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국100년 특별기획] 족벌사학과 세습⑦ 이병도, 유진오, 이호

2019년 07월 24일 14시 29분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民國 100년 특별기획, 누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가> 시리즈를 2018년 8월부터 2019년 하반기까지 계속해서 보도합니다. 올해는 1919년 3.1 혁명 100년, 임시정부 수립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뉴스타파는 지난 100년을 보내고 새로운 100년을 맞는 중요한 시점에서 이 특별기획을 통해 지난 한 세기 동안 한국을 지배해 온 세력들을 각 분야 별로 분석하고, 특권과 반칙 및 차별 없는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한 통찰을 99% 시민 여러분과 함께 이끌어 내고자 합니다.

뉴스타파는 <民國 100년 특별기획, 누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가> 프로젝트를 통해 일제와 미 군정, 독재, 그리고 자본권력의 시대를 이어오면서 각 분야를 지배해온 세력들이 법과 제도를 비웃으며 돈과 권력을 사실상 독점하고 그들만의 특권을 재생산한 현재의 지배계급 시스템을 가감없이 들춰내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우리 미래 세대가 과거 지배 체제가 극복된, 그래서 보다 정의롭고 균등한 기회가 보장되는 나라에서 주권을 제대로 행사하며 자기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새로운 시스템을 함께 모색해 나가려 합니다. -편집자 주

‘교육·역사·학술·문화’ 모두를 쥐고 흔든 ‘총독부’ 출신 역사학자 이병도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이승만·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반세기 넘게 한국의 ‘교육·역사·학술·문화’ 분야 모두에서 지속적으로 뿌리 깊은 영향력을 행사한 ‘독보적’인 사람이 있다.

두계(斗溪) 이병도(李丙燾: 1896-1989). 우리 고유의 나라이름인 ‘진(震)’과 단군의 ‘단(檀)’을 합쳐 이름 지었다는 진단(震檀)학회 창설을 주도하며 ‘실증사학’을 내세웠다. 하지만 그가 내놓은 연구자료와 결과물은 일제 식민사학의 본질을 벗어난 적이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우봉 이 씨 세도 가문에서 태어난 이병도는 보성전문학교(현재의 고려대) 법률학과를 졸업하고 1915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早稻田)대학 문학부 사학 및 사회학과를 졸업했다.  1919년 서울에 돌아온 그는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1925년까지 6년 동안 교사로 재직했다.

역사학도로서 그가 첫발을 디딘 곳이 일제가 우리 역사를 왜곡·조작하기 위해 만든, 조선총독부 직속기구 조선사편수회였다. 그가 조선사편수회에서 맡은 직책은 이름부터 일제의 의도가 배어 나온다. 이름하여 ‘수사관보(修史官補).’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역사를 수정하는 일을 하는 ‘관리’를 보좌”하는 자리다.

이 조선사편수회에 이병도보다 나이가 다섯 살이 많은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 1891-1968)이라는 일본인 촉탁이 있었다. 그는 조선총독부 촉탁 직원으로 일하며 한국과 한국인들의 성격과 사상, 풍습, 민속 등 여러 분야에서 방대한 저술과 조사자료를 남겼다. 조선총독부에서 그가 펴낸 많은 책들 중 몇 가지 제목만 훑어보자. (괄호안은 발행 년도)

<조선인의 사상과 성격(1927)>
<조선의 귀신: 민간신앙 제1부(1929)>
<조선의 민간신앙(1931)>
<조선의 풍수(1931)>
<조선의 무격(巫覡): 민간신앙 제3부(1932)>
<조선의 점복과 예언(1933)>
<조선의 유사종교(1935)>
<부락제(部落祭)(1937)>
<조선의 향토오락(1941)>

1932년에 펴낸 <조선의 무격(巫覡): 민간신앙 제3부>에 나오는 ‘무격(巫覡)’은 남자무당(박수무당)을 가리킨다. <조선의 향토오락>은 무라야마 지준이 일본으로 귀국하기 직전인 1941년에 펴낸 책이다. 남의 나라를 완벽하게 지배하기 위해 그 나라 사람들의 풍속과 성격은 말할 것도 없고, 영혼과 귀신, 심지어 남자무당까지 조사·연구해 책으로 펴내는 집요함이 잘 드러난다.

