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서 쓰고 쫓겨난 KDI 청소 노동자

2018년 02월 20일 16시 59분

※ 이 기사는 2018년 1월 뉴스타파 탐사보도 연수에 참가한 연수생들(김지성, 이영근, 이은솔, 허현호)이 실습 과제로 제출한 결과물입니다.

“비정규직의 고용 안정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정규직으로 전환하여야 한다.”

지난 2010년, 국책연구기관 한국개발연구원(이하 KDI)이 발간한 논문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기업은 계속적인 업무에도 비정규직을 채용하고 간접고용에 대해서는 뒤로 숨는 경향이 있다”며 원청 기업의 책임을 요구하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비정규직을 줄이고 고용안정을 꾀하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방향과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정작 KDI에서 일하는 청소노동자의 현실은 이 논문의 내용과는 거리가 멀다. 2013년부터 KDI에서 청소 일을 해 온 두 명의 노동자는 지난 2017년 12월, 4년간 일한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다. 작년 이맘때 썼던 ‘각서’ 때문이다.

 “각서 안 쓰면 일 못 한다”

2017년 1월, KDI에서 청소노동자로 일하던 임학수, 정근향 씨는 용역업체로부터 종이 한 장을 받았다. ‘1년만 일하고 자진 퇴사하겠다’는 내용이 적힌 각서였다. 업체 측은 ‘더 일하고 싶으면 이 각서를 쓰고 일하라’고 했다. 이들은 오래 일한 직장이고, 나이가 많아 다른 데 가기도 어려울 거라는 판단을 내렸다. 생계를 위해 당장 일을 해야 하는 입장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각서를 썼다.

▲ ‘1년만 일하고 퇴사하겠다’는 내용의 각서. 한국자산관리산업(주)은 각서 내용이 담긴 프린트물(왼쪽)을 주고 임 씨와 정 씨가 자필로 받아쓰게 했다.(오른쪽)

이들은 왜 각서를 쓰게 된 걸까. 용역업체가 바뀌면서 고용 승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2016년 12월, KDI의 청소, 경비 용역을 담당하는 하청업체가 (주)효산에서 한국자산관리산업(주)으로 변경됐다. 바뀐 용역업체는 총 일곱 명에게 계약만료를 통보했다. 평가라고는 1명당 5분에서 10분 사이의 형식적인 면접이 전부였다. 질문은 “동료와의 관계는 좋은가”, “왁스 작업은 해봤나” 등 통상적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재계약 시한 3일 전에야 이들은 재계약 불가 사실을 전달받았다. 왜 계약이 연장되지 않은 건지 이유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한국자산관리산업(주) 관계자는 각서를 작성하게 한 구체적 이유에 대해 “대외비이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전 하청업체였던 (주)효산의 평가를 고려해 종합적 판단 하에 미계약 통보를 했다는 것이다. 자신들은 법을 어기지 않았으며 지방노동위원회의 판단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원청 KDI의 책임을 묻자, 하청업체의 인사 문제에 대해 원청은 관련이 없다고 일축했다.

지난 2012년 1월 발표된  고용노동부의 「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고용을 승계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지침은 ‘계약과정을 개선하고 발주기관의 관리감독 등을 강화함으로써 용역근로자 근로조건을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정부출연연구기관인 KDI에도 이 지침이 적용된다. KDI와 용역업체  한국자산관리산업(주)이 맺은  「청소 및 경비 용역 과업지시서(2016.12.)」에는 ‘용역근로자 보호지침에 따라’,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고용을 승계한다”고 적혀있다.

▲KDI와 용역업체의 계약 및 업무 지시를 위해 작성된 「청소 및 경비 용역 과업지시서 (2016.12.)」(오른쪽)에는 정부 지침인 「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왼쪽)을 근거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고용을 승계’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즉, 이들은 애초에 각서를 쓸 필요가 없었던 것. 민주노총 법률원 최영연 노무사는 “고용지침에 따라 회사 측은 고용을 승계할 의무가 있고, 노동자들은 고용이 유지될 법적 지위가 있다”고 설명했다. 노동자들은 이 사실을 모르는 상태에서 각서를 작성했다. 결국 각서를 작성한 지 1년이 지난 2017년 12월, 임 씨와 정  씨는 용역업체로부터 이 각서를 이유로 퇴사를 통보받았다.

이러한 고용불안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었다고 노동자들은 말한다. KDI에서 용역계약을 맺은 업체는 일 년마다 노동자와 계약을 갱신했다. 매년 서너 명은 재계약이 되지 않았다. 2015년 입사한 김애자 씨는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며 “청소에 무슨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깨끗하게 내 집처럼만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다들 열심히 일했다. 해고될 만한 사람은 없었다.” 고 말했다.

