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법관 기피 신청은 불법 기소 자백이다
2024년 11월 22일 11시 02분
국정원의 국내정치개입에 많은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정원이 본업이라할 간첩사건 수사에서조차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내고 있어 충격을 주고 있다.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 혹은 ‘화교남매 간첩조작사건’이라 불리는 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은 올 1월 일부 언론이 “서울시 공무원으로 일하는 탈북자가 탈북자 1만명의 정보를 북한에 전달했다”고 보도하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간첩혐의로 구속된 유우성씨는 많은 젊은 탈북자들에게 모범사례로 부각돼 온 인물이었다. 북한에서 준의사로 지냈지만 한국에 와서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공무원이 됐다. 그러나 유우성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그는 북한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화교였던 것이다. 화교는 북한에서 중국으로 일년에 몇번씩 나갈 수 있기 때문에 무역 등을 하며 특별한 지위를 갖고 있다.
여동생이 자백한 오빠의 간첩혐의
유씨의 여동생인 유가려씨는 오빠처럼 화교라는 신분을 숨기고 한국에 들어와 탈북자로 신고해 대한민국에 정착하려 했지만 그녀 앞에는 혹독한 심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2012년 10월 30일 중앙합동신문센터의 수용된 유가려씨는 지난 4월 26일까지 179일 동안 독방에서 지내며 수사 아닌 수사를 받아야 했다. 수용된지 일주일 만에 화교 신분이 드러난 유가려씨는 이후 오빠와 아버지 , 그리고 자신이 북한 국가안전보위부의 공작원이고 오빠가 전해준 탈북자 정보를 세차례 보위부에 전달했고, 오빠가 5차례 밀입북했다는 등의 내용을 자백했다.
여동생의 자백내용을 기초로 국정원은 유우성을 1월 초 구속해 수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오빠 유우성씨는 완강하게 혐의사실을 부인했다.
여동생 “합동신문센터에서 구타, 거짓자백 강요당했다”
드디어 4월 26일 오빠의 변호인들이 신청한 인신구제신청 재판 뒤 유가려씨는 합동신문센터를 나왔고, 기자회견을 통해 그동안의 자백이 구타와 회유, 기망에 의한 허위자백이었다고 밝혔다. 유가려씨는 합동신문센터 조사관들이 머리를 때리거나 벽에 찧고, 구두굽으로 허벅 다리를 차거나, 전기고문을 하겠다고 위협하는 등 가혹행위를 했다고 말했다. 또한 오빠가 이미 자백했다며 허위자백을 강요하고, 자백을 하면 오빠와 함께 한국에서 살게 해주겠다는 회유도 받았다고 밝혔다.
실제 유가려씨의 자백을 근거로 짜여진 수사내용은 많은 문제점을 노출했다. 뉴스타파는 국정원 수사결과의 여러 문제점을 취재했다.
언론보도는 탈북자 1만명 정보 전달->기소는 200명 전달->실제는 25~30명?
일부 언론은 탈북자 만 명의 정보를 북한에 전달했다고 대서특필했지만 검찰이 기소한 것은 200명 정도에 그쳤다. 더구나 검찰은 정보가 구체적으로 전달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유우성씨가 메일 등으로 명단을 전달하지 않았겠느냐는 정도다. 그나마 검찰이 제시한 명단도 중복자가 많고 한국 출신자도 상당수 들어있다. 또한 명단을 전달했다는 시기 이후에 작성된 명단도 많아 실제는 국정원 주장처럼 주소까지 있는 탈북자 명단은 25-30명에 불과하다는 것이 변호인들의 주장이다.
또한 국정원은 유가려씨가 세차례의 명단 전달 중 두 차례를 QQ메신저로 전달했다고 했는데 뉴스타파가 유씨의 QQ메신저 가입시기를 확인한 결과 명단 전달 시기 이후인 것이 확인됐다.
