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 김성수 의문사 ③ 지금 여기의 의문사

2021년 07월 30일 13시 20분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지 21년이 지났다. 국가기관의 위법한 공권력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85건의 의문사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지만 현재까지 진실이 완전히 드러난 사건은 없다. 의문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국가 폭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개인의 한을 풀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의문사의 이면에는 범죄를 저질러도 영원히 침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권력의 뿌리 깊은 오만이 있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여전히 감추고 있다. 의문사가 지금 여기의 역사인 이유다. 
뉴스타파는 35년 전 발생한 한 18세 청년, 김성수의 의문사를 추적한다. 1만 페이지에 이르는 관련 조사 기록을 분석하고, 생존해있는 사건 관계자를 두루 만났다.  - 편집자 주
③ 지금 여기의 의문사

반듯한 영화광 고교생

김성수는 1968년 4월 15일 강원도 태백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강릉으로 이사했다. 김성수는 어려서부터 가족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등굣길엔 군말 없이 연탄을 들고 아파트 계단을 오르내렸다. 밤새 식은 방바닥이 어린 동생과 할머니의 건강을 해칠까 걱정했다. 
조용하지만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다. 누나의 대학 진학을 막는 아버지에게 대든 일이 있었다. 허락하지 않으면 자신도 공부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마냥 순하게만 봤던 아들의 고집에 아버지는 결국 한발 물러섰다. 성수의 가족들과 알고 지내던 교사가 자신의 성적을 올려주자 교무실로 찾아가 본래의 점수로 되돌려 달라고 따진 일도 있었다. 
△ 학창 시절 김성수의 모습. 유가족들은 그가 조용하지만 할 말은 하는 성격이었다고 말했다.
책과 잡지를 즐겨 읽어서 또래보다 세상일에 밝았다. 전두환 대통령 관련 뉴스가 나오면 TV를 꺼버렸다. 놀라는 가족에게 그는 '전두환은 살인마다'라고 말했다. 영화에 대한 관심이 컸다. 대학 입시 중에도 영화 잡지 '스크린'과 TV '명화극장'을 챙겨봤다. 내심 영화 관련 학과 진학을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기대를 뿌리치지 못했다. 1986년 3월, 서울대 지리학과에 입학했다. 

오월제의 노동자

김성수의 학생 수첩에는 3개월 남짓 짧았던 그의 대학 생활이 기록돼 있다. 3월과 4월 일정은 수업과 과제, 학과, 학회 활동으로 빼곡하다. 여느 대학 신입생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5월에 들어서면 일정이 뜸해진다. 서클 활동으로 가입한 총연극회의 오월제 연극 준비가 있었다. 오월제는 서울대 봄 학기 축제의 이름이다.
김성수의 총연극회 동기인 조민제 씨는 김성수와 함께 노동자 배역을 맡았다. 비중이 작은 배역이었지만 연습은 단순히 대본을 외는 정도가 아니었다. 연기의 기본기를 익히고 발성을 연습했다. 배역과 대사에 대해 공부하는 세미나도 함께 진행됐다. 바쁜 일정에 수업을 빼먹어야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 1986년 5월 20일, 오월제 연극 실황. 김성수의 총연극회 동기 조민제 씨는 당시 최루탄의 잔해가 무대 곳곳에 널려 있었다고 말했다.
5월 20일,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오월제 연극의 막이 올랐다. 무대 주변은 어수선했다. 인근 학생회관 앞에는 분신·투신한 이동수 열사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전경들이 쏘아 올린 최루탄 잔해가 무대 곳곳에 널려 있었다. 죽는 연기를 하는 대목이 있었다. 오월제의 노동자들은 최루탄 위에 그대로 몸을 뉘었다. 
뒤풀이 자리에서 선배들은 김성수의 연기를 칭찬했다. 김성수는 조민제에게 최루탄 위에 눕는 것이 고역이었다고 투덜댔다. 꿈을 향해 내디딘 첫발, 그러나 이 공연은 김성수의 마지막 무대가 됐다. 33일 뒤 부산 송도 앞 바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미스터엠

