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 김성수 의문사 ① 침묵의 계보

2021년 07월 21일 17시 09분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지 21년이 지났다. 국가기관의 위법한 공권력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85건의 의문사에 대한 조사가 이뤄졌지만 현재까지 진실이 완전히 드러난 사건은 없다. 의문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국가 폭력에 의해 피해를 입은 개인의 한을 풀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의문사의 이면에는 범죄를 저질러도 영원히 침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권력의 뿌리 깊은 오만이 있다. 긴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은 여전히 침묵하고 여전히 감추고 있다. 의문사가 지금 여기의 역사인 이유다. 
뉴스타파는 35년 전 발생한 한 18세 청년, 김성수의 의문사를 추적한다. 1만 페이지에 이르는 관련 조사 기록을 분석하고, 생존해있는 사건 관계자를 두루 만났다.  - 편집자 주
① 침묵의 계보

의문의 전화

1986년 6월 18일 서울 영등포동, 서울대 지리학과 1학년 김성수가 실종됐다. 오전 10시경 자취방으로 걸려온 전화를 받고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는 것이 그의 마지막 행적이다. 자취방에는 지갑과 신분증, 학생수첩 같은 소지품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신분증이 없으면 당일 있던 교련 시험에 응시할 수 없었다. 평소 잊지 않고 걸어 잠그는 문도 그대로 열려 있었다. 급하게 방을 뛰쳐나갔다는 의미였다.
△ 김성수의 아버지 김종욱 씨는 강릉에서 상경해 실종된 아들을 찾았지만 어디서도 흔적을 찾을 수 없었고 결국 아들 김성수가 부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하루가 지나도 성수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강릉에 있던 아버지 김종욱 씨가 상경해 아들을 찾았다. 학교, 친척 집, 친구 집, 그가 갈만한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다녔다. 나중엔 집으로 돌아오라는 신문 구인 광고까지 냈다. 하지만 흔적은 어디서도 나오지 않았다. 신출귀몰한다는 간첩이 내려와 아들을 데려간 것 아니냐는 생각마저 들었다.
실종 엿새째, 다시 자취방 전화가 울렸다. 관악경찰서 대공과였다. 성수의 행방에 대해 뜸을 들이며 말하는 경찰에게 김종욱 씨는 버럭 화를 냈다. 그 길로 관악경찰서에 달려가 직원을 만났다. 직원이 꺼낸 말에 아버지는 순간 가슴이 막히는 듯했다. 성수가 200km나 떨어진 부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얘기였다.

시멘트 덩어리가 묶인 시신

6월 23일, 안호영 형사가 부산 서부 경찰서에 발령 받은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파출소로부터 변사체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전날 당직자가 미뤄둔 일이었다. 변사자 처리는 지역반 형사의 업무 가운데 가장 골치 아픈 일 중 하나였다.
변사자가 발견된 곳은 송도 해수욕장 인근 매립지 공사 현장이었다. 관광지에서 멀지 않았지만 철조망이 쳐져 있어 지역을 잘 아는 낚시꾼 정도가 아니면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곳이었다. 인양된 시신의 모습은 한눈에도 심상치 않았다. 시신의 허리 벨트에는 시멘트 조각 5개가 나일론 소재의 끈에 묶여 있었다. 인양 과정에서 4개가 유실되고 4kg 가량의 시멘트 덩어리 하나만 그대로 남아있었다. 매립지 공사 현장에는 비슷한 시멘트 조각과 나일론 끈이 널려 있었다.
△ 김성수의 시신에는 시멘트 조각 5개가 묶여 있었다. 인양 과정에서 4개는 유실됐다.
안 형사는 벨트에 새겨진 서울대학교 문양을 보고 일반적인 변사 사건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주머니에서는 사회과학서적 이름이 적힌 쪽지가 발견됐다. 부산 형사인 그조차도 돌에 묶여 수장된 서울대 학생의 시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학생 운동과 그에 대한 공안 기관의 탄압이 극단을 향해 치닫던 시절이었다. 
인근에서 점퍼와 지갑도 발견됐다. 지갑 속에는 '관광사'라는 사진관의 사진인환증이 있었다. 주소는 서울시 관악구, 촬영일은 3월 2일이었다. 1학년생이라면 입학식이 있었을 날이었다. 도경 대공과 근무 경험이 있었던 안 형사는 이 인환증을 이용하면 대공 신원 조회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났다. 당시 대공과의 긴급 신원 조회는 72시간 내에 결과를 통보해 주도록 되어 있었다. 회신이 일주일 이상 걸리는 일반적인 지문 조회에 비해 훨씬 빨랐다. 대공과에 있던 동기를 통해 인환증 내용 속의 인물을 조회했다. 금방 결과가 나왔다. 서울대학교 지리학과 1학년 김성수.