국정원은 5번 밀입북 주장, 유씨 남매 “중국으로 이사해 북한 갈 일 없다”
국정원은 유가려씨의 진술을 토대로 유우성씨가 5번이나 밀입북했다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뉴스타파 취재 결과 2005년 5월 모친 사망 당시에 장례 참석차 북한에 들어간 경우 외에는 밀입북하지 않았다는 유씨의 주장이 신빙성이 큰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특히 국정원은 엄연히 중국 연길지역에서 촬영된 사진을 북한 회령에서 촬영했다고 주장하며 밀입북의 증거로 제시하기도 하는 등 최고 국가정보기관의 수사결과라고는 믿을 수 없는 허점들이 드러났다.
국정원은 왜 보위부 공작원을 수사하지 않았을까?
유가려씨는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공작원이라고 스스로 자백했다. 그러나 국정원은 마지막까지 유씨를 ‘수사’하지 않고 ‘참고인조사’만 했다고 주장했다. 왜 그랬을까?
국정원이 정식으로 수사에 착수했다면 형사소송법에 따라 구속기간을 제한받고 변호인과의 접견도 거부할 수 없었다. 결국 국정원은 참고인 조사라고 주장함으로써 유가려씨를 무려 179일간 합동신문센터의 독방에 둘 수 있었던 것이다. 유가려씨의 간첩자백을 최대한 유지하기 위해 그녀가 외부와 접촉하는 것을 차단하려 한 것이라는 의혹이 짙다.
이번 사건은 국정원이 간첩수사라면 무슨 일이든 눈감아주던 시대에 횡행하던 비민주성, 무능에서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북한이라는 희대의 독재 체제를 대적하다 스스로 그 체제와 닮아버린 듯한 국정원의 모습이 뉴스타파 취재에 고스란히 담겼다.
[여동생]
“우리 엄마.”
(어머니 사진이세요?)
“네.”
(돌아가신 어머니?)
“네.”
오빠는 어머니 사진을 늘 가까이 두고 살았습니다. 모든 일이 잘 풀렸으면 유가려씨가 오빠와 함께 살았을 이곳에 지금 오빠는 없습니다. 오빠는 지금 동생의 진술로 간첩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지난 1월 언론은 탈북자 만 명의 정보를 북한에 넘긴 간첩사건을 대대적으로 보도했습니다. 서울시 공무원인 탈북자가 간첩이라고 했습니다. 바로 오빠 유우성씨였습니다.
유우성씨는 성공한 탈북자였습니다. 탈북자의 모범으로 방송에도 여러 차례 소개됐습니다. 엘리트 탈북자가 아닌 바닥에서부터 커 온 탈북자로 큰 기대를 받았다고 합니다.
[김성원 유코리아 대표 /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 저자]
“우성씨 같은 경우에 북한에서 비록 의대를 나왔지만 남한에서 밑바닥부터 그렇게 생활을 해서 막노동도 해보고 지방에서도 생활해보고 기초생활수급자가 돼서 다른 탈북자들하고 똑같이 고생하면서 공부도 하고 그랬는데. 굉장히 다른 탈북자들이 좀 동질감 느끼는, 탈북자 사이에서는 나도 노력하면 우성이처럼 될 수 있다, 그래서 항상 롤모델처럼...”
그러나 지난해 10월 30일 유가려씨가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문제가 시작됐습니다. 여동생은 공항에서 탈북자로 신고하기 전 오빠에게 중국 여권을 주었습니다. 여동생은 북한에서 나고 자랐지만 중국 여권을 가진 화교였습니다. 탈북자로 인정받으려고 여권을 숨긴 것입니다.
국정원이 운영하는 중앙합동신문센터로 간 유가려씨는 첫 날부터 독방에 수용됐습니다. 화교가 아니냐며 혹독한 추궁이 시작됐습니다.
[유가려 / 유우성의 여동생]
“아직도 아니야? 아직도 화교 아니야? 아직도 유광옥이야? 너 이름 가려 맞지? 맞잖아, 아닙니다 하니까 갑자기 와서 머리를 잡아당겨서 벽에다가 찧게 했거든요. 부딪히게 하고 찧게 하고..”
(구두 뒷굽으로 찼어요? 앞굽으로 찬 게 아니고?)
