했고, 전두환은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체포하려는 계획도 미리 알려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일본의 양해를 구한 신군부는 1979년 12월 12일 계획대로 정승화 장군을 체포하고 쿠데타를 실행한다. 스노베 대사와 일본 당국은 12·12 쿠데타 계획을 미리 알고도 묵인하면서 한국현대사에서 신군부의 전면 등장을 사실상 지원한 셈이다. 전두환 집권 이후, 스노베 대사가 1980년 한국 정세를 본국에 보고하면서 신군부의 쿠데타 명분을 한국 정치의 악폐에서 찾고, 전두환 일당을 ‘개혁주도 세력’으로 칭한 것은 이례적인 평가가 아니었던 것이다.

뉴스타파가 이번에 분석한 일본 비밀해제 외교문서는 일본과 전두환 신군부가 정치안보의 동반자였다는 분석을 또 한 번 뒷받침해주고 있다. 일본은 전두환을 통해 한반도 정세의 안정을 꾀하고, 전두환은 일본이라는 뒷배를 업고 집권의 정통성을 다진 것이다. 신군부와 일본의 밀월 관계 속에서 1980년 민주주의를 열망한 한국 국민들이 맞이한 것은 또 다른 군부 독재정권이었다.

취재: 홍우람
자문: 전갑생(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 5·18민주화운동기록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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