이병도, 조선사편수회 촉탁 경력 등에 업고 해방 이후 평생 ‘꽃길’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에서 이병도는 무라야마 지준이 하는 역사 작업들을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1938년 6월까지 조선사편수회 촉탁으로 일한 이병도는 1939년 11월 조선총독부의 지원으로 전국 유림(儒林)단체들을 연합하여 ‘총후봉공(銃後奉公)’을 위한 정신운동에 나서도록 촉구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 평의원을 맡았다. 총후봉공이란 한마디로 총(銃)을 뒤(後)로 하고 공공(公)을 위해 봉사(奉)하라, 즉 ‘전시체제 아래서 전쟁수행을 위해 적극 협력’하라는 뜻이다.

▲ 문교부장관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병도 출처: 국가기록원

1945년 해방 이후 죽기 직전까지 이병도는 ‘꽃길’만 걸었다. 그가 맡은 화려한 직책을 몇가지만 보자. 1945년 12월 경성제국대학(지금의 서울대) 조선역사 담당 교수로 임용돼 1961년 정년퇴직 때까지 재직했다. 교수로 있는 동안 국방부 정훈국 전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서울대 부속 박물관장, 서울대 대학원장, 사단법인 진단학회 이사장,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을 지냈다. 이어 1960년 4·19혁명으로 들어선 과도내각에서 문교부장관을 맡으면서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도 겸했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 학술원 원장, 서울대 대학원장(행정대학원장 겸임), 중앙교육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61년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가 제정한 ‘5·16민족상’ 심사위원회 고문이사까지 맡았고, 성균관대 교수를  지냈다. 전두환이 실권을 장악한 2년 후인 1982년 민족문화추진회 이사장에 선임됐고 1988년 4월 고문으로 추대됐다.

이 같은 그의 화려한 경력도 그와 그의 가벌(家閥)이 구축한 혼맥에 비하면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이병도 가문의 혼맥은 잘 짜인 그물망처럼 촘촘하면서도 방대하기 이를 데 없다.

이병도와 6촌이내 친인척만 10명 이상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그의 큰형 이병묵(李丙默: 1876-1950)의 셋째아들 재령(宰寧: 농촌진흥청 시험국장)은 윤보선(尹潽善: 1897-1990) 대통령의 여동생 윤계경(尹桂卿)과 결혼했다. 이재령의 동서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 의대) 학감을 지낸 오긍선(吳兢善: 1878-1963)의 아들 진영(震泳)과 결혼했다.  오긍선은 국민총력조선연맹 상임이사 등을 지내며 일제 식민통치와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했다. 오긍선은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에 포함된다.

이병묵의 장녀는 일본 오사카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의사로 활동하며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 등을 맡아 일제에 부역한 정구충(鄭求忠: 1895-1986)과 결혼했다.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 교수와 조선유도연합회 참사(參事)를 지낸 정구충도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다. 그의 사촌 형이 박정희가 만든 민주공화당 초대총재와 6-7대 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 대한변호사협회장(8, 10대) 등을 지낸 정구영(鄭求瑛: 1899-1978.05.22.)이다.

이병도의 둘째형 이병훈(丙薰: 1880-1953)의 장녀(寅男)가 민복기(閔復基: 1913-2007) 대법원장과 결혼했다. 일제 판사 출신 민복기는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 민복기의 아버지는 군부·탁지부·궁내부 대신을 지내고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서 일제로부터 자작 작위를 받고 총독부 중추원 부의장까지 지낸 매국수작 민병석(閔丙奭:1858-1940)이다. 민병석은 친일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됐다.

민복기는 사법부의 독립과 판사의 양심마저 내팽개치고 박정희 정권에서 고위직을 누렸다.  그는 1968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10년 2개월 동안 대법원장을 지냈다. 역대 대법원장 중 재임 최장수 기록이다.  