“뒷발로 허벅지를 이렇게 찼거든요.”
(어떤 부위를 여기? 무릎?)
“여기 다리 부분을”
(허벅지 부분을?)
“네네 막 찼거든요. 막 차서. 아줌마 수사관이 너 안 되겠다. 너 질기구나, 하면서 전기고문실 데려가야겠다, 정신 번쩍들게 해주겠다고 해서 내가 안 가겠다고. 전기고문실 들어가기 무서워서 제발 안 가겠다고 봐 달라고 울었습니다.”
조사관들은 화교 유가려라고 써서 붙인 뒤 탈북자들이 있는 곳에 데려가 세워놓기도 했습니다.
[유가려 / 유우성의 여동생]
“내가 얼굴을 푹 숙이고 있으니 와서 밑으로 쳐다보는 사람도 있거든요. 그 상황에 내가 너무 당황스럽고 두렵고, 망신당해서 부끄러웠고 황당하니까 많이 울었어요, 그때.”
한편 조사관들은 법정에서 이를 부인했습니다.
[A]
“폭행한 사실이 없습니다. 유가려씨가 북한 보위부엥서 고문 당한 경험을 합신센터에서 당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B]
“그 정도로 맞았다면 병원에 갔어야죠. 이름 붙이고 간 것은 유가려씨가 탈북자인 것이 증명될 것이라며 가자고 해서 간 것입니다.”
화교라는 사실을 자백한 후에는 간첩혐의에 대한 조사가 계속됐습니다. 결국 일가족이 북한의 공작원이고 탈북자 정보를 북한에 세 차례 전달했고 오빠가 여러 차례 밀입북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다가 진술을 번복하기도 했습니다.
“저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거짓 진술한 내용에 대해 말씀드리면 오빠가 어머니 사망할 때 북한에 들어온 외에는 한 번도 들어온 적이 없습니다. 그후에 들어온 것은 제가 다 거짓 진술한 것입니다. 오빠가 서울에 사는 북한 사람들 자료를 전달한 적도 없습니다.”
[유가려 / 유우성의 여동생]
“내가 완강하게 버텨야겠다. 어떻게든 버텨야 하는데 버티지 못하는 거예요. 내가 빠지기 힘들구나. 올가미에 걸렸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내가 너무 힘들어서 할 수 없이 인정하고, 너무 힘들어서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표창원 전 경찰대 교수]
“180일이라는 너무나 긴 시간을 다른 사람의 조력을 받지도 않고 연락교통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밤이나 낮이나 아무 때나 취조를 당하고 또는 협박 회유, 기망 등에 노출되어 있다면 이건 아주 정말 특수한 정신력 소유자, 독립투사 이상의 특별한 사람이 아닌 한 취조하는 사람, 수사관이 원하는 진술을 해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백하면 한국에서 오빠와 함께 살게 해주겠다는 달콤한 회유도 있었다고 합니다.
[유가려 / 유우성의 여동생]
“김현희가 사실을 인정하니까 반성하니까 교화도 안 보내고 살게 해주고 집도 해 주고 지금까지 보호해주고 지금은 또 그 후에 책도 많이 써서 돈 많이 벌어 잘 살고 있다.”
유가려씨는 아직 합동신문센터에 수용돼 있던 3월 4일 증거보전 재판에서 국정원 수사관들이 한국에서 살 수 있게 해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분명히 증언했습니다.
[유가려 / 유우성의 여동생]
(국정원 수사관들이 증인이 진술만 잘 하면 오빠도 증인도 금방 나와 한국에 살 수 있다고 얘기하지 않던가요?)
“오빠가 죄를 다 처벌 받아 씻고 나오면 오빠랑 살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살 수 있다고 하던가요, 중국에서 살 수 있다고 하던가요?)
“한국에서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황필규 공익인권법재단 공감 변호사]
“국정원은 체류자격이 없는 외국인에 대해서 더군다나 출입국 관련법 어긴 외국인에 대해서 체류자격을 부여할 권한이 없거든요. 그래서 아무런 권한이나 뭐 없이 사실은 자신의 권한이 없는 사항에 대해서 약속을 한 거기 때문에 명백히 거짓말이고, 명백히 기망에 해당되는 것이고 저희는 그렇게 판단하는 거죠.”
