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독립언론 협업센터 내부 공사 시작했습니다
2019년 06월 21일 19시 00분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民國 100년 특별기획, 누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가> 시리즈를 2018년 8월부터 2019년 하반기까지 계속해서 보도합니다. 올해는 1919년 3.1 혁명 100년,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뉴스타파는 지난 100년을 보내고 새로운 100년을 맞는 중요한 시점에서 이 특별기획을 통해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을 지배해 온 세력들을 각 분야 별로 분석하고, 특권과 반칙 및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통찰을 99% 시민 여러분과 함께 이끌어 내고자 합니다. 뉴스타파는 <民國 100년 특별기획, 누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가> 프로젝트를 통해 일제와 미 군정, 독재, 그리고 자본권력의 시대를 이어오면서 각 분야를 지배해온 세력들이 법과 제도를 비웃으며 돈과 권력을 사실상 독점하고 그들만의 특권을 재생산한 현재의 지배계급 시스템을 가감없이 들춰내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미래 세대가 과거 지배 체제가 극복된, 그래서 보다 정의롭고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나라에서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며 자기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시스템을 함께 모색해 나가려 합니다. -편집자 주 |
일신의 영달을 버리고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아버지를 둔 탓일까. 해방 조국에서도 김정육은 평생 가난을 숙명처럼 달고 살아야 했다. 그의 아버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국무위원, 해방 후 반민특위 위원장을 지낸 김상덕이다.
김상덕은 독립운동을 하느라 세 자녀를 제대로 돌보지 못했다. 어린 세 자녀는 늘 배고픔을 참아야 했다. 3살 여동생은 영양실조로 숨졌다. 아버지는 남은 두 남매를 고아원에 맡겨야 했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고아원에 가기 전, 어린 남매는 난생 처음 보는 음식을 마음껏 먹었다. 아버지와 헤어지던 날, 김정육은 휘영청 밤하늘에 걸린 보름달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
해방이 되자, 아버지는 국회의원이 됐고 반민특위 위원장을 맡았다. 그러나 반민특위는 좌절됐고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아버지는 납북됐다. 남은 가족에게는 ‘빨갱이’라는 멍에가 씌워졌다. 연좌제로 인해 김정육은 번듯한 직장에 취업할 수도 없었다.
김정육은 한때 대학에 입학한 적이 있다.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들이 그렇듯 그도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어린 시절, 김구와 신익희 등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자라며, 한문 등을 터득한 게 전부였다. 그만큼 배움의 갈망은 컸다. 김정육이 선택한 곳은 국민대였다. 아버지와 함께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신익희가 초대 학장과 이사장으로 있던 학교다. 국민대에서 김정육은 법학도를 꿈꿨다.
제가 선택한 대학이 국민대학입니다. 당시 신익희 선생이 학장으로 있었어요. 나중에 신익희 선생은 반민특위가 박해를 받을 때, 우리 집에 여러차례 와서 아버지(김상덕)하고 대책을 논하고 응접실에서 빼갈 한 잔으로 마음을 달래면서 돌아가고는 했어요.
그러나 곧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아버지 친구들의 도움으로 첫 등록금을 낼 수 있었지만, 더이상 학비를 마련하지 못했다. 중퇴했다. 그리고 평생 막노동과 신문배달을 하며 생계를 이어갔다. 김정육에게 공사판은 “신원증명서 없이 일하고 돈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의 표현을 빌자면 공사판은 “고마운 직장”이었다.
대한민국 대학 역사에서 국민대학교는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민립 대학이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들이 건립을 주도했다. 국민대학교 설립 기성회가 결성됐는데, 고문에는 백범 김구와 김규식, 명예회장은 조소앙, 회장에는 신익희가 선임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45년 11월 고국에 돌아오자마자 국민대학 설립을 미 군정청의 도움없이 독자적으로 추진했다. 해방 조국에서 임시정부의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새로운 민주국가의 건설에 필요한 인재를 키울 교육기관이 절실했던 것이다. 자식들에게 배움을 주지 못한 게 한으로 남았던 독립운동가들의 간절함도 담겨 있었다.
