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시와 차별, 망각...아리셀 참사 유족들은 얼어붙은 길 위에 있다
2024년 11월 19일 11시 38분
3년만에 가까스로 열린 청문회.
[신계륜 환경노동위원회 위원장]
“더 중요한 요인이 있고, 더 억울한 요인이 있고, 더 죽지 않으면 안 될 요인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 여기까지 온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은커녕, 최소한의 사과 한마디도 제대로 이끌어내지 못했습니다.
[조현오 당시 경기지방경찰청장]
“사실을 왜곡시켜서 거짓으로 우리 경찰 가족에 대해서 비난하는 이것은 굉장히 정의에도 반하는 거고 국가 정체성 유지에도 굉장히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청문회를 지켜보던 쌍차 가족들, 조 전 청장의 발언이 이어지자 3년 동안의 희망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심정입니다.
같은 시각, 새누리당 당사 앞 농성장.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도 시시각각 전해오는 청문회 상황에 귀를 기울입니다. 그러나 역시 조 전 청장의 발언에 분노를 억누르지 못합니다.
[고동민 쌍용차 해고 노동자]
“그때 얘기했던 게 경기 경찰청장이 ‘(공장 밖으로) 나오면 조합원들 선처해 주겠다’고 했거든요. 그런데 조합원들도 다 잡아갔어요. 경찰한데 개 맞듯이 두들겨 맞고 구치소에서 3개월, 6개월 살았거든요 실제로. 그러면서 ‘지금 잘못한 게 없다’ 그리고 진압했던 일선 경찰들은 다 특진시키고.”
사실 쌍차 노동자들은 회사나 경찰이 스스로 태도를 바꿀거라는 기대는 별로 하지 않습니다.
[김대용 쌍용차 해고 노동자] & [윤성희 뉴스타파]
(사장이랑 당시 진압을 지휘했던 경찰청장이랑 청문회에 나왔는데 직접 보거나 묻고 싶진 않으셨어요?)
“직접 모니터로 보면 분노만 치밀 것 같고 ‘안 보는 게 낫겠다’ 싶은 거죠. 괜히 보면 속에서 천불만 끓고 그러니까..”
파업이 진압된 이후, 쌍차 노동자들은 예외없이 가혹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당시 파업을 이끌었던 한상균 전 지부장. 그는 3년의 형기를 꽉 채우고 출소해야 했습니다.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
“그냥 만기 출소입니다. 그야말로 권력이든, 자본이든, 가진 자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사면도 잘 시켜주고 그리고..”
해고자들에겐 세상이 다 감옥이었습니다. 기댈 곳도, 받아주는 곳도 없었습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
“솔직히 해고되고 나서 가정생활 하는 건 저 뿐만 아니라 다 똑같다고 생각합니다. 겉으로 보여지지 않고 그냥 살아가고 있을 뿐이지 언제 어떻게.. 하루 하루가 정말 하루살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당장 내일, 오늘 저녁에 내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살아왔으니까요.”
[이갑호 쌍용차 해고 노동자]
“아까 조현오 나왔을 때, 공장 불타고 했었지만 실제로 옥쇄파업 끝나고 일주일만에 (공장)라인 돌아갔어요. 생산이 됐다고요. 저희들이 진짜 파괴를 하고 공장을 진짜, 못 움직이게 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었죠. 저희가 77일 동안.”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
“우리가 방사능에 피폭이 되면 거죽으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피부에 당장 아무런 손상도 보이지 않고 사람이 아파서 쓰러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 이미 피폭된 순간 DNA까지 다 파괴돼서 그 사람은 이미 죽음이 예고된 상황이나 마찬가지고요 그 고통은 그 다음 대로도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 순간에 이뤄진 재앙적인, 살인적인 진압은 심리적으로 마치 방사능에 피폭이 된 상태와 같은 효과를 가져오고요.”
“제가 14번째 사망자 때 갔었는데요, 치료를 시작하다 보니까 이 상황이 너무나 처절해서, 너무 급박하고 이거는 초 웅급상황입니다. 자살충동이나 심각한 자살사고, 또 자살시도를 한 사람이 제가 만났던 조합원들 중에 8할이 넘는 상황이고요.”