담당검사는 사실대로 말하라고 했다가 막상 진실을 말하자 태도를 바꿨다고 합니다.
[유가려 / 유우성의 여동생]
“다 거짓진술이었다. 오빠 밀입북 2006년 어머니 돌아가실 때 한 번 하고 이후엔 한 적 없다. USB 전달해 준 적 없다. 그 이야기 했거든요 사실대로. 내가 사실대로 말하니까 얼굴 바뀌면서 이렇게 얘기하면 안 된다. 이렇게 얘기하면 도와줄 수 없다. 이렇게 얘기하지 말라...”
[이시원 담당검사(당시 서울지검 공안1부)]
(이야기를 했는데 검사님께서 그렇게 하면 못 도와준다, 이렇게 해서 다시 재번복을 했노라, 이렇게 얘기했는데. 그 부분에 대해선 아직 말씀이 없으시더라고요.)
“그 부분은 제가 기록에 정확히 표출되어 있고 심문 때도 잘 되어 있고 그래서 안 했을 수 있죠.”
이시원 검사는 재판에서 유가려씨가 진술을 번복한 시간은 1분도 채 되지 않았고 곧 다시 인정했다고 말했습니다.
유가려씨는 중국으로 추방되기 직전 변호인들의 인신구제청구를 통해 국정원에서 나왔습니다.
[유가려 / 유우성의 여동생]
(독방에 있었던 기간이 얼마나 됩니까?)
“나오기 전까지 6개월 됩니다.”
(6개월 동안 독방에 혼자서?)
“네.”
(국정원 직원들만 만나고?)
“네. 직원들만 만나고.”
(다른 사람들 만날 기회가 없고?)
“네. 만나지 못했습니다.”
여동생은 180일 간 독방에 수용된 상태에서 오빠가 간첩이라고 진술했지만 또 여러 차례 그 진술이 거짓이라고 번복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빠가 간첩이라는 이 진술을 믿을 수 있을까요? 국정원과 검찰은 여동생이 오빠를 고발했다는 점에서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과연 그런지 핵심 증거들을 살펴봤습니다.
동아일보를 비롯한 일부 언론은 유우성씨가 탈북자 만 명의 정보를 넘겼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명단을 보낸 증거는 없습니다. 유우성씨의 이메일 등에서 발견된 몇몇 단체의 명단을 놓고 북한에 전달하지 않았겠느냐고 추정하는 식입니다. 게다가 명단 중 상당수는 탈북자가 아닙니다.
[녹취P팀 관계자]
(19명이 있는데 이중에서 탈북학생이 전체가 아니다?)
“네. 전체가 아닙니다.”
(탈북학생이 반 정도라고 보면 되는 걸까요?)
“네.”
한 단체의 장학금 신청서에 가장 많은 탈북자 신원이 적혀 있습니다. 유우성씨가 회장이었던 단체입니다.
[INTY회 후원회장]
“우성이가 그 당시에 회장이었기 때문에 자료를 회장단 임원회의서 만들어 저희들한테 주게 되어 있지요. 그래서 저희들한테는 이게 굉장히 공식적 서류이고, 장학금 지급하기 위한 기본 자료가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게 비밀스러운 거는 아니고 당연히 해야 할 작업을 했고 우성이가 회장이기 때문에 당연히 본인이 가지고 있을 자료죠.”
그런데 이 중 상당수는 2012년 8월에 신청한 것입니다. 검찰이 기소한 마지막 명단 전달시기보다 뒤여서 북한에 전달됐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정리하면 일부 언론은 유우성씨가 북한에 만 명의 탈북자 명단을 전달했다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나 검찰은 170에서 200명의 명단을 전달했다고 기소했습니다. 그런데 검찰이 제출한 명단 중 마지막으로 전달했다는 날짜인 2012년 7월 이전에 작성된 것은 74명에 불과합니다. 그나마 검찰주장처럼 주소가 포함된 것은 25명에서 30명 정도입니다. 문제는 이 명단조차도 전달됐다는 근거가 없다는 것입니다.