교사 터와 시설을 불하받지 못하는 등 당시 미 군정청의 비협조에도 국민대학교는 1946년 9월 문을 열었다. 신익희가 초대 학장과 이사장을 맡았다.
그러나 신익희가 물러나고, 반민특위가 좌절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국민대는 이승만의 비호 속에 친일세력이 득세하면서 서서히 변질되기 시작했다. 총독부 관료 등 친일 인사들이 잇달아 학장 자리를 차지했다.
초대 학장 신익희가 물러난 국민대에는 친일 전력을 지닌 이들이 총장과 이사장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2대 학장, 박이순은 일제 강점기 군수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다. 그는 국방헌금, 애국기 헌납자금 모금 등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했다. 1938년 5월 박이순은 황국신민으로서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할 것을 독려하는 기고문을 썼다.
4대 학장 최문경도 일제 강점기 군수 출신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아버지 최연국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최문경은 박정희 정권에서도 잘나갔다. 외무부 차관과 대사 등 요직을 두루 맡았다. 독립운동가에게 중형을 내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 일제 판사 김세완도 국민대 학장과 이사장이 됐다.
독재에 부역했던 이들도 국민대 총장과 이사장을 꿰찼다. 1984년부터 4년 동안 국민대 3대 총장을 지낸 정일영은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유신정우회 의원을 두차례 지냈다. 1980년 전두환 군사정권에서 국보위 의원에 참여한 정범석은 그 이듬해 국민대 초대 총장에 올랐다. 박정희 정권 때 장관과 부총리를 거쳐, 전두환 정권에서는 국정자문위원에 임명되는 등 줄곧 군사독재에 부역했던 신현확도 4년 동안 국민대 이사장을 맡았다.
현재 국민대 이사장은 쌍용그룹 창업자 김성곤의 손자다. 독립운동가들이 만든 국민대학을 친일반민족 행위자와 독재 부역자들이 지배하다, 이제 재벌 후손이 쥐고 있는 것이다. 이계형 국민대 특임교수(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 전문위원)는 “언젠가는 임시정부가 지향했던 대학을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친일과 독재 세력에 장악된 대학은 국민대 뿐만이 아니다. 뉴스타파는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국립중앙도서관을 찾았다. 이곳에서 70여 년 전 한 신문기사를 찾았다. 해방 이후 1945년 9월 미국 군정청이 임명한 한국인(조선인) 교육위원회 위원 명단이다.
희미하게 드러나는 이름, 해방된 나라에서 대한민국 교육을 책임질 사람들, 하지만 상당수가 친일 행적으로 얼룩져 있었다.
김성수, 김활란, 백낙준, 현상윤, 유억겸 등 5명. 일제 강점기 이들의 친일부역 행위는 적극적이었고 자발적이었다. 일제가 저지른 침략전쟁(대동아전쟁)을 적극 찬양했고 일왕을 위해 전쟁에 나가 죽을 것을 선동했다. 여자들은 일본군의 성노예로, 남자들은 일제의 전쟁에 끌려가야 했다.
그러나 친일부역 행위로 처벌받기는커녕, 교육위원으로 임명됐고 이후 대한민국 교육계의 핵심인물이 됐다. 해방된 지 60년이 지난 2009년이 돼서야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했다. 김성수의 경우 건국훈장 서훈도 최소했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이들이 남긴 친일반민족행위의 기억은 희미해져버렸고, 이미 민족 교육의 스승이 돼 있었다. 이들을 기려 대학마다 세워져 있는 동상이 뒤틀린 역사를 증명한다. 연세대에 있는 백낙준 동상에는 “일생동안 연세와 민족을 붙들고 키운 연세의 정신적 지주시며 민족교육의 스승이시며 겨레의 지도자시고 하나님의 종이시다.”라고 적혀 있다. 김성수의 후손들은 대를 이어 학교와 언론을 지배하고 있다.