1986년은 학생운동에 대한 공안기관의 탄압이 가장 혹독했던 시절이다. 5.3 인천사태가 학생 운동 탄압의 신호탄이 됐다. 경찰은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며 인천 주안동 시민회관 앞에 모인 학생, 시민 1만 명을 강경 진압했다. 많은 사람이 연행되고 구타당했다. 연행자 일부는 경찰에게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유화적이던 이전의 대응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이었다.
△ 5.3 인천사태 관련 경찰 내부 자료. 전국 경찰에 주동자 검거령을 내리고 검거자에 특진과 표창을 내걸었다.
5.3 인천사태 관련 경찰 내부 자료에 따르면, 당국은 이 사건을 학생 운동에서 벗어나 체제를 부정하는 소요 행위로 규정했다. 전국 경찰에 주동자 검거령을 내리고 수배자 검거에 특진과 표창을 내걸었다. 이후 구국학생연맹 사건, 건국대 사건에서도 경찰의 강경 대응과 수배자 검거 활동은 계속됐다.
김성수의 대학생활은 이러한 공안정국 한복판에 있었다. 김성수 사건 이후 진행된 강릉지역 서울대 동문회의 조사에 따르면, 김성수는 실종 전 최소 2차례 경찰에 연행됐다. 엄혹한 공안정국이라도 1학년생이 연이어 경찰에 연행된 사례는 드물었다.
첫 번째 연행은 4월 28일에 있었다. 이재호·김세진 열사가 전방 입소 반대 투쟁을 벌이며 신림동 사거리에서 분신한 날이다. 김성수는 이들의 죽음에 항의하는 도서관 농성 투쟁에 참여했다. 총연극회 선배, 동기와 함께 즉흥극을 펼쳤다. 연극이 끝나자 만류하는 친구들을 뒤로 하고 혼자 도서관을 나서다 경찰에 연행됐다. 연행된 관악 경찰서에서 김성수는 형사들에게 맞섰다. 형사는 서류를 던지며 김성수에게 화를 냈다.
두 번째 연행은 실종 2주 전 쯤이다. 언론인 리영희의 명동성당 강연에 참석하고 나서는 길에 종로경찰서로 연행됐다. 강연 유인물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였다.
△ 분신 후 병원으로 실려가는 이재호 열사의 모습. 이재호 열사의 부모는 김성수가 열사의 유품을 들고 병원을 찾았다고 증언했다.
김성수의 죽음 이후, 드러나지 않았던 그의 행적이 속속 확인됐다. 김성수의 유가족은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유가협 활동 중에 이재호 열사의 부모를 만났다. 이재호 열사의 부모는 김성수의 사진을 보더니 그를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분신한 이재호 열사가 병원 치료를 받는 동안 한 1학년생이 자취방 물건을 가지고 병원을 찾아왔었는데 그게 김성수였다는 것이다.
김성수는 자취방에서 함께 생활한 누나에게 동경하는 선배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꺼냈다. 그를 본명 대신 '미스터엠'이라는 예명으로 불렀다. 엠은 마르크스(Marx)의 약자라고 말했다. 훗날 의문사위 조사관은 이 '미스터엠'의 정체를 추적했다. 주로 언더서클 활동을 할 때 예명을 사용한다는 증언이 확보됐다. 김성수 주변 인물을 상대로 미스터엠의 정체를 수소문했지만 끝내 그가 누구인지 확인되지 않았다.
김성수가 마지막 순간까지 몸에 지녔던 사회과학 서적 이름이 적힌 쪽지의 정체도 나중에  확인됐다. 실종 일주일 전, 김성수는 대학 선배를 만나 고민을 털어놨다. 사회 참여와 현실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할지 고민된다고 말했다. 선배는 균형 있는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조언했다. 쪽지는 더 공부하고 싶다는 김성수에게 선배가 적어준 책의 목록이었다.