큰 사건

시신 인양 현장은 구경꾼들로 북적였다. 그 가운데 장병호 부산일보 기자도 있었다. 5공화국의 언론 통폐합 때문에 부산 서부경찰서에 출입하는 신문 기자는 그가 유일했다. 경찰보다 사건 현장에 먼저 나타나는 기자로 유명했다. 당시 개통 초기였던 무선호출기 '삐삐' 덕이었다.
형사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시신에 대해 이것저것 물었다. 머리의 상처를 가리켰더니 형사들은 별일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초년병 기자의 눈에도 몸에 묶인 시멘트 조각만큼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부검실까지 따라가 과정을 지켜봤다. 이름 없는 청년의 죽음에 대한 기자의 의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부산에는 제대로 된 부검 시설이 없었다. 부산진구 당감동에 있던 부검실은 지붕만 있을 뿐 야전 침상만도 못했다. 부검실 참관 경험이 없던 초년병 기자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들어갔다. 기억의 대부분은 톱과 칼의 소리, 그리고 냄새가 훔쳐 갔다. 아는 것이 없어 의사에 질문하는 것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부검실을 나서는 길에 안호영 형사를 붙들어 내용을 물었다. 
△ 1986년 6월 24일자 부산일보 보도. 대학생 차림의 변사체가 발견됐고 타살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이다.
다음날 6월 24일, 석간신문에 한 단짜리 단신 기사가 실렸다. 대학생 차림의 변사체, 타살의 가능성이 있다는 헤드라인이었다. 부검을 통해 두피와 뇌막 사이에 20cc 가량이 피가 고여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고 보도했다. 
장병호 기자는 일주일간 후속 보도를 이어갔다. 서울대생 김성수라는 신원이 확인됐다는 사실, 그가 연극 서클을 하는 운동권 학생이었다는 사실 등을 연이어 보도했다. 신문사의 자매지에 취재 후일담을 남기기도 했다. 김성수 시신의 신원 조회 문제를 놓고 부산 서부 경찰서 형사과와 대공과가 경쟁을 벌였고, 그 결과 대공과가 판정승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후일담의 전말은 나중에 드러난다.
취재는 곧 한계에 부딪쳤다. 독자와 신문사 윗선의 반응도 시원찮았다. 한 사건에 매달려 있을 처지도 안 됐다. 운동권 대학생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이후 경찰도 입을 닫았다. 대공과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지만 그들은 좀처럼 기자를 상대하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석연찮은 느낌을 가진 채 묻어둔 사건, 35년 뒤 뉴스타파 기자가 찾아가 사건 기록을 보여줬을 때 그는 무릎을 쳤다. "이거 큰 사건이었네, 나 참"