박정희가 군사쿠데타에 성공한 후 국가재건회의 최고의장이 된 1962년. 의장실에서 면담하고 있는 사진 속 남자를 기억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친일거두 박흥식이다.
국가기록원에서 찾은 이 기록사진은 “1962년 1월 18일,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박흥식 화신그룹 총수 접견 담화”라는 짧은 설명 문구만 있다. 박흥식은 1963년 한일협정 당시에도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 사이의 친서를 전달한 밀사 역할을 했다.
일제 강점기 박흥식은 A급 친일반민족행위자였다. 일제 침략전쟁을 지원할 비행기를 생산하는 조선비행기주식회사의 사장이었고, 조선 최대 전쟁지원단체 조선임전보국단 상무이사도 맡았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박흥식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한다.
1949년 박흥식은 반민특위 1호로 체포됐다. 당시 경향신문은 친일거두 박흥식의 체포를 “민족정기로 죄악을 처단, 특별조위서 박흥식 체포 수감”이란 제목으로 “친일거두로 지목받은 화신사장 박흥식은 반민법 혐의자로 지난 8일 드디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박흥식은 이후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고, 일제 시기 못지 않게 잘 나갔다. 1967년 전경련 이사를 지냈고, 1978년에는 박정희에게 산업포장을 받았다. 박흥식은 자녀들에게 막대한 재산과 함께 학교와 장학재단을 물려줬다. 광신고와 흥한재단이 그것이다. 박흥식의 아들 박병석은 흥한재단 이사장과 광신고 이사장을 겸하고 있다, 박병석은 시가 30억 원이 넘는 청담동 고급빌라에 살고 있다.
광신고 법인 이사 중에 눈에 띄는 이가 있다. 노태우 정권 시절 정치특보였고 국무총리를 지낸 이홍구다. 그는 1999년 광신고 이사가 된 이후 지금까지 20년 동안 이사직을 유지하고 있다. 이홍구 전 총리는 광신고 이사뿐 아니라 황신덕이 설립한 추계예술대학의 법인 이사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황신덕은 징병과 학도병을 독려하는 등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다.
뉴스타파는 이홍구 전 총리 측에 광신고와 추계대 이사가 된 배경을 물었으나 이 전 총리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 전 총리의 측근은 “서로 잘 아니까 이사로 모신 것”이고 “명의만 이사로 해놓고 실제 (회의) 참석은 잘 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친일파 박흥식이 만든 흥한재단의 전,현직 이사에는 이홍구 전 총리 말고도 청와대 비서실장과 외무부장관을 지낸 최광수, 재선 의원 출신의 이응선 등이 있다. 뉴스타파는 서울 강남에 있는 흥한재단 사무실을 찾아 이들을 이사로 위촉한 배경을 확인하려 했지만 재단 측은 “나쁘게 기사를 쓸 거면 응하기 어렵다”며 답변을 거부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이자 매국수작인 민영휘가 설립한 휘문고의 역대 이사진 명단은 더 화려하다. 김정배 고려대 총장, 장충식 단국대 총장, 故 고병익 서울대 총장 등 대학 총장 출신이 5명에 이르고 강경식 경제부총리, 최규완 삼성의료원장 등도 있다.
지난 6월, 민영휘의 증손자인 민인기 전 휘문의숙(휘문고) 이사장이 50억 원 횡령 등의 혐의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민인기 이사장은 증조 할아버지 민영휘의 묘지를 관리하는 데 학교 돈 4,400만 원을 쓴 혐의도 받았다. 휘문고 안에는 설립자를 기리는 민영휘의 동상이 여전히 서 있다.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지배세력으로 군림한 친일파와 그 후손. 그들의 네트워크는 상상 이상으로 폭넓고 강력했다.
10년 전인 2009년 11월,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는 모두 1,006명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을 최종 공표한다. 1949년 반민특위 해체 이후, 처음으로 국가기구 차원에서 이뤄진 친일청산 작업이었다.