충청북도 괴산. 야산 기슭에 축사를 개조해 만든 한 농가. 옥쇄파업으로 정리해고 된 계영휘 씨는 시골에 내려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남상애 쌍용차 해고 노동자 어머니]
“여보세요 나 계영대 엄마인데요 영대 좀 어때요? 언제쯤 다 나을 것 같죠?”
올해 일흔 다섯 살의 남상애 씨. 그녀의 둘째 아들 영대 씨도 쌍용차 노동자였습니다. 그 또한 형 영휘 씨와 함께 도장공장에서 옥쇄파업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경찰특공대가 투입되기 일주일 전, 고립된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파업대우에서 빠져나왔습니다.
[계영휘 쌍용차 해고 노동자]
“한 6개월 지난 다음에 그 때 약간 좀 동생이 사람을 기피하지 않나 그런데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 당시엔 어떤 행동을 보였어요?)
“사람을 기피하고 저희 집에 와서 식사나 하고 가라고 해도 안 오고, 온다고 대답만 하고 안오고, (집으로) 가면은 전화를 꺼놓고 문도 안열어주고 인기척도 없고.”
당시 영대 씨의 집안 풍경. 각종 전자장비와 감시용 망원경을 거실과 베란다에 설치해놨고, 집안 곳곳엔 비상식량과 생수를 가득 쌓아뒀습니다. 공장에서 쫓겨난 뒤 자신만의 요새를 만들기 시작한겁니다.
“심지어는 (집에) 카메라, CCTV를 설치해 놓았는 줄 알았는데 들어가 봤더니 CCTV가 아니라 사람이 이동하면 감지해서 부저가 울리는 경고음 그런 센서를 부착해 놨더라고요. 안에 들어가서 보니까.”
[남상애 쌍용차 해고 노동자 어머니]
“현관에서 이렇게 전기줄을 건조대에 묶어 놨더라고. 그런데 건조대에 묶은 게 그게 (빨랫줄)이 아니래. 죽으려고 자살기도를 한 거야.”
영대 씨는 현재 경기도 부천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습니다. 일 년째 입원중입니다. 망상증상이 심해져 면회도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이창희 계영대씨 주치의(정신과 전문의)]
“자기자신이 쌍용자동차의 고위 임원이고, 이사급에 해당하는 쌍용자동차 내에서 아직까지도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매달 이사급에 해당하는 많은 돈이 자신의 계좌에 들어오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좀 돈이 있는 상태고, 또 쌍용자동차 사태가 벌어진 것과 상관없이 자기는 회사측의 고위임원이기 때문에 내일이라도 직장에 복귀해서 일을 할 수 있다. 환자분이 지금 자신의 망상에서 빠져 나오기를 원치 않는다는 느낌을 받고 있거든요.”
(거기서 그냥 살고 있는 게, 편안하고 안락하고 내가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계시다는 거죠?)
“마치 입원 초기때 자기 집 안에 요새를 만들어 놓고 그 안에서만 지냈던 것처럼요. 자신의 생각 안에 요새를 또 만들어 놓고 지내고 계시기 때문에..”
해고자 2646명. 그리고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른이가 스물두 명. 그러나 3년의 시간이 흐를 때까지 우리 사회는 아무런 해답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스물두 명 죽음에 대해 우리 모두가 공범자인 셈입니다.
[공지영 소설가(의자놀이 저자)]
“이렇게 일하는 사람들을 마구마구 아무렇게나 대하는 이런 사회가 결코 잘 살 수가 없죠. 최소한 우리 예전에 70년대, 80년대 어쨌든 경제 성장을 할 때는 일하는 사람을 물론 인권적으로 대하지 않았지만 ‘일손이 없다’ 이런 이유로 그렇게까지 홀대하진 않았던 것 같아요. 차라리 전태일 때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전태일 한 명 죽으니까 모두 충격받았던 그 시대가 차라리 행복했던 시대인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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