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직감시

"김대중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라"

2014년 03월 26일 17시 36분

독재자의 죽음과 신군부의 탄생, 그리고 미국 망명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총탄에 쓰러지자 재야와 학생운동 세력은 그토록 염원하던 민주화가 현실로 다가오리라는 기대에 들떴다. 그러나 ‘서울의 봄’은 1980년 5월 광주 민주화운동이 탱크와 군홧발에 짓밟히며 급격히 저물고 만다.

12.12 쿠데타로 권력을 탈취한 전두환 등 신군부 세력은 광주 민주화운동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내란으로 몰아 김대중 전 대통령을 체포했고, 군사법정은 김 전 대통령에게 내란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한다.

에드워드 케네디 미국 상원의원 등 많은 외국 지도자와 지식인들의 구명 운동으로 형량은 곧 무기징역으로 낮춰졌고, 1982년 말에는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전두환의 미국 방문을 받아주면서 김 전 대통령은 전격 석방돼 미국 망명길에 오른다.

▲ 공항에서 내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

“김대중의 동향을 최대한 은밀히 파악해 보고하라”

그러나 김대중의 존재가 눈엣가시 같았던 전두환 정권은 미국 주재 한국대사관과 각급 공관에 공문을 보내 그의 미국 내 동향에 대해 최대한 은밀한 방식으로 파악해 수시로 보고할 것을 지시했다. 사실상 정치 사찰에 가까웠던 전두환 정권의 사력을 다한 김대중 감시의 실태가 30년 만에 기밀 해제된 외교문서를 통해 낱낱이 드러났다.

외교부가 이번에 공개한 문서에 따르면 전두환 정권의 사찰은 김대중 개인 만이 아니라 그와 교류하던 교포 등 주변 인물들에 이르기까지 전방위로 전개됐다. 외무부가 모든 주미 공관에 보낸 공문에는 김 전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접근 가능한 교포 인사들을 통해 첩보를 수집하고 분석할 것을 지시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이에 따라 김 전 대통령의 강연 일정과 내용, 참석자 등을 파악했고 교민들과의 식사와 면담 일정과 내용은 물론 후원금을 낸 교민들의 실명과 액수까지 꼼꼼하게 파악해 본국에 보고했다. 이런 정보들은 외교부 내부 관련 부서 뿐만 아니라 청와대와 안기부, 보안사 등의 정보기관과도 공유됐다.

▲ 후원금 낸 교민들 실명과 액수 등 담긴 공문.

김 전 대통령도 이 같은 사실을 모두 알고는 있었지만 크게 개의치는 않았다고 당시 미국에서 함께 민주화 운동을 했던 문동환 목사는 증언했다.

“두려움을 가지지는 않았고 전두환 정권이 주시하고 있을 것이라는 건 당연시했죠.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 중에 정부 일 하는 사람들이 당연히 있었고 얼마든지 감시할 수 있는 상황이었죠. 감시가 없을 까닭이 없는 거죠.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그걸 몰랐겠어요? 뻔히 알면서도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었죠.” [문동환 / 당시 재미 민주화 인사]

▲ USA 투데이 등 당시 미국 현지 언론 보도.

외무부는 김 전 대통령에 관한 현지 언론 보도에 대해서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긴박하게 움직였다.

1983년 1월, 외무부는 김 전 대통령의 인터뷰 기사를 실은 미국 일간지 USA 투데이 간부진들의 인적 사항과 성향, 발매 부수 등을 파악해 보고하라는 비상식적 공문을 해당 공관에 보냈다. 같은 달 <미국의 소리> 방송이 김 전 대통령의 육성 발언을 4차례 내보내자 외무부는 주미대사를 통해 미 국무성 고위층과 접촉해 이를 막으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사실 당시로선 미국 측 관리나 언론들이 먼저 만나고 싶어 했었죠. 이 사람이 앞으로 대통령이 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또 가장 양심적인 민주적 지도자라는 사실을 다들 알고 있었으니까요.” [문동환 / 당시 재미 민주화 인사]

효과적 ‘DJ 사찰’ 위해 외교-국방-안보라인 한몸 묶어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사찰과 행동 반경 차단에는 외교라인 뿐만 아니라 안기부까지 동원됐다.

김 전 대통령의 미국 망명 여권은 미국 외 지역에 대한 여행이 제한되어 있었는데, 1983년 10월 김 전 대통령은 캐나다 방문 강연을 위해 개인과 가족 여권의 이 같은 제한 사항을 수정해 제 3국 방문도 가능케 해 달라고 뉴욕 총영사관에 요청했다. 뉴욕 총영사관은 이를 외무부에 보고했고 외무부는 안기부로 공문을 보내 의견을 물었다. 이에 대해 안기부가 즉각 불허 방침을 회신하자 외무부는 뉴욕 총영사관에 이를 그대로 통보했다.

이후 김 전 대통령은 1983년 12월 주한 미국대사에게 여권 제한조치를 철폐해 달라는 신청서를 자필로 작성해 보내는 등 미국 외 지역을 여행을 위해 애썼지만 제3국 행은 끝내 무산됐다.

▲ 김대중 전 대통령의 당시 여권.

당시 유병현 주미 대사은 합참의장 출신, 노신영 안기부장은 외무부장관 출신이었다. 이처럼 외교-국방-정보라인의 인맥들이 모두 김대중 감시와 관련돼 있었던 것이다. 이런 배치 자체가 김 전 대통령의 미국 내 활동에 대한 일사불란한 사찰과 대응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외교부에서 공개한 자료보다 더 상세한 자료들이 국정원에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당시 안기부로는 더 상세한 내용들이 보고가 됐을 것입니다. 그때 안기부장이 외무부장관 출신으로 놓은 것은 외교라인과 정보라인이 한몸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한홍구 / 성공회대 교수]

레이건 미국 대통령의 방한이 임박한 1983년 11월, 김 전 대통령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비판 활동의 수위를 더욱 높인다. 나아가 레이건의 방한은 전두환 독재정권의 정당성을 인정해 주는 것이므로 저지해야 한다는 내용의 강연과 방송 활동을 잇달아 전개한다.

그러자 미국 LA 주재 한국총영사관은 김 전 대통령이 레이건 대통령에 대해 언급한 내용들을 수집해 FBI, 즉 미 연방수사국에 전달하고 조치를 요청했다고 외무부에 보고했다. 범죄인도 아닌 자국민의 정보를 외국 수사기관에 넘기는 이해하기 어려운 조치였다.

▲ FBI에 조치를 취했다는 LA 주재 한국총영사관 발송 문서.

정당성 없는 정권은 민심이 두렵다

이런 미국 망명 생활을 거쳐 김 전 대통령은 1985년 초 귀국을 결심하지만 전두환 정권은 이 역시 주미 공관을 통해 저지하려 했다. 이를 위해 전두환 정권은그토록 막았던 김 전 대통령의 미국 외 지역 여행까지도 풀어주려 했었다고 한다.

“김대중 씨가 미국에서 하도 시끄럽게 굴어서 본국에서는, 다가오는 2.12 총선도 있고 해서 김대중 씨를 귀국시키지 말고 유럽 쪽으로 여행을 시키도록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었어요.” [유병현 / 당시 주미대사]

김 전 대통령의 귀국 후 한 달 만에 치러진 2.12 총선이 사실상 신민당의 압승으로 마무리되면서 전두환 정권이 왜 그토록 김 전 대통령과 그 주변을 철저하게 사찰했는지 그 이유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것은 바로 정당성 없는 정권이 영원히 벗어버릴 수 없는 ‘민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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