한국인 최초 일본군 육군 중장, 친일파 조성근이 이병도의 장인

이병도의 장인은 한국인 중 최초로 일본군 육군 중장으로 진급하고, 각종 일제 훈장을 받은 친일파 조성근(趙性根:1876-1938)이다. 대한제국 출신 일본군 장교 42명 가운데 조성근 보다 높은 연봉을 받은 사람은 ‘정미7적’으로 불리며 자작 작위를 받은 이병무(李秉武:1864-1926), 일본군 육군 중장에 올랐고 남작 작위를 받은 조동윤(趙東潤: 1871-1923) 두 사람 뿐이다.

이병도의 누이동생(丙映)은 윤보선 전 대통령의 막내숙부 윤치영(尹致暎: 1898-1996) 민주공화당 의장과 결혼했으나 곧 세상을 떴다. 윤치영이 두 번째 부인과 결혼해 낳은 큰딸은 김성수(1891-1955) 부통령의 며느리가 됐다. 윤보선 대통령의 부친이자, 윤치영의 둘째형인 윤치소(尹致昭: 1871-1944)와 맏형인 윤치오(尹致旿; 1869-1950)도 총독부 중추원 참의와 찬의를 각각 지내며 일제에 부역했다. 윤치소와 윤치오 모두 나란히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들어있다.

이병도의 장남 기녕(基寧)의 차남, 즉 이병도의 둘째손자 웅무(雄茂: 1944-)는 김웅수(金雄洙: 1923-2018) 전 6군단장의 딸과 결혼했다. 박정희의 쿠데타를 반대했던 김웅수 6군단장의 처남이 강영훈(姜英勳: 1922-2016) 전 국무총리다.

이병도의 둘째딸(雲卿)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인 매국수작 민영휘의 증손자인 민헌기(閔獻基: 1928-) 전 서울대 의대 교수의 부인이다. 민헌기 교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주치의를 지냈고, 손윗동서가 화가 장욱진(張旭鎭:1918-1990)이다. 민헌기의 조부 민대식(閔大植: 1882-1951)은 동일은행 대표취체역(대표이사)과 각종 상공활동을 통해 번 돈으로 많은 국방헌금을 내는 등 일제에 철저하게 부역해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이병도의 차남 춘녕(春寧: 1917-2016)은 일본 규슈(九州)제국대학 농화학과를 졸업하여 서울농대 학장 등을 지냈다. 이춘녕의 장남 장무(長茂: 1945-)는 서울공대 교수, 지식경제부 산하 산업기술평가원 이사장, 서울대 총장,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 이사장을 거쳐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이 됐고, 이춘녕의 차남 건무(建茂: 1947-)는 국립중앙박물관 관장과 문화재청 청장을 지냈다.

이병도의 넷째아들 동녕(東寧: 1927-)은 런던대학교에서 플라스마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포항공대 교수를 지냈다. 장인은 주유엔 대사 등을 지낸 김용우(金用雨: 1912-1985) 전 국방장관이다. 김용우의 동생 김은우(金恩雨: 1916-1999)는 배재학당(배재대) 이사장과 세계일보 뉴욕지사 사장을 지냈는데, 장남 김인회(金仁會: 1938-) 전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의 장인이 동은학원 이사장을 지낸 최동(崔棟: 1896-1973)이다.

최동은 일제 강점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수와 재단이사를 지냈다. 최동은 1936년 조선민족과 야마토(大和) 민족과의 이른바 동종동근(同種同根)을 제시하며 일본과 조선 두 민족의 결합을 당당하게 주장했다. 또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942년 일제의 싱가포르 함락을 축하하는 글을 발표하는 등 일제 침략전쟁에 협력했다. 최동 또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있다.

일제 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이나 일본에 있는 제국대학을 졸업한 사람들 중 상당수는 전공이나 전문 분야와 상관없이 국공립대학은 말할 것도 없고, 사학재단의 이사·이사장 혹은 총장 등을 지냈다.

뉴스타파가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친일 인사 가운데, 해방 이후 중,고등학교 등 학교를 설립했거나 대학의 학장·(부)총장, 이사·이사장, 그리고 교육부 장,차관, 교육감 등 교육관련 단체나 기관 대표 등을 지낸 사람을 찾아보니 80명 넘게 나왔다.