미궁 속으로

관악서 대공과를 다녀온 아버지 김종욱 씨는 다음날 부산으로 가는 새벽 기차를 탔다. 군에서 정보 업무를 하다 전역한 사촌 형을 대동했다. 돈 없고 빽 없으면 될 일도 되지 않는 시절이었다. 더구나 낯선 지역이었다. 강원도 토박이 김성수에게도, 김종욱에게도 부산은 처음이었다.
당감동 화장장에서 아들의 시신을 확인했다. 형사들이 옆에서 이런저런 행정 업무를 챙겼지만 김 씨에겐 들리지 않았다. 가타부타 할 것도 없이 김성수의 시신은 곧장 화장됐다. 유골은 시신이 발견된 송도 앞 바다에 뿌리기로 했다. 안호영 형사는 자가용 '포니'를 가진 동료에게 아버지를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유골을 싣는 게 꺼림칙하다며 거절했다. 결국 택시를 타고 현장에 도착했다. 6월의 장대비 속에 아버지는 말없이 아들을 보냈다.
△ 김성수의 시신이 발견된 송도 앞 바다. 그의 유골도 이곳 바다에 뿌려졌다.
조서 작성을 해야 한다는 형사의 말에 김종욱 씨는 부산 서부 경찰서로 향했다. 차 안에서 사촌 형은 심상치 않다고 말을 꺼냈다. 형사들은 단순 변사사건 처리라고 말하는데 현장 곳곳에 '대공'이 깔려 있다고 말했다. 일이 순리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얘기였다. 정보 업무를 해온 사촌 형의 눈에는 그게 보였다.
경찰 조서 작성은 수시로 중단됐다. 아버지 김종욱은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경찰서를 뛰쳐나갔다. 서울대의 꿈을 이뤄 준 둘째를 잃었다는 상실감이 그를 무너뜨렸다. 조서 작성은 김종욱 씨의 여관방에서도 계속됐다. 담당 형사 안호영이 소주와 참치캔을 들고 방을 찾았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 안호영은 미뤄둔 얘기를 꺼냈다. 혹시 김성수가 자살할 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냐고 물었다. 김종욱 씨는 노발대발 그런 일은 없다고 말을 덮었다. 심상치 않다던 사촌 형의 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취재진은 536페이지 분량인 김성수 사건 기록 가운데 6월 24일 자 변사 사건 수사보고 문건을 찾았다. 과장 전결로 처리된 이 문건에는 작성자 이름이 없다. 수신은 부산시경 경찰국장, 일반 변사 사건이 부산 경찰 최고 지휘선까지 보고되는 일은 당시에도 드물었다. 
△ 6월 24일자 변사사건 수사보고 문건. 수신자가 '부산시경 경찰국장'으로 되어 있다.
보고서가 작성된 6월 24일은 이제 막 유가족의 신원 확인 절차를 마쳤을 시점이었다. 하지만 보고서 내용은 일선 형사의 진도를 한참 앞서 나가고 있었다. 김성수가 성격이 내성적이고, 반강제에 의해 서클에 가입했으며, 성적이 떨어져 몹시 고민했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전산 기록상 '총 6회 노동 야학 관련자'로 나타났다는 내용도 있다. 당시 이 같은 전산 기록 조회는 대공과에서만 가능했다.
무엇보다 의아한 대목은 유가족이 이러한 수사 내용을 전해 듣고 '자살이 틀림없는 것으로 수긍했다'고 기록한 점이다. 자살 가능성을 극구 부인한 유가족의 진술과 정반대로 기록된 것이다. 수사보고서는 일사천리로 자살 결론을 내린다. 검사의 지휘를 통해 내사 종결 처리할 예정이라고 되어 있다. 의문투성이 시신이 인양됐지만 사흘 만에 제대로 된 수사도 없이 수사를 마무리한 것이다.
이후 김성수의 죽음을 자살로 몰아가는 경찰의 수사 내용이 연일 신문에 실렸다. 언론은 성적을 비관한 대학생의 자살로 다뤘다. 그러나 6월 당시는 대학생이 기말고사를 치르기 전이었다. 비관할 성적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대학 입학 후 한 번도 성적을 받아본 적이 없는 1학년생이 성적 비관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았다.
평소 김성수가 성적에 얽매이지 않는 성격이라는 사실을 잘 아는 유가족은 황당했다. 김성수가 생전에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부산, 그것도 지역 주민 정도만 아는 은밀한 장소에 가서 자살할리도 없었다. 실종 당시 김성수의 수중에 있는 돈은 5000원도 되지 않았다. 5~6일을 견디기는커녕, 부산에 내려갈 차비도 되지 않았다. 아무리 민원을 넣고 항의해도 이러한 유가족의 목소리는 전달되지 않았다. 하염없이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은폐, 왜곡, 조작