중국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입니다. 유가려씨는 이곳에 한 PC방에서 오빠가 보낸 명단을 받았다고 진술했습니다. 명단을 받은 뒤 열어보니 주소와 생년월일, 연락처가 적혀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취재진이 한글파일을 클릭하자 깨어져 나타났습니다. 한글프로그램이 없는 것입니다. 유우성씨가 갖고 있는 대부분의 명단은 한글파일이었습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국정원은 유가려씨가 이용했던 QQ메신저로 명단을 전달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씨는 명단을 전달받은 시기보다 뒤에 QQ메신저를 시작했다고 말합니다.
[유가려 / 유우성의 여동생]
(명단을 보냈다는 2011년 2월이나 2011년 5월엔 QQ메신저를...)
“가입하지 않았습니다.”
유씨의 QQ메신저 나이 Q령은 1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가입기간이 1년은 넘고 만2년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유가려씨는 2011년 6월 이후에 가입한 것이어서 2011년 2월과 5월에 명단을 전달할 수는 없었습니다.
첫 번째 밀입북은 2005년 5월.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장례에 참석하려고 북한에 들어간 경우입니다. 유우성씨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국정원은 이후 4번의 밀입북이 더 있었다고 하고 있고 유씨는 부인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유씨 가족은 2011년 북한을 완전히 떠나서 중국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북한 보위부와 관계를 맺을 일도 또 북한에 들어갈 일도 없다고 말합니다.
중국 쪽에서 보는 북한 회령지역. 유가려씨 일가가 살던 곳입니다. 국정원은 유씨 가족이 아직도 회령에 집을 갖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유씨 가족은 지난 2011년 집을 팔고 회령세관을 통해 중국으로 나온 뒤 한 번도 북한에 간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곳은 유우성씨의 어머니 고 조인화씨의 묘입니다. 2011년 가족이 북한을 나올 때 유골을 이곳으로 모셔왔다고 합니다.
[조인근 / 유우성의 이모]
“우성이가 북한에 뭐하러 갑니까? 아무도 없는데 거길 뭐 하러 갑니까? 할아버지 할머니 다 돌아가셔서 다 강에 뿌려드렸습니다.”
그러나 국정원은 2012년 설 전 날인 1월 22일 유우성씨가 두만강을 건너 회령으로 들어갔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이때 아버지와 만나 고위부에서 훈장을 받고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국정원은 그 증거로 유우성씨의 컴퓨터에서 복원한 이 사진 두 장을 제시했습니다. 2012년 설에 유우성시가 북한 회령 집에 있던 앨범을 휴대폰으로 찍어왔다는 것입니다. 밀입북의 증거였습니다. 검사는 유가려씨를 통해 이 증거를 확인했습니다.
[검사]
“증인의 오빠는 연길에서 돌아와 회령에서 보위부 사업을 했다는 말을 했지요.”
(네.)
“당시 증인은 오빠의 휴대전화를 살펴보다 회령 집에 있던 사진들이 저장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나요?”
(네.)
“자, 이 사진들이 오빠의 휴대전화에서 보았던 사진들인가요?”
(네.)
[김인성 한양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앨범이잖아요. 이렇게 앨범을 찍은 거예요. 근데 이게 앨범이 어디 있었나? 라고 하는 주장에 국정원은 북한 안에 있었다.”
(정말 북한에서 찍은 것일까요?)
[김인성 한양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이 사진이 여기서 찍혔다는 거죠?)
“그렇죠. 네.”
(그런 위치정보가 나온 거죠?)
“아이폰에서 위치 정보가 저장된 겁니다.”
(북한이 아니네요.)
“네. 북한 아니고 중국에 있는 곳입니다.“
사진을 찍은 곳으로 나타난 곳은 연변 조선족 자치주, 유가려씨 가족이 살던 중국이었습니다.