1,006명은 일제로부터 작위를 받은 귀족, 중추원 참의 등을 지낸 당대 최고 엘리트와 일제의 하수인들이었다. 결정 기준은 친일 부역 행위가 얼마나 자발적, 적극적이었냐는 것이었다. 그만큼 이들의 친일반민족 행위는 돋보였다. 일제를 등에 업고 부와 권세를 누렸지만 그동안 단죄는 없었다.
발표 이후 기득권 세력이 잇따라 반발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 이들이 속한 대학 총장들이 일제히 반발하고 나섰다. 6개 대학 총장 명의로 청원서를 냈다. 이들은 “일괄적 잣대로 무리하게 재단하고 폄하하여, 한국사회에 미친 공헌에 대해서마저 부정적 판정을 내리고 있다.”, “위원회의 보고서가 해당 대학의 앞날에 매우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라며 조사결과 시정을 교육부와 청와대 등에 청원했다.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은 “당시 대학총장들이 이런 청원서를 냈다는 것 자체가 우리 사회에서 친일세력의 영향력이 아직 상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근거”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노골적으로 친일청산에 반대한 청원서를 낸 대학총장들은 누굴까? 6명 총장 가운데, 심화진 성신여대 총장은 일제 침략전쟁을 선동하며 일왕을 찬양했던 성신여대 설립자 이숙종의 조카딸이다. 나머지 총장들은 어떤 생각으로 청원서에 이름을 올린 것일까? 이들의 이력을 확인해보니, 이른바 뉴라이트 계열 역사학자로 분류됐고 이승만을 건국대통령으로 숭모하는 단체의 임원 경력이 나왔다.
이배용 이화여대 총장. 그는 일제 침략전쟁을 선동하는데 앞장섰던 이화여대 초대 총장 김활란의 친일반민족행위자 지정을 반대했다. 이배용 총장은 이명박 정부시절 국가브랜드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2011년 5.16민족상을 받았다. 2012년에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선대위 의장을 맡는다. 그는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를 선덕여왕에 비유하고 “준비된 여성 대통령’을 주장하며 박근혜 후보의 당선을 도왔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2013년 한국학중앙연구원장에 임명됐다.
이배용 전 총장은 이른바 ‘뉴라이트’ 계열의 역사학자로 분류된다. 2013년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가 주도한 역사교실의 첫번째 강연자로 나섰고, 그해 친일 독재 미화 논란을 빚은 교학사 교과서를 옹호하는 모임인 '역사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 명단에 이름도 올렸다. ‘명성황후’를 ‘민비’라고 기술해 국정감사장에서 호된 질타를 받기도 했다.
취재진은 친일청산에 반대했던 입장이 아직 그대로인지 묻기 위해 그를 찾았다. 이 전 총장은 “인터뷰할 계제가 아니니 이해해달라”, “다른 총장들에게 여쭤봐라”며 답변을 피했다.
일제의 전쟁 자금을 지원하기 위해 비녀까지 바치며 일제에 충성했던 고황경. 그가 세운 대학의 총장도 청원서에 이름을 올렸다. 이광자 서울여대 총장이다. 그런데, 그는 이승만을 건국대통령으로 숭모하는 보수단체 ‘대한민국사랑회’의 이사를 맡고 있다.
친일 단체에 가입하고 수차례 친일 기고문을 썼던 김성수를 옹호한 이기수 고려대 총장도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회업회 회장을 맡았고, 지금은 명예회장이다. 이기수 전 총장은 뉴스타파와의 통화에서 “김성수는 고려대와 동아일보, 경성방직 등 가장 중요한 교육, 언론, 산업을 일군 사람”으로 “일제가 지배하고 있는 나라에 살면서 지배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냐?”며 김성수의 친일부역 행위를 옹호했다.
낯부끄러운 청원서에 이름을 올린 친일파의 후손,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 그리고 이승만을 건국대통령으로 숭배하는 단체의 회장까지.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봐야 할까?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은 “이른바 뉴라이트 학자들은 해방 이전의 역사는 거의 무시하고, 1948년 정부수립과 경제성장, 반공 등을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고 말했다. 이처럼 해방 이후 상황만을 강조하는 뉴라이트의 논리는 결국 일제 강점기 친일행위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해방 이후 각급 학교를 설립하고, 대학의 이사장과 총장을 지내며 대한민국 교육계를 지배해 온 친일인사들은 얼마나 될까?
