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족벌' 플러스] 최후진술 정연주 "역사의 심판대에 증언하겠다"

2021년 03월 31일 13시 15분

경기도 의왕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수장고에는 오래된 녹음테이프가 보관돼 있습니다. 자유언론을 위해 싸우다 동아일보 사주와 박정희 독재정권에 의해 해직된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 기자들의 유신법정 최후진술이 담겨 있습니다. 
박정희 유신독재정권 말기 이른바 ‘민권일지’ 사건과 관련,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된 동아일보 해직기자들의 항소심 결심공판에서 채록됐습니다. 살벌한 유신법정에서도 언론인의 기개를 굽히지 않았던 ‘진짜 기자’들이 피를 토하듯 쏟아낸 이 최후진술은 뉴스타파 영화 ‘족벌-두 신문 이야기’를 통해 일부 소개됐습니다.
뉴스타파는 이들의 최후진술이 현재 언론상황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고 기록 가치도 높다는 판단 하에 진술 육성과 녹취록 전문을 함께 공개합니다.  
<최후진술 김종철 “걸레 같은 신문방송 보는 게 고문”> 편에 이어 이번에는 역시 같은 법정에 섰던 정연주 전 동아일보 기자의 최후진술을 소개합니다. 1979년 7월 25일 서울고등법원 213호 법정 현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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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장: 피고인 정연주
정연주: 예 
재판장: 1946년 11월 22일생, 직업은 뭐죠?
정연주: 전 동아일보 기자입니다.
어젯밤에 오늘 출정을 해서 제 사랑하는 가족들과 저희 벗들, 선배들의 얼...(소리 끊김)
그런데 성 입구 양편에 장승이 둘이 이렇게 서 있는데 그 장승대 앞에 시뻘건 글씨로 한쪽에는 유신헌법, 한쪽에는 긴급조치, 이런 장승이 두 개가 서 있고 그 위에 시뻘건 글씨로 이렇게 영어로 돼 있는데 ‘팍스 킹덤(Park’s Kingdom)’ 그렇게 영어로 돼 있는 그런 성곽에 제가 들어가는 꿈을 꿨습니다. 
제가 성곽에 들어가니까 거기에 나의 많은 친구들, 고향 친구들,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도 반가워서 그 애들 이름을 부르고 ‘참 오랜만이다’ 이야기를 하는데 이 친구들이 영 손짓을 이렇게 이렇게 하면서 그냥 자꾸 나를 멀리하는 그런 몸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내가 ‘너희들 말이야, 내가 이렇게 반가움, 정을 표시하는데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느냐’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아주 무시무시하게 생긴 사람들이 칼을 딱 차고 쫓아와가지고 저를 밧줄로 꽁꽁 묶어가지고 어디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 재판소 비슷한 데 끌려간 기억이 나는데, 가니까 긴 이야기도 없이 대뜸 방망이 세 번 땅땅 두드리더니 ‘말을 하는 게 죄다’ 그러면서 ‘네 죄는 바로 말한 거다’, 그러면서 형벌을 가하는데 어떤 형벌을 가하냐면 이만한 면도날, 우리 수염 깎는 면도날이 이만하게 큰 건데 아주 날이 예리해요. 그걸로 내 성대, 목젖, 이 성대를 자르려고 여기 목에 착 오는 순간에 아주 제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잠을 깼습니다. 깨 보니까 여전히 성동구치소 감방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도 꿈도 끔찍하고 해서 혼자 생각하기를, 결국 내가 꿈속에서 말을 하다가 그 말을 많이 했다는 사실이 죄가 돼 가지고 성대가 날아갈 뻔했다, 그럼 내가 지금 왜 새벽에 깨가지고 이렇게 성동구치소 2점 몇 평짜리 안에 가족들도 내 옆에 없고, 참 이렇게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요새 교도관님들은 종종 농담 삼아 ‘반성의 뜻을 보이면 내보내줄 테니까 빨리 인마, 반성하고 오늘 법정에 나가서도 개전의 정을 보이고 어쩌고 하는 게 어떻겠느냐’ 하는 이야기도 하셨습니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개전할 게 없고 아무리 생각해도 반성할 게 없었습니다. 
제가 도대체 왜 성동구치소 그 감방에 누워 있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유가, 원인이 떠오르지가 않아요. 제가 그럼 범했다는 죄라는 게 뭐냐. 나를 여기 집어넣은 건 뭐냐.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한 게 죄’라는 겁니다. 
우리 사건의 발단이 된 작년 10.24 4주년 기념 특집의 ‘보도되지 않은 민주인권사건일지’, 그 내용이 별 게 아니에요. 나무를 나무라고 이야기 한 사실, 서울대학에서 애들이 데모했다, 함평고구마사건으로 농민들이 단식을 했다, 동일방직 여성 근로자들이 부당하게 똥물을 뒤집어썼다. (소리 끊김) 
우리들 10명의 동료들, 선배들이 지금 당해야 하는 고통의 원인입니다. 이런 정말 말할 수 없는 처절한 코미디, 이것이 이 땅에 지금 서슴없이 함부로 자행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법정에 서 있는 것이 저 정연주 자연인 누구, 김종철 자연인 누구, 이런 사람, 자연인이 이 법정에 서 있는 게 아니에요. 자유언론을 수호하자는 ‘동아투위’가 이 자리에 서 있는 거고 자유언론을 바탕으로 하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 법정에 서 있는 겁니다. 