부산에 동행했던 김종욱 씨의 사촌 형은 정치권에 사건을 가지고 갈 것을 권했다. 당시 신민당 인권옹호위원장이었던 박찬종 전 의원이 연결됐다. 박 전 의원은 부산 지역 정보원을 활용해 사건을 자체 조사했다. 그리고 국회에 나서 사건에 관련된 11가지 의혹을 제기하며 재수사를 요구했다. 시신 발견 일주일 만이었다.  
유가족의 항의에도 꿈쩍도 하지 않던 부산 서부 경찰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력계 소속 10여 명 형사가 동원돼 다시 수사에 착수했다. 문제는 수사의 방향이었다. 유가족이 원한 원점 재수사는 없었다. 취재진이 확보한 당시 부산 서부 경찰서 강력계 반장의 수첩에는 의혹을 덮을 대책 마련에만 고심하는 경찰 지휘선의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자살 결론에 필요한 논리가 있으면 추가 수사로 보강하고, 타살 의혹이 제기될 수 있는 부분은 미리 손을 써두는 식이었다. 김성수가 부모에 불효하지 않기 위해 몸에 돌을 묶었다는 추정, 심리적 갈등을 겪다가 무작정 부산에 내려와 자살했다는 추정 등 황당한 수사관의 주장이 자살 결론의 부족한 논리를 채웠다.
△ 재수사가 시작된 이후 작성된 수사보고서. 김성수가 무작정 부산으로 왔다는 수사관의 추정이 담겼다. 
사실을 왜곡한 수사보고서도 나왔다. 사건 현장에서 임장 수사를 벌인 한 형사는 현장이 시신 유기가 불가능한 장소라고 결론 내렸다. 가로등과 포장마차, 횟집 조명이 있어 밤에도 눈에 쉽게 띄는 장소라는 이유였다. 3미터 높이의 방파제에 저항하는 사람을 올리는 것도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실제 현장은 매립지 공사로 인해 밤이면 바로 앞도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운 곳이었다. 방파제의 높이도 보고된 높이보다 낮았다. 2~3사람이 있다면 충분히 사람을 끌어올릴 수도 있는 높이였다. 
그 사이 정작 담당 형사 안호영의 수사는 막혀 있었다. 학생운동 관련자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이른바 '윗선'은 일제히 수사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제대로 된 수사를 해보지 않고 자살 결론부터 내렸다. 이견이 있다고 해도 윗선에서 내린 결론을 뒤집는 주장은 쉽게 꺼낼 수 없는 분위기였다. 뜬금없는 행정 업무가 갈 길 바쁜 형사의 발목을 잡기도 했다. 정치권에서 재수사 요구가 나오자 수사자료 사본을 요구하는 곳이 많았다. 안 형사는 자비로 복사 비용을 부담해가며 일일이 서류를 보냈다. 뒤늦게 서울과 강릉에서 출장 수사를 벌였지만 소득이 없었다. 김성수의 친구들은 경찰을 적대시하며 조사를 피했다. 
출장 수사를 마치고 돌아온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발령이었다. 더 이상 수사를 하지 말라는 메시지였다. 어떤 사건이든 담당 형사가 사건 초기부터 붙잡고 파헤치지 못하면 결국 미궁에 빠진다는 것이 형사들 사이의 상식이었다. 그 후 김성수 사건 수사는 사체 한번 보지 않은 뜨내기 형사들의 손에 넘어갔다. 수사 착수 18일째인 7월 10일, 부산 서부 경찰서는 성적 하락을 비관한 대학생의 자살로 공식 수사 결과를 발표한다.

고교 동문 조사단

경찰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던 유가족과 김성수의 고교 동문들은 직접 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10여 명 동문들이 서울 팀, 부산 팀, 강릉 팀으로 나뉘어 조사 활동을 벌였다. 경찰 수사를 뒤집는 조사 결과들이 속속 수집됐다. 강릉팀은 김성수의 고교 담임을 만났다. 고교 담임은 성수가 대학생활을 잘 하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왔다고 말했다. 강제로 서클에 가입하게 됐다는 경찰 수사 내용은 사실이 아니었다. 김성수는 본인이 직접 지리학과 선배에게 요청해 서울대 총연극회에 가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김성수는 장차 영화감독을 꿈꾸며 고교 시절부터 연극 활동을 해 왔다. 
△ 강릉지역 서울대 동문회 자체 보고서. 경찰 수사를 뒤집는 조사 결과를 수집해 언론사에 보냈지만 어느 언론도 보도하지 않았다.
경찰 수사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뜻밖의 사실도 확인됐다. 6월 23일 유가족이 김성수의 사체를 확인하기 전, 김성수의 어머니 전영희 씨 직장으로 의문의 전화가 걸려왔다. 본인을 '안기부'라고만 소개한 한 남성은 김성수 가족의 사상 관계에 대해 물었다. 전화를 받은 동료는 '김성수 집안은 대대로 반공 가족'이라고 답했다. 
유가족과 김성수의 고교 동문들은 조사 결과를 토대로 보고서를 만들어 언론에 보냈다. 이 보고서의 내용은 훗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를 통해 대부분 사실로 드러났다. 하지만 어떤 언론도 관련 내용을 보도하지 않았다.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유가족의 싸움은 길 위로 이어졌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유가협 가족들이 성수네 가족들을 안아 줬다. 진실을 밝혀달라는 목소리가 커지면 커질수록 무언의 탄압도 심해졌다. 형사가 찾아오는 일이 많아지면서 전영희 씨는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중학생 막내를 키워낼 길이 막막해 눈물을 지새운 밤이 많았다. 집 근처에는 가족의 동향을 살피는 형사가 수시로 눈에 띄었다. '빨갱이 가족'이라는 이웃들의 입길에 올라 쫓기듯 시골로 거처를 옮겼다. 자식 잃은 부모에게 세상은 참으로 모질었다. 
(2편에서 계속)
제작진
촬영이상찬, 신영철
편집박서영
CG정동우
디자인이도현
출판허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