그놈 목소리

이제 김성수의 죽음을 자살로 덮은 공권력의 은폐·조작은 드러났다. 의문사위는 이 사건의 핵심적인 질문에 마주해 있었다. 누가, 왜 김성수를 죽였나.
6월 18일 오전 10시, 자취방에서 전화를 받고 급하게 나갔다는 것이 김성수의 마지막 행적이다. 이후 6월 22일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돌을 맨 시신으로 발견될 때까지, 그 사이의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범인을 추적할 단서는 있다. 김성수에게 전화를 건네줬던 자취방 주인은 전화 속 목소리가 전라도 말씨를 쓰는 40대 남성이라고 증언했다. 의문사위는 1986년 당시에도 전화 발신지 추적 조사가 가능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하지만 관련 정보의 보관 기간은 불과 6개월이었다. 부산 서부 경찰서의 초동수사 부실로 발신지를 찾는 것은 영영 불가능하게 됐다. 
자취방 주인은 김성수가 외출할 때마다 인사를 거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유독 그날은 인사없이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 정도로 급하게 움직였다면, 누군가 김성수를 체포하기 위해 유인책을 썼을 가능성이 높다. '도망치라'라는 전화를 한 뒤, 급하게 문을 나서는 사람을 체포하는 방식이다. 실제 당시 많은 학생들이 같은 수법으로 공안기관에 불법 연행됐다.  
△ 김성수 사건 현장 사진. 김성수의 누나 김은숙 씨는 이 사진을 보고 동생의 바지가 바뀌어 있다고 말했다. 
김성수 사건 현장 사진에도 중요한 단서가 있었다. 인양 당시 김성수의 옷을 본 누나는 바지가 동생의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자취방 빨래를 도맡고 있어서 김성수가 가진 옷은 모두 알고 있었다. 사진 속 바지는 성수가 입고 나간 베이지색 바지가 아니라 군복으로 보이는 국방색 바지였다. 의문사위는 당시 공안 기관이 연행해간 학생에게 군복 바지를 갈아입혔다는 증언을 다수 확보했다. 김성수의 죽음 이면에 공안기관의 불법 연행과 고문이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단서였다.  
실종 현장에서 200km나 떨어진 부산 송도 앞바다에서 시신이 발견된 이유를 밝히는 것 역시 범인을 특정하기 위한 핵심 단서 중 하나였다. 공안 기관이 1학년생에 불과한 김성수를 불법 연행했다면, 김성수 자체가 목표였다기 보다는 그와 관련된 다른 수배자를 유인하거나 식별하기 위한 목적일 가능성이 크다. 김성수와 관련된 수배자를 부산 송도 일대에서 추적하고 있는 공안기관 관계자가 김성수를 연행해 데려갔을 개연성이 있다. 
의문사위는 실제 1986년 6월 송도 현장 인근에서 수배자 검거 활동을 벌이는 수사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치안본부 대공수사국 소속 형사들이었다. 이듬해 1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가해자로 지목된 조한경 경위가 같은 팀 소속이었다. 의문사위 조사에 따르면, 이들은 김성수 사건 현장에서 500m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수배자 검거 활동을 벌였다. 목격자들은 이 형사들이 수배자의 친척 집에 들이닥쳐 장롱을 열거나 행방을 대라고 윽박지르는 등 과격한 행동을 했다고 진술했다. 
△ 김성수 사건 당시 부산 송도 일대에서 학생운동 수배자 검거 활동을 벌이던 대공수사국 형사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그들이 목격된 장소는 김성수의 시신이 발견된 곳에서 불과 500m 떨어진 곳이었다.
이들이 추적하고 있던 인물은 구국학생연맹 관련 수배자 이 모 씨였다. 당시 그는 김성수와 같은 사회대 소속 3학년생이었다. 의문사위 조사에서 이 씨는 김성수를 몰랐다고 말했다. 다만 구국학생연맹의 예비 조직 성격을 가진 언더 서클 즉 노동 야학에 1학년생들이 활동했었다며 이곳에 김성수가 관련돼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진술했다.
박강형 조사관은 의문사위 활동 당시 조한경을 만났다. 그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10년 형을 선고받았지만 7년 만에 가석방으로 출소한 상태였다. 출소 이후 경찰청 산하 조직에 재취업한 사실이 드러나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박 조사관은 조한경에게 김성수 사건에 대해 물었다. 그는 진술을 거부했다. 김성수 사건을 아예 모른다며 관련성을 부인했다. 박 조사관은 그 이상 그를 추궁할 수 없었다. 단서와 정황이 부족했다.
△전라도 말씨를 쓰는 40대 남성 △자취방에 전화를 걸어 용의자를 유도하는 수사 패턴 △연행 후 바지를 군복으로 갈아입히는 공안기관  △1986년 6월 부산에 내려가 수배자를 추적했던 수사관. 범인의 소속 기관도 좁혀졌다. △김성수의 실종과 사망, 은폐 공작에 등장하는 관악 경찰서 △김성수 사망 불과 6개월 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벌인 남영동 대공분실 △군복과 관련이 있는 보안사 △ 정권 비호를 위한 공작을 일삼았던 안기부. 
△ 영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한 장면. 조사관들이 김성수 사건 유가족을 직접 찾아가 의문사위의 진상규명 불능 결정 사실을 전했다.
그러나 의문사위 활동은 한계에 부딪혔다. 의문사위에 부여된 조사 권한으로는 공안 기관의 내부를 속속 들여다볼 수 없었다. 자료 제공을 거부하거나 의문사위의 조사를 고의로 방해하는 일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조사할 대상은 광범위한데 시간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1~2기 의문사위의 활동 기한은 4년, 조사관들은 조사망을 더 좁혀 나갈 시간을 갖지 못한 채 사건에서 손을 떼야 했다. 2004년 6월 30일, 의문사위의 활동이 공식 종료됐다. 김성수 사건을 비롯한 85건의 의문사 사건은 죽음의 진실을 밝히지 못한 채 17년 넘게 캐비닛에 묻혀 있다.