문제는 또 있습니다. 김인성 교수는 유우성씨 컴퓨터에서 국정원이 증거로 제출하지 않은 사진을 복원해냈습니다. 북한으로 보이지 않는 노래방에서 이 사진은 1월 23일 설날 밤 11시 53분에 찍혔습니다. 국정원에 따르면 북한에 아들과 함께 있어야 할 아버지가 중국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김인성 한양대 컴퓨터공학과 교수]
“누가 하더라도 포렌식(디지털증거조사) 프로그램을 돌리면 이 같은 아이폰으로 찍은 날짜 사진, 이게 나오게 마련이고요. 그런 상황에서 피의자한테 유리한 사진이 제출되지 않았다는 거는 포렌식 작업을 잘못해서 그랬다기보다는 결과물을 선별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렇게 판단할 수 있죠.”
(국정원에서?)
“네네.”
새 증거들이 나오자 검찰은 공소장을 변경했습니다. 밀입북 한 날짜를 이틀 뒤인 1월 24일로 하고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밀입북 했다가 그날 밤 아들만 나오는 것으로 바꿨습니다. 1월 23일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며 논 뒤 아버지와 아들이 두만강을 한밤중에 건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우성씨의 사촌 형은 다음 날인 1월 24일 연길에서 삼촌에게 새배를 했다고 합니다.
[유우성의 사촌형]
“그 날 술 먹을 때 이O가 전화 왔댔습니다. 우성이가 받았습니다. 오라고. 그때 우성이가 아버님 말하니까. 내 조카 왔다. 그래서 많이 먹었습니다. 오후 4시쯤... 그래서 헤어지고 아마 이O네 집에 가서 식사도 했습니다.”
유우성이 구치소에서 기억을 되살려 쓴 기록에도 이 날 사촌형이 와서 친구의 집에 갔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날 밤 전날 놀던 노래방 옆 건물의 스탠드바에서 다시 놀았다고 합니다.
[유우성 지인]
(거기서 그 다음 날 여기 왔다는 거죠?)
“네.”
(여기서 몇 시까지 놀았어요?)
“여기도 저녁이니까 한 12시 됐을 겁니다.”
(밤 12시?)
“네. 그렇게 놀다가 우성이형 아버지랑 우성형님은 가고 그 동생 나, 친구들 같이 또 있어서...”
(여동생하고 친구들하고는 남아서 같이 더 먹고?)
“네. 더 먹고.”
(그때 저 광일(우성)씨하고 아버지는 어디로 갔는지는 아세요?)
“집에 갔지.”
(집으로?)
“12시 다 됐는데 저녁에”
[유진룡 / 유우성의 아버지]
“내가 들어갈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거기(북한) 아무 것도 없는데 내가 왜 거기 갑니까?”
[유우성의 사촌형]
“우리 막내 삼촌인데 머리가 완전히 잘못됐습니다. 지금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자식 둘 다 (그렇게 돼서) 반 년 동안 매일 하루 평균 한 시간 두 시간 밖에 못 자요.”
구치소에 있는 오빠를 만나고 나오는 길입니다. 한국에 온 지 8달 만에 오빠와 둘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유가려 / 유우성의 여동생]
“내일도 가겠다니까 오지 말라고, 보는 게 더 가슴 아프다고...”
“앞으로 우리 가족처럼 다른 가족들도 억울하게 악용당하는 일이 생겨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유가려씨는 7월 3일 한국을 떠났습니다.
유우성씨는 비록 어머니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한 차례 북한에 들어간 것은 사실이고 화교라는 것을 숨기고 탈북자로서의 혜택을 받아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간첩수사라니요. 국정원의 이번 수사는 너무나 큰 문제점을 보이고 있습니다.
간첩 잡는다면 모든 것을 눈감아주던 시대에 횡횡하던 비민주성, 그리고 무능해서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이 지금 국정원의 모습입니다. 북한이라는 희대의 체제를 대적하며 그대로 닮아버린 듯한 국정원의 기괴한 모습을 더 이상 우리 국민은 용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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