뉴스타파는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지정된 인물1006명과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친일파 4,389명을 대상으로 해방 이후 교육 분야 행적을 조사했다. 중,고등학교, 대학교를 설립했거나 대학에서 총장과 이사장을 지낸 사람들을 집계했다. 모두 87명의 명단이 작성됐다. 중,고등학교에서 교장을 지낸 이들도 30명 넘게 확인됐지만, 이번 명단에서는 제외했다.
문교부(교육부) 장관을 지낸 사람은 4명이 나왔다. 백낙준(2대), 이병도(7대), 박일경(12대), 고광만(14대) 등이다. 차관은 이항녕(9대), 윤태림(14,15대) 등 2명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장,차관에 임명되기 전후로 대학 등의 총장과 이사장을 지내기도 했다.
학교별로 분류하면, 동국대가 8명으로 가장 많았다. 초대 총장 권상로를 비롯해 고재호, 김갑수, 김영수, 박대륜, 이종욱, 임석진, 허영호 등이 총장, 이사, 이사장을 지냈다. 또 이화여대가 6명(김순흥, 김활란, 박마리아,변홍규, 서은숙, 이숙종), 숙명여대 6명(고재호, 김두헌, 윤태림, 이숙종, 이인기, 임숙재), 상명대가 4명(곽종원, 배상명, 신봉조, 조동식)이었다.
친일인사 3명이 이사, 이사장, 총장으로 재직했던 대학이 5개 대학이었는데, 고려대(김성수, 유진오, 현상윤), 연세대(백낙준, 이묘목, 전필순), 서울여대(고황경, 김종대, 전필순), 성균관대(신석호, 이명세, 조동식), 국민대(김세완, 박이순, 최문경), 등이다.
이밖에 홍익대(이원영, 이항녕), 성신여대(이숙종, 조기홍), 명지대(노기남, 박일경), 동덕여대(이명세, 조동식) 영남대(신기석, 이인기),부산대(고광만, 신기석), 동아대(정재환, 배철세) 인천대(신기석, 이호) 등 8개 대학이 확인됐다.
※ 친일 교육계 인사 87명 명단 보기
이들 친일인사의 교육 행태는 해방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는다. 충성의 대상이 ‘일왕’에서,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들이 걸어 온 이력과 권력자에게서 받은 훈장내역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일제 검사 출신의 이호가 대표적이다. 간도특설대 출신의 친일파 백선엽과 백인엽이 설립, 운영한 선인학원(현 인천대)의 이사장을 맡았다. 그는 이승만 정권에서는 법무부 장관을, 박정희 정권에서는 내무부와 법무부 장관을 꿰찼다. 전두환 군사반란 이후에는 ‘국가보위 입법회의 의장에 임명됐고, 이후 국정자문위원을 지내며 독재에 부역했다. 이호는 1981년 전두환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무궁화장은 국민훈장 가운데 훈격이 가장 높다. 일제 검사였던 이호는 일제 강점기는 물론 각 정권마다 부역하며 50년 가까이 부와 권세를 누렸다.
87명 가운데는 박정희가 5.16쿠데다 직후 만든 국가재건최고회의와 재건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한 사람도 8명이 확인됐다. 고황경, 김준보, 박일경, 신기석, 신석호, 유진오, 이항녕, 정재환 등이다. 유신 독재시절 유신정우회 의원이 2명(김창규, 이숙종), 전두환이 만든 국보위와 국정자문위원에 참여한 이들이 6명이었다.
뉴스타파는 이들이 받은 훈장 내역도 확인했다. 5.16 혁명이념을 구현했다며 박정희에게 훈장을 받은 이는 4명이다. 김준보, 윤태림, 조재호, 최문경 등이다. 박정희가 이들에게 훈장을 준 날은 1963년 12월 17일이다. 쿠데타에 성공한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돼 임기가 시작된 때였다. 박정희가 초대 총재를 맡은 ‘5.16 민족상 재단’의 이사와 심사위원을 맡거나 5.16민족상을 받은 인사도 송금선, 이병도 등 모두 5명이었다.