가해자의 셀프 용서

2002년 여름, 태풍 루사가 한반도를 관통했다. 김성수 부모가 살던 강원도 산골에도 태풍이 덮쳤다. '빨갱이'라는 사람들의 입길을 피해 도망치듯 옮겨간 곳이었다. 하룻밤 새 흙더미가 집을 쓸어가버렸다. 어머니 전영희 씨가 상경해 집을 비운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버지 김종욱 씨는 빈집이 싫다며 이웃집에 건너간 덕에 화를 피했다. 태풍이 지나고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폐허를 거닐던 김종욱 씨가 흙에 묻혀 있던 교련복 상의 하나를 꺼냈다. 오버로크 이름표에 박힌 세 글자, 김성수. 김성수가 세상에 남긴 유일한 흔적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1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김성수 사건에 대해 "진상규명 불능" 결정을 내렸다. 박강형 조사관과 조사 2과 동료들은 이 소식을 들고 유가족을 찾았다. 흙더미 위에 놓인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노부부를 만났다. 말 꺼내기 어려워 술을 많이 마셨다. 탄식하는 아버지를 뒤로 하고 조사관들은 담배를 깊이 빨았다.
△ 김성수 35주기 추모제에 참석한 김성수의 부모. 이들 유가족에게 사과한 국가 기관은 지금까지 한 곳도 없었다.
그러나 2년 뒤인 2004년,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다른 결론을 내렸다. 김성수의 죽음에 공권력에 개입돼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김성수를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이어 지난해 12월 법원은 의문사위의 결정을 토대로 유가족이 받은 정신적 고통에 대한 국가 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누군가는 잘 된 일이라 말하지만, 노부모의 마음은 여전히 비통하다. 정작 죽음의 진실은 밝혀진 것이 없는데 국가는 돈 얼마를 건네며 정리와 화해를 권하고 있었다. 영화 '밀양'처럼, 가해자였던 국가가 스스로 자신의 죄를 용서하고 이제는 구원을 말하는 꼴이었다.
고인에 대한 국가 차원의 명예 회복과 민주화 유공자 인정은 아직이다. 경찰을 비롯해 어떤 기관도 김성수 사건에 대해 책임을 인정하거나 유가족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35년 전 김성수 의문사가 여전히 '지금 여기'의 싸움인 이유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을 다해서라도 의문사의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망자 개인의 한을 풀어줄 뿐만 아니라 이 나라를 살아갈 다음 세대를 위해서라도 반드시 진실을 밝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다시는 이런 사건이 발생하지 않도록 법과 제도를 만들 수 있고 우리 사회 권력자들의 나쁜 관행을 바꿀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 정의가 있어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진다는 희망이 필요합니다.

임영순 / 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관, 추모연대 사무처장
제작진
촬영이상찬, 신영철
편집박서영
CG정동우
디자인이도현
출판허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