이 가운데는 정계로 진출한 이도 적지 않다. 대표적인 인물이 유진오(兪鎭午: 1906-1987) 전 고려대 총장이다. 그는 경성제국대학 예과를 수석으로 입학하고 1929년 수석으로 졸업했다.

친일부역행위 유진오 고려대 빈소에서 학생들에 수난당해

유진오는 일제 강점기 연설과 작품 등을 통해 학병, 징병, 지원병을 선전, 독려했다. 그는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로 1944년 8월17일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적국항복문인강연회에 참석해 ‘우리가 반드시 승리한다’는 제목으로 연설하며 일본이 벌이고 있는 전쟁을 ‘악마와 신의 싸움’으로 묘사하며 “요(要)는 미영(미국과 영국)을 격멸하는 한 길이 있을 뿐”이라고 열변을 토하기도 했다.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유진오를 친일반민족행위자 1006명에 포함했다.

유진오는 1948년 정부 수립 후 초대 법제처장, 한일회담 대표, 고려대 대학원장, 고려대 총장에다 대한교육연합회(지금의 교원단체총연합회) 회장(6-8대)을 지냈다. 정치 1번지라는 서울 종로(갑)에서 야당인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7대 국회의원선거에 당선되고 신민당 총재까지 지냈다.

이렇게 화려한 길을 걸었으나 친일 경력을 감출 수는 없었다. 1987년 8월 30일 유진오가 사망하고 고려대학교에 빈소가 마련되자 교수들과 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고려대가 친일행위자나 국정자문위원의 빈소가 될 수 없다’며 ‘빈소 철거’를 주장해 파문이 일기도 했다.

▲ 1965년 고려대 총장 이임식장 유진오 (오른쪽) 출처: 국가기록원

유진오는 1965년 10월 고려대 총장 임기 만료로 물러난 뒤 정계로 진출해 1966년 민중당 대통령 후보에 지명됐고, 이듬해 민중당과 신한당이 합당한 신민당 총재를 지냈다. 1970년 신민당 총재직을 사임하고 1974년 박정희 유신독재에 대항하는 ‘민주회복 국민회의’에도 참가하는 등 야당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1980년 전두환이 쿠데타에 성공한 뒤 국토통일원 고문(1980-1984)과 국정자문위원(1980-1987)에 위촉되는 등 독재세력에 협력했다.

김성수와 김용완, 한기악·박동진(외무장관)·김덕주(대법원장) 등과 친인척

유진오의 가계와 혼맥을 살펴보자. 보수와 진보, 좌우를 떠나 그의 혼맥에 등장하는 식구들은 무슨 용어로 설명하든, 한마디로 한국 사회의 ‘기득권’ 층에 속한다.

우선 3남 4녀의 자녀 중 맏사위가 한만년(韓萬年: 1925-2004) 전 일조각 사장이고, 둘째 사위는 박동진(1922-2013) 전 외무장관이다.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고보(현재의 경북고)를 나와 일본 중앙(주오)대를 졸업한 박동진은 해방 후 미군정청 상무부 무역국 서무과장으로 관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국무총리 비서와 이승만 대통령 비서관을 거쳐 외교관으로 활동, 외무부 장관에 올랐다.  

박동진은 전두환이 쿠데타에 성공한 뒤 1980년 국회를 해산하고 만든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약칭 국보위) 위원을 역임했다. 이어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약칭 민정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돼 1983년까지 국회 외무위원장도 맡았고, 1985년 제12대 총선에서 전국구 의원에 재선됐다. 그 해부터 이듬해까지 국토통일원(현 통일부) 장관을 역임했다. 이후 1988년부터 3년 동안 미국 주재 대사직을 수행하고 바로 한국전력공사 이사장도 3년 지냈다.

유진오의 장녀 효숙(孝淑: 1930-)의 시아버지 한기악(韓基岳:1897-1941)은 상해임시정부 의정원(지금의 국회) 의원과 동아일보 창간동인·편집국장에 시대일보와 조선일보 편집국장을 지내고 신간회 발기인으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장녀(효숙)의 시숙이자 한기악의 장남 한만춘(韓萬春: 1921-1984)은 연세대 공과대 학장을 지냈다. 서울대 병원장을 지낸 한기악의 셋째아들 한만청(韓萬靑: 1934-)은 김성수·김연수 형제의 매제이자, 전경련 회장과 경방 회장을 지낸 김용완(金容完: 1904-1996)의 셋째 사위다.