1968년 박정희는 국민교육헌장을 직접 공표했다. 이 헌장을 일선 학교에서 잘 구현했다며 훈장을 받은 친일인사가 모두 15명이다. 고황경, 곽종원, 김영훈, 박인덕, 박일경, 배상명, 배철세, 변홍규, 서은숙, 송금선, 신기석, 윤태림, 이인기, 정재환, 조기홍 등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른바 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침략전쟁 선전에 앞장섰다가 해방 이후에는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전체주의적 교육정책을 충실하게 따른 것이다.
한상권 덕성여대 교수는 “독립운동가들은 정의가 곧 힘이다라고 생각했다면, 친일세력은 힘이 곧 정의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며, 현실에 존재하는 권력에 순응하고 편승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밝혔다. 즉 “친일은 그 권력의 성격이 무엇이든, 현실권력을 정당화, 합리화시키는 논리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이다. 이를 통해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하는데, 이는 수구세력의 일반적인 성향”이라고 말했다.
1937년 애국금차회 간사로 활동하면서 비녀까지 바치며 일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던 고황경은 5.16쿠데타 직후에는 재건국민운동본부 중앙위원에 임명됐고 박정희의 교육정책을 충실히 전파했다. 고황경은 1970년 국민교육헌장 이념 구현을 공적으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1985년 5,16민족상 교육부문 수상자로 선정된다.
일왕을 위해 전쟁터로 나가라고 주창했던 배상명은 유신독재시절에는 학생들에게 군사교육을 시켰다. 그는 1982년 전두환으로부터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는데, 사유는 ‘국민교육헌장 이념구현 유공’이다.
황국의 신민으로 학도병 지원을 독려했던 이숙종은 유신독재시절에는 유신정우회 국회의원이 됐고, 전두환 독재정권에서는 여성단체 대표로 국정자문위원 자리에 임명돼
독재자를 찬양했다. 이숙종은 모두 3개의 훈장을 받는데, 이 중 하나는 1985년 전두환에게서 받은 국민훈장 무궁화장이다. 서훈 사유는 “평생 여성교육을 위해 헌신하였으며 국정자문위원을 역임하면서 국가사회발전에 기여”했다는 것이다.
유정회 의원은 독재자 박정희에 의해서 임명된, 유신체제를 옹위하는 가장 중요한 직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죠. 학생들에게 민주교육을 해야 될 교육자가 반민주적인 독재자에 영합해서 유정회 의원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어떤 이유로도 변명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요. 전두환이 집권했을 때, 국정자문회의 위원직을 한 것도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는 교육자로서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려운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뉴스타파는 친일파의 후손들이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학교도 확인했다. 모두 13개 학교다.
고려대가 대표적이다. 김성수, 김상만, 김병관에 이어, 2012년 김성수의 증손자인 김재호 채널A 사장이 고려대 이사장을 맡고 있다. 4대째 세습이다.
경성대도 4대 세습이 이뤄졌다. 친일 목사 김길창부터 김근제, 김대성에 이어, 현재 김길창의 증손자인 김동기 씨가 경성대 이사장에 재직중이다. 이들 2개 대학을 포함해 동아대, 추계대, 동덕여대, 덕성여대, 상명대, 계명대, 성신여대 등 9개 대학, 고등학교는 성남고, 영훈중고, 휘문고, 광신고 등 4곳에서 대를 이은 지배가 확인됐다.
학교별 자세한 내역은 아래 인터랙티브 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설립자의 후손이 여전히 학교의 전권을 쥐고 있어서일까. 뉴스타파는 이번 취재과정에서 학교 안에 설치된 설립자의 동상을 수없이 확인했다. 어디에도 설립자의 친일행적을 기록해놓은 곳은 없었다.
