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朝東)100년] ① 뉴스타파, 조선 · 동아 정체 알리는 다큐영화 제작
2020년 03월 05일 18시 38분
일제는 1937년 7월 중국을 침략했다. 중일전쟁의 시작이었다. 전쟁이 장기화되고 병력이 부족해지자, 조선총독부는 1938년 1월 한국인을 대상으로 ‘육군 지원병’ 제도를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일제는 이렇게 한국 젊은이들을 침략 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았다.
조선총독부는 지원병제 실시를 조선 식민지 통치의 핵심 이데올로그였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완성하는 계기로 삼고 대대적인 선전·선동을 벌였다. 이에 대해 조선과 동아일보, 두 신문은 어떤 식으로 호응했을까.
뉴스타파는 민족문제연구소, 역사디자인연구소와 함께 1937년부터 40년 폐간 때까지 두 신문에 등장하는 지원병 관련 기사를 분석했다.
조선총독부가 지원병 제도 실시를 발표한 이틀 뒤인 1938년 1월 18일, 조선일보는 ‘벌써 지원자 속출’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냈고, 같은 날 동아일보도 ‘지원병 희망자가 속출’한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이날 사설에서 “조선인에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한다는 것은 획시기적(劃時期的) 중대 사실로 내선일체의 일현현(一現顯,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며 지원병 제도의 실시를 내선일체와 연결해 보도했다.
두 신문은 이후 ‘쇄도’, ‘초과’, ‘돌파’ 등의 단어를 동원해 지역별로 지원병 지원 상황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지역별로 지원병 지원 현황을 비교해 경쟁을 부추기는 기사도 확인했다. 대표적인 게 1939년 2월 6일자 동아일보 기사다.
동아일보는 이날 2면에서 ‘함경남도 관내엔 지원병 태무 상태’라는 제목으로 “함경남도 관내만은 불과 (지원병이) 20여 명 정도”이고, 그 원인이 “지원병 제도에 대한 주지 보급이 불철저한 소치인 듯하다”며 지원병 모집 홍보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함경남도 당국을 비판했다.
반면, 같은 날 4면에선 ‘강릉 지방 지원병 66명을 돌파’ 제목으로 “지원병 열기가 최고조에 달했다”는 기사를 실었다. 지원병 지원이 많은 이유로 “강릉 지방이 제국 군인에 대한 고귀한 정신과 진충보국의 일념에 불타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동아일보가 내보낸 이 기사의 효과는 컸다. 1년 만에 함경남도의 지원병 신청자가 전국 1위를 차지한 것이다. 1940년 2월 모두 7만 9,600명이 지원했는데, 함남 지역의 신청자가 1만 900명으로 집계돼 전국에서 가장 많았다.
국가통계포털에서 확인한 당시 도별 인구 통계를 보면, 함경남도 지원병 지원자가 다른 지역에 비해 월등하게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40년 당시 함남의 조선인 남성은 약 92만 명이었다. 반면 경기도의 조선인 남성은 135만 명이었는데, 지원병 지원자는 함남의 절반 수준인 약 5,200명이었다.
조선과 동아일보, 두 신문의 중일전쟁과 지원병 관련 기사에는 ‘혈서(血書)’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지원병에 뽑아달라며 ‘천황폐하 만세’와 ‘일본제국 만세’ 혈서를 쓴 청년을 소개했고, 혈서와 함께 두 아들에게 입대를 못 하면 죽어 오라고 했다는 아버지의 당부를 보도하기도 했다.
1937년에서 1940년 사이, 두 신문에 등장하는 혈서 기사를 간략히 소개하면 이렇다.
이 가운데 “피가 모자라 물을 타서” 혈서를 썼다는 강화군 지원자는 당시 19살이었다. 또 “일신을 황국에 바치겠다며 혈서” 쓴 춘천 소년의 나이는 불과 18살이었다.
1939년 중국 전투에서 첫 조선인 지원병 사망자가 나왔다. 충북 옥천군 출신 ‘이인석’이었다. 조선과 동아, 두 신문은 이인석을 전쟁 영웅으로 만들면서, 침략전쟁의 선동 수단으로 이용했다. 전쟁의 비극이나 억울한 죽음, 그리고 유족의 슬픔은 이들 신문의 안중에 없었다.