바로 우리 사건은 이 땅에 현재 한국 언론이 얼마나 처참한 꼴을 하고 있으며, 이 땅의 정치 현실이 얼마나 처참한 꼴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느냐 하는 사실의 여지없는 폭로입니다. ‘왜 한국 언론이 이렇게 됐느냐’, ‘우리가 왜 이렇게 왔느냐’, ‘왜 잡혀 왔느냐’, ‘유신헌법이 어떻고 ,긴급조치가 어떻고 뭐 한국 언론의 역사가 어땠느냐’ 하는 사실은 앞의 저희 선배 여섯 분과 변호사님들, 누누이 다 설명하셨고 제 자신이 항소이유서에서 대략 이야기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반복은 피하겠습니다. 
시간도 많이 지나고 배도 고프고 하니까 간단하게 끝내겠습니다. 
이런 사건이 빚어진 건 한국 언론이 사실을 보도 안 했기 때문에 빚어진 거고, 유신헌법이라는 그런 독약과 같은 법이 있고 그 법을 바탕으로 한 긴급조치가 생겼기 때문에 잡혀온 건데, 그 뿌리가 저는 5.16 군사쿠데타 정권의 부도덕성, 그런 것도 길게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아요. 왜 하고 싶지 않냐면 지금은 모든 사실이, 우리 주위에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실이, 너무나도 명명백백하고 기본적인 상식만 가지고도 이해될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에 긴 이야기 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사건이 갖는 의미와 이 사건에 대한 제 자신의 심정만 간단히 말씀드리고 최후 진술을 마치겠습니다. 
이번 사건은 제가 평소에 존경하는 안병무 선생님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의 일들이 사건화 되어서 널리 알려졌다는 것이 저는 이 역사가 우리에게 베푼 축복이요, 하늘이 우리에게 준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작년 10.24 ‘민주인권사건일지’, 그 유인물이 사건화가 되지 않고 그냥 묻혀버렸다면 그저 우리 주변에 있는 몇몇 친구들, 우리 자신들밖에 못 봤을 건데 이렇게 고맙게도 이렇게까지 잡아줘서 사건화 시켜주셔서 적어도 우리의 가족들, 우리의 친구들, 그리고 여기 관계하시는 법관들, 혹은 교도관들, 거기까지라도 알려졌다는 사실, 그리고 여론화되었다는 사실, 그것이 결국 사건화 됨으로써 얻어지는 하나의 축복이 아니냐, 이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까 장윤환 선배께서도 말씀하셨다시피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이 조그마한 고난은 바로 이 시대의 양심이 당하고 있는 고난에 대한 우리의 동참인 것입니다. 
우리가 4년 전에 동아일보에서 집단적으로 폭력배에 의해서 쫓겨나간 것이, 쫓겨난 이후에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 우리의 의식이 성숙되고 우리의 정신이 더욱 고양되어서 마침내 ‘민중에게 자유를 민족에게 통일을’ 이라는, ‘민주민족 언론’이라는 우리의 자유언론 이념을 설정했던 것이 그런 고난을 통해서 얻어진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 사태, 우리 10명이 당하고 있는, 아니 우리 동아투위가 당하고 있는 이번 사건의 이 고난을 통해서 우리는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할 수 있다는 그 자유, 그 자유가 얼마나 어렵고 또한 얼마나 고귀한가를 이 자리에 우리는 이 고난을 통해서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인가 사실을 사실대로 보도할 수 있는 그런 자유를 우리가 획득할 때 그 자유는 결코 다시는 빼앗기지 않고 이런 고난을 통해서 얻은 자유이기 때문에 빼앗길 수 없다는 그런 고귀한 체험인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개인적으로 이번 사건 처음부터 제가 종로서에 잡혀간 그날부터 서울구치소, 혼자 11월 29일 날 그 썰렁한 독방에 갇히던 그 풍경, 그리고 그 이후의 온갖 일들, 심지어 재판부, 재판관님의 표정 하나하나, 법관의 표정 하나하나, 검찰관의 표정 하나하나까지 하나 남김없이 기록하여 역사에 증언해서 언젠가 있을 이 역사의 심판에 증언할 것입니다. 
역사에 대한 증언은 언론인으로서의 사명이며 우리의 아들들 세대에 가서는 다시는 이와 같은 끔찍한 비극, 이 처절한 희극이 되풀이되지 않기 위한 하나의 시금석이 되도록 우리가 역사에 증언해야 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아들들에 대한 우리들 아비 된 도리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사건의 이번 2심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이라는 것, 그것은 명약관화 한 것이고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사실들, 표정 하나하나까지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두 기록해서 이 역사에 증언할 것입니다. 
(박수 소리)
판사: 조용히! 법정 질서 유지에 노력해요! 결심하겠습니다. 
선고는 8월 8일 오전 10시에 선고하겠습니다. 이상.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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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8월 8일 항소심 선고공판에서 정연주 전 동아일보 기자는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사망하고 그 해 12월에야 면소 판결로 출소할 수 있었다.
제작진
편집윤석민
녹취 정리조연우
디자인이도현
웹출판허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