고용불안 때문에 노동자들은 정신적 스트레스에도 시달렸다. 노동자들의 태도를 평가하는 권한은  소장에게 있었다. 용역업체가 바뀔 무렵 소장은 직원들에 대한 평가를 작성해 새 용역업체에 전달했다. 민중당 윤종오 전 의원이 입수한 자료에 따르면, 자질이 부족하다’, ‘스스로 깨우침이 없는 사람’ 등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평가들이 대부분이다. 매년 계약을 새로 맺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이런 평가에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미화원들이 잠깐 서 있기만 해도 “그럴 거면 집에 가지 왜 왔냐.”, “(재계약이 있는) 연말에 보자.” 등 중간 관리자가 폭언을 퍼부었다는 게 청소노동자 김 씨의 증언이다.

▲ 한국자산관리산업(주) 하 모 소장((주)효산에서 소장직 승계)이 개인에 대한 의견을 작성해 전달한 자료(왼쪽)와 2016년 12월 고용승계를 위한 면접의 담당자였던 한국자산관리산업(주) 최 모 과장이 작성한 신규채용면접평정표(오른쪽).

‘용역근로자 보호 지침’ 있지만… ‘눈 가리고 아웅’

「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에는 고용승계와 관련된 조항 이외에도 ‘발주기관은 용역근로자가 이용할 수 있는 위생시설(휴게실, 세면·목욕시설, 세탁시설, 탈의시설 등) 설치 또는 제공’을 명시하고 있다. KDI의 경우 이 조항을 형식적으로만 지키고 있을 뿐, 실제로는 노동자를 위한 휴게·위생시설이 부족한 형편이다.

16명의 여성 청소 노동자에게는 6평 정도의 휴게실이 제공된다. 8명에서 9명 정도가 쉴 수 있는 공간이다. 나머지 청소 노동자는 근무지 근처 장애인 화장실이나 창고에서 휴식을 취하고 점심을 해결한다. 사무실을 담당하는 청소원은 그나마도 없어 빈 회의실을 전전한다.

▲KDI 청소 노동자가 휴게실로 사용하고 있는 장애인 화장실.

청소 노동자 3명이 일하는 KDI 대학원 기숙사의 경우, 2016년까지는 플라스틱 용기에 용변을 봐야 했다. 기숙사 방 안에만 화장실이 있고 건물 안에 청소 노동자가 이용할 수 있는 공용 화장실이 없기 때문이다. 2017년에 들어서야 기숙사 방 한 칸을 제공받아 화장실을 사용하고 휴게실로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KDI와 고용노동부의 입장은?

KDI 용역관리 책임자인 김 모 팀장은 정 씨와 임 씨의 미계약에 대해 “업체에서 종합적으로 판단을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김 팀장은 KDI의 관리감독 책임에 대해 “향후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고용 유지를 보장할 수 있도록 한국자산관리산업(주)과 업무 협조가 된 상황이다” 고 밝히면서도, 해고된 임 씨와 정 씨 관련 책임에 대해 “어디까지 원청의 책임이 있는 것인지 지방노동위원회의 판단을 받아보아야 알 것 같다”고 말했다. 현재 임 씨와 정 씨는 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해고 구제 신청’과 ‘부당 노동 행위 진정’을 제기한 상황이다.

용역업체 측은 내부의 종합적 평가에 의해 결정했다는 입장이다. 한국자산관리산업(주)은  “인사채용이 어떻게 객관적일 수 있냐”고 덧붙였다. 하지만 「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 설명자료(2015)」에 따르면 ‘고용 승계 거부는 업무 수행이 어려운 객관적 사유’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한편 사측은 평가지표는 내부자료이기 때문에 공개할 수 없다고 밝혔다.

고용노동부는 “간단한 면접으로 고용 승계를 거부하는 것은 고용승계위반”이라고 말했다. 「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 설명자료(2015)」에는 ‘용역업체가 변경되는 과정에 객관성이 결여된 임의적 평가를 통해 고용승계를 거부하거나 할 수 없다’고 나와 있다. 그러나 해직된 노동자 정근향 씨에 따르면, 한국자산관리산업(주)은 2016년 12월 정 씨와 5분 정도 면담 후 고용승계를 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

‘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 위반에 따른 처벌규정은 없다. 고용노동부는 매년 말 공공기관 400여 곳을 대상으로 ‘용역근로자 근로조건 보호지침’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실태조사는 고용승계 조항 명시, 시중노임단가 적용, 근로조건 보호 확약서 제출 등의 준수여부를 확인한다. 고용노동부는 지침을 준수하지 않은 공공기관에 시정권고만 한다. 이에 대해 고용노동부 공공노사관계과 관계자는 “공무원 내부규정이기 때문에 내부감사나 징계사유가 될 수 있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KDI의 경우, 고용노동부의 실태조사 기관에 포함되지 않아 고용노동부의 관리 감독을 받지 않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조성애 민주노총 노동안전보건국장은 “현재 근로감독은 예방 감독이 아닌 사후 감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근로 감독) 인력확충과 재교육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정경은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연구위원은 “공공기관 용역근로를 통해 원청인 공공기관은 비용절감의 혜택을 누린다”고 말했다. 정 위원은 “문재인 정부에서 65세 이하 용역근로자를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는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만큼 이 지침을 준수해 용역근로자의 고용안정성을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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