학교 설립 50년, 60년, 100년때마다 내놓는 ‘학교사’도 확인했지만 설립자의 친일 행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대학을 찾지 못했다. 친일 행적을 아예 기록하지 않거나, 일부 학교는 독립운동가처럼 미화하기도 했다.
동덕여대가 2009년 발간한 <동덕 100년사 자료집>에는 “설립자 조동식은 학교가 어려움에 처할 때 불굴의 의지로 이를 극복하여 오늘의 동덕이 있게 한 가장 큰 공로자”라고만 서술했다. 일제 강점기 조동식의 친일행적은 나오지 않는다. 일제 강점기에 조동식은 “조선 청년 누구나가 몸소 즐거이 나라를 위해 총칼을 잡아야 한다”고 학도병과 징병을 독려하고 침략전쟁을 선동했다.
성신여대가 1989년 펴낸 <성신50년사>에는 설립자 이숙종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운정 리숙종 선생이 그 어려운 시대에 민족 교육기관인 성신학원을 세워 초지일관으로 뜻을 굽히지 않고 성신교육을 해왔다. (중간 생략) 개교 당시 리숙종 교장은 일본말로 교가를 부를 바에야 차라리 안 부르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 교가를 짓는 일조차도 하지 않았다.
2015년 경성대는 <경성대 50년사> 편찬했다. 2009년 김길창이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지 6년이 지난 뒤었다. 그러나 여전히 김길창을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순산(김길창)은 일제강점기의 수난과 고통을 경험하면서 국가의 독립과 영광은 일시적인 저항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점을 절감했다. 그는 진정한 독립을 위해서는 교육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며, 동시에 서구의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여 나라를 부강케 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친일거두 박흥식. 그는 국방헌금을 헌납해 일제로부터 표창까지 받았다. 특히 침략전쟁을 위한 전투기를 생산할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의 사장까지 지냈다. 2015년 광신고가 펴낸 나온 <광신 110년사>에는 “일제의 강요로 (비행기 회사를) 설립했다”고 주장하고 “이 회사의 설립으로 많은 청년들과 화신계 사원들이 징용에서 면제되어 인재를 보호할 수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한상권 덕성여대 교수는 “양심있는 교수들은 학교사 편찬위원회에 아예 참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시퍼렇게 살아 있는 (사학)권력이 있는데, 설립자의 친일 기록을 있는 그대로 밝히는 글을 쓴다는 것은 매우 힘들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저희가 이제 덕성 100년사를 쓰기 위해 다른 대학교는 어떻게 쓰냐고 물어봤어요. 이미 쓴 대학도 있고, 써야 할 대학도 있는데, 공통점이 있더라고요. 이사회에서 원고를 보자고 한다든지. 어느 대학은 (이사회에) 보여줬대요. 그런데 보여주는 순간 못 나왔대요. ‘이거 고쳐라, 저거 고쳐라’ 하니까 누더기가 되는 거죠. 지금 시퍼렇게 살아있는 권력인데 그에 맞서서 글을 쓴다는 것은 힘들죠. 그러니까 대부분 안 쓰죠. 양심있는 학자들은 아예 안 들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친일 사학설립자들과 그 후손들로부터 사과와 참회, 이를 통한 진정한 친일청산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한상권 교수는 “반성하지 않는 친일파를 탓할 게 아니라, 그들을 반성의 무대로 이끌어내지 못한 우리도 반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수현 민족문제연구소 사무처장은 “반성은 기득권 지배구조에서 낙오”를 의미한다며 이렇게 답변했다.
당사자로선 홍익대 총장을 지낸 이항녕 박사만이 반성을 했죠. 그 이외에는 거의 반성을 하지 않죠. 왜냐면 우리 한국사회 지위 구조하고 긴밀한 연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친일세력들이 해방 이후에 한국사회를 장악했기 때문에 그런 지배구조 속에서 자기가 반성한다는 건 곧 거기서 떨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계형 국민대 특임교수는 “우리는 한 번도 단죄를 한 적이 없다 보니, 맺은 것도 아니고 안 맺은 것도 아니고 어정쩡한 상황이다. 국가가 지향해야 될 이상의 가치를 설정하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지 않았을까?”라고 말했다.