동아일보는 1939년 7월 9일 고 이인석의 유족을 만나 ‘이인석 가정 방문기’ 기사를 작성했는데 “전사(戰死)는 남자의 당연사”라며 이인석의 부인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크게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1939년 9월 6일 “적진에 돌입,역습, 적을 분쇄”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인석이 전투 도중 수류탄에 맞아 사망하기 직전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했다고 마치 현장을 목격한 듯 보도했다.
두 신문은 고 이인석 관련, “지원병 최초의 꽃, 옥천 출신 일등병 이인석 군 전사” (1939년 7월 8일 동아일보) ,“피로써 진충보국한 표본이 되어 주었다”(1939년 7월 9일 조선일보), “인간을 초월한 훌륭한 공훈”(1939년 7월 13일 조선일보) 등 일제 침략전쟁 전사를 미화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신철 역사디자인연구소 소장은 “전쟁의 참상이라든지 개인의 아픔과 희생에 관한 부분은 전혀 읽을 수 없고 영웅화를 통해 일본이 전쟁에서 이길 수 있고 조선인도 침략 전쟁에 기여한다는 것을 강조해 전쟁을 미화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뉴스타파는 고 이인석의 딸을 만났다. 아버지가 사망할 무렵 딸은 세 살이었다. 올해 83살이다. 딸은 오랜 지병으로 방안에 누워 있었다. 딸은 연신 한숨만 지었다. 그리고 “전쟁터로 끌고 간 그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지”라고 말했다.
조선·동아, 두 신문은 1940년 8월 폐간 때까지 일제와 히틀러 군대에 맞선 연합군 측인 미국과 영국을 미영귀축(米英鬼畜), 즉 귀신과 짐승이라고 비하하면서 일제가 저지른 침략전쟁을 찬양 선동했다. 또한 히틀러와 나치, 무솔리니 등 파시즘 정권을 찬양하는 보도를 이어갔다.
1940년 새해 첫날 조선일보는 ‘견고한 독일정신을 가진 지도자 히틀러 1인의 지도와 지도자를 위한 명예스러운 희생이 독일을 강국으로 만든 원동력이 됐다’는 내용의 기고문을 실었고, 같은 날 동아일보는 독일 나치와 신라시대 화랑도 정신이 나라를 위해 목숨마저 희생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는 취지의 기사를 냈다.
‘소년조선일보’의 1940년 7월 14일 기사에서는 ‘즐거운 각국의 아이들’이라는 제목으로 나치 청소년 조직인 ‘히틀러 유겐트’와 이탈리아 청소년 파시스트 단체를 상세히 소개했다. 소년조선일보는 ‘독일이 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를 이기고, 다른 나라들도 정복한 것은 용맹한 독일 병정을 길러내는 히틀러 유겐트의 힘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고 했다.
1940년 폐간 이후에도 두 신문의 사주, 김성수와 방응모는 침략전쟁을 선동하고 지원병 학병을 찬양하는 기고문을 여러차례 발표했다. 대표적인 기고문을 아래에 소개한다.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일제강점기 두 신문 사주였던 김성수와 방응모를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다. 이후 두 사주의 후손들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 처분 취소 소송을 냈지만, 모두 패소했다.
뉴스타파는 일제강점기 조선일보 지면을 전수 분석해 조선일보가 모두 11차례에 걸쳐 1면 제호 위에 일장기를 올려 인쇄한 사실을 확인한 바 있다. 새해 첫날은 물론 일왕의 생일, 육군, 해군기념일 등에 맞춰 제호 위에 일장기를 인쇄했다.
취재진은 조선일보 제호 위 일장기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추적했다. 마이크로 필름이나 PDF파일 형태가 아닌 조선일보 지면 원본을 [조동(朝東)100년] ⑤ 편(3월 13일)에 공개한다.
취재기자 | 홍주환 김용진 박중석 조현미 |
데이터 | 최윤원 |
촬영기자 | 최형석 신영철 |
편집 | 박서영 |
CG | 정동우 |
디자인 | 이도현 |
출판 | 허현재 |
공동기획 | 민족문제연구소 |
공동조사 | 역사디자인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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