한기악의 둘째아들이자 유진오의 맏사위인 한만년 일조각 전 사장은 4남 1녀가 모두 대학교수다. 그 중 5남매의 넷째이자 막내아들인 한홍구 교수는 역사학자로 ‘반헌법행위자 열전’을 만들고 있다. 한만년-유효숙 부부의 셋째아들 한준구(韓準九: 1958-)의 장인이 김덕주(金德柱: 1933-) 전 대법원장이다. 한준구 교수의 바로 아랫동서가 성백현(成百玹: 1959-) 전 서울가정법원장이다.

법무장관 이호 형제, 인촌 김성수 가문과 겹사돈

이호(李澔: 1914-1990)는 법률가로서 지낼 수 있는 최고위직을 거의 섭렵했다. 경북 영천 출신으로 도쿄제국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1939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붙어 일제 때 검사생활을 시작했다.

정부 수립 후 대검찰청 검사, 초대 치안국장, 유엔정전위원회 한국 대표를 지내다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여 국방부차관, 법무장관, 한일회담 대표와 내무부 장관을 차례로 지낸 뒤 1961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 1981년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서훈 받는 이호 (왼쪽 두번째 고개숙인 이) 출처: 국가기록원

6년 뒤에 장관 자리를 포함한 고위직 ‘순례’가 다시 시작된다. 박정희에 의해 두 번째 내무부 장관(1967.06-1968.05)에 임명됐고, 곧이어 법무부 장관(1968.05-1970.12)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일본 대사(1971.01-1974.01)직을 마치고 합동통신 회장, 대한적십자사 총재(1975-1978), 두산그룹 창업주 가족이 설립한 연강학술재단 이사장, 다시 두 번째 적십자사 총재(1978-1981)와 헌법위원장(지금의 헌법재판소 기능)을 지냈다.

일제 검사 이호,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독재정권까지 계속 요직

전두환이 1980년 국회를 해산하고 대신 설치한 비상입법기구인 국가보위입법회의 의장을 지냈고 대한노인회 회장까지 차례로 지낸다. 형과 동생 둘 다 군에서 별을 단 백선엽·인엽 형제의 이름 한 글자씩 따서 만든 선인학원(현 인천대) 이사장과 육영수여사추모사업회 이사장 자리가 그가 맡은 ‘마지막 자리’였다. 그에게는 서울시립대 총장을 지낸 장남이 있고, 외무고시를 합격하고 직업외교관으로 오랫동안 활동한 차남도 있지만, 주목해야 할 2세는 셋째아들이다.

서울대 화학과 교수를 지낸 3남 이은(李檼: 1946-) 씨로 한국 사회의 얽히고설킨 가벌(家閥)과 가벌을 이어주는 연결고리(connector)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의 부인은 앞서 언급했던 김성수의 4남 김상흠(金相欽: 1919-1991)의 장녀 김명선(金明宣: 1947-) 씨다.

경상도 관찰부 주사를 지낸 이호의 부친 이인석(李璘錫: 1882-1956)은 경북 영천 부자였다. 아들만 넷을 두었는데 장남 이활(李活: 1899-1982)은 6대 국회의원과 고려대 운영재단 이사장과 한국무역협회장 등을 지냈다. 이활의 외아들 병린(秉麟: 1915년생)이 김성수의 9남 3녀 중 차녀(김상숙)의 남편, 즉 둘째사위다. 이래서 김성수의 넷째아들의 장녀(김명선)에게는 둘째고모(김상숙)가 남편(이은)에게는 4촌형수, 자신에게는 4촌동서가 된다.

전략적으로, 혹은 정략적으로 연결하기도 하고, 모르는 사이에 연결되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네트워크의 힘이고 무서움이다. “네트워크를 장악한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고 말한다. 그냥 수사(修辭)가 아니다. 냉혹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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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신학림 전문위원, 박중석 기자
데이터: 최윤원, 임송이
출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친일인명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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