지난 6월 18일. 성신여대 설립자 이숙종의 34주기 추도식이 열렸다. 이날 황상익 이사장은 “진정한 추도는 고인이 살아서 하지 못한 참회와 사죄를 대신 하는 것이 포함돼야 한다”며 추도사를 읽어 나갔다.
이날 추도사를 통해 황상익 이사장은 설립자 이숙종과 초대총장 조기홍이 민족 앞에 저지른 친일반민족행위와 이숙종의 조카 심용현 전 이사장이 한국전쟁 당시 저지른 집단학살 행위를 70년 만에 대신 사죄했다.
학원이 제 구실을 하려면 지난 시대의 잘못과 과오들에 대해 반성하고 참회하고 사죄해야만 합니다. 역사와 진실을 외면한 채 미래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략) 성신학원 이사장 자격으로 친일반민족행위로 직간접적으로 피해를 보았을 모든 분들과 국민, 그리고 성신학원 구성원들께 깊이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중략)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사건'의 현장 책임자인 심용현 전 이사장은 결코 성신학원에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될 사람입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심용현 전 이사장과 관련해서 발생한 성신학원의 모든 과오에 대해 학살 피해자들과 유족들 에게 깊이 머리 숙여 사죄합니다.
며칠 뒤, 뉴스타파 취재진을 만난 황상익 이사장은 추도사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그 분(이숙종)이 살아계실 때 스스로 사과하고 속죄할 수 있었으면 그걸로 끝나는 문제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에는 그분을 기억하고 기리는 사람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것이 그분을 위해서도 또 그분에 의해 피해를 본 분들이 있으면, 피해자에 대해서도 해원할 수 있는 기회와 피해자와 피해자의 유족과 더불어 고인의 영혼의 안녕을 위해서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전례가 없는 이번 공개 사죄가 독재와 친일로 얼룩진 대학의 과거사를 극복하는 불씨가 될 수 있을까. 취재진은 공개 사죄 이후 주변의 반응은 어땠는지 물었다. 황상익 이사장은 웃으면서 “아직 사회적 반향이 큰 것 같지 않다”며 이렇게 답했다.
저로서는 성신학원, 한 학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와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을 하는데요. 과거의 잘못에 대한 반성일뿐만 아니라 반성을 토대로 우리 한국 사회, 한국의 학원이 제대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문제인데, 그런 중요성에 비해서 사회적 관심이 아직은 그렇게 큰 것 같지는 않습니다.
황상익 이사장의 공개 사죄 발언을 보도한 매체는 온라인 언론 한, 두곳에 불과했다.
데이터: 최윤원, 임송이
시각화: 임송이
가계도: 신학림 전문위원
촬영: 최형석, 신영철, 정형민
자료조사: 최유리, 민영빈
웹디자인: 이도현
타이틀 CG: 정동우
편집: 윤석민
취재: 박중석, 최윤원, 강혜인, 강민수, 김새봄
데이터 | 최윤원, 임송이 |
시각화 | 임송이 |
가계도 | 신학림 전문위원 |
촬영 | 최형석, 신영철, 정형민 |
자료조사 | 최유리, 민영빈 |
웹디자인 | 이도현 |
타이틀 CG | 정동우 |
편집 | 윤석민 |
취재 | 박중석, 최윤원, 강혜인, 강민수, 김새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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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01
뉴스타파의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프로포폴 투약 의혹보도와 관련해 경찰이 내수에 착수했습니다
뉴스타파의 확인요청에 답변하지 않았던 이 사장 측은 오늘 설명자료 를 내고 “흉터와 안검하수 치료 목적으로 다녔을 뿐”이며 “불법투약은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2018.01.01
1990년대 중반 자유한국당 김무성 의원 재산이 20억 원 넘게
늘어난 배경에는 적산기업을 물려받은, 친일파인 부친 김용주가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