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최고 기온이 30도 가까이 올랐던 9월 19일(현지 시각) 오전, 스웨덴 예테보리의 기온은 15도까지 떨어져 쌀쌀했다. 내리다 그치기를 반복하는 빗줄기를 맞으며 전세계 130개국에서 온 탐사보도 기자 2000여 명이 이곳 예테보리에 모였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역대 최대 규모로 열린 ‘2023 글로벌 탐사보도 총회’(2023 GIJC·Global Investigative Journalism Conference)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참가자들은 총회가 열리는 스웨덴 전시·의회 센터 현관 보안 검색대 앞에 줄지어 섰다. 보안 요원들은 가방을 모두 열어보고 소지품도 일일이 살폈다. 총회를 주최한 ‘글로벌 탐사보도 네트워크’(GIJN·Global Investigative Journalism Network) 측도 기자들이 건물을 드나들 때마다 이름과 소속 언론사가 적힌 명찰, 출입 팔찌를 확인했다. 살해 협박까지 받은 러시아 기자 등 총회에 참가한 언론인들의 신변을 보호하고 테러 위험을 예방하려는 조치였다.
‘국경없는 기자회’ 집계에 따르면 현재 세계 각지에서 540명의 언론인이 구금돼 있다. 살해된 언론인은 올해만 21명에 이른다. 국적을 불문하고 권력과 부패를 감시하는 언론인들은 위협과 탄압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이번 총회에서 세계 최대 탐사보도 언론인 단체인 GIJN의 데이비드 캐플런 대표는 특히 독립언론의 위기를 걱정했다. 그는 총회 개회사에서 “독재 정치와 시민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반동이 전세계로 번지고 있다”며 “독립언론이 그 첫 번째 목표가 되었고, 우리는 어려움에 빠졌다”고 말했다. 바로 이 현장에서 GIJN의 유일한 한국 회원사인 뉴스타파가 한국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았다는 소식도 긴급하게 전해졌다.
데이비드 캐플런 GIJN 대표가 20일(현지 시각) 2023 GIJC 개회식에서 GIJN 회원사인 뉴스타파에 대한 검찰 압수수색을 비판하고 있다.
캐플런 대표는 한국 검찰이 뉴스타파를 압수수색하는 모습을 연단 뒤 대형 화면에 띄웠다. 그는 “뉴스타파는 한국 최고의 탐사보도 매체”라며 “한국은 검증된 시민사회가 있는 민주주의 국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곳”이라고 규탄했다.
검찰 수사팀이 뉴스타파를 압수수색한 지난 14일은, 공교롭게도 뉴스타파가 바로 검찰의 예산 오남용을 폭로하는 기획 기사를 보도하고 이를 기자회견을 통해서도 공개하기로 한 날이었다.
특수활동비를 비롯한 검찰 예산 자료를 정보공개 청구와 3년여의 소송 과정을 거쳐 사상 처음으로 확보한 뉴스타파의 취재 사례도 이번 총회 발표 주제 중 하나였다. 발표를 맡은 뉴스타파 이명주 기자는 현장에서 사진 한 장을 공개했다. 사진 속 뉴스타파 기자와 시민단체 활동가들은 대검찰청에서 ‘파란 상자’를 들고 나오고 있었다. 뉴스타파가 정보공개 행정 소송에서 최종 승소해 받아낸 검찰 예산 자료가 든 상자였다.
이 사진을 보자마자 각국 언론인들의 입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독립언론 기자들과 시민단체 활동가들이 영화 속 영웅들인 “어벤저스(Avengers) 같았다”고 이명주 기자가 소개하자 현장에서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
이명주 뉴스타파 기자가 22일 2023 GIJC 강의 세션에서 뉴스타파의 검찰 예산 검증 취재 사례를 발표하고 있다.
뉴스타파 취재팀은 총회에 참석한 해외 각국의 저명한 탐사보도 기자들을 스웨덴 현지에서 만나 인터뷰했다. 이들에게 뉴스타파에 대한 검찰의 강제 수사와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언론 탄압 상황을 어떻게 보는지 물었다. 이들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언론 자유를 훼손하는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에밀리아 디아즈 스트럭 GIJN 신임 대표는 “(뉴스타파에 대한 검찰 수사는) 언론의 자유를 훼손하는 또 다른 방식”이라며 “뉴스타파는 한국에서 책임 있는 저널리즘, 감시견 저널리즘을 수행해왔다”고 말했다. 또 “한국을 비롯해 다른 나라 기자들이 이런 위협을 받는다는 게 걱정된다. 독립언론을 실천하는 언론인 모두에게 보내는 메시지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에밀리아 디아즈 스트럭 GIJN 신임 대표가 21일 2023 GIJC 현장에서 뉴스타파 기자와 만나 인터뷰하고 있다.
국제 탐사보도 기관인 ‘조직 범죄와 부패 보도 프로젝트’(OCCRP·Organized Crime and Corruption Reporting Project)의 공동 설립자, 폴 라두 기자는 뉴스타파 압수수색 소식을 듣고 “끔찍한 일”이라며 “있을 수도 없고,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뉴스타파가 탄생한 배경을 돌아보면, 그 당시에도 강력한 탐사보도를 할 독립언론이 필요했기 때문이지 않으냐”고도 했다.
윤석열 정부의 언론 탄압은 한국 시민들이 이제껏 이뤄낸 민주주의를 역행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GIJN 창립 멤버인 마크 리 헌터 기자는 한국 시민들이 생존의 위협을 받으면서도 성공적인 민주주의를 이뤄내 전세계에 귀감이 됐다면서 “한국 대통령의 발언을 보면 그는 이런 역사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제프 켈리 로웬스타인 ‘탐사보도협업센터’(CCIJ·Center for Collaborative Investigative Journalism) 대표 역시 수없이 많은 한국 시민들 덕분에 “한국은 구소련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독재 체제를 이겨냈다”며 “한국 사회는 지금 중요한 기로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뉴스타파와 협업해온 해외 탐사보도 매체 기자들은 앞으로도 뉴스타파를 지지하겠다고 약속했다.
OCCRP 공동 설립자 폴 라두 기자는 “뉴스타파에 대한 탄압, 보도 외압은 옳지 않다. 세계 탐사보도 기자들은 뉴스타파가 직면한 위협에 맞서 뉴스타파와 함께 서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스타파는 OCCRP와 함께 남태평양 섬나라 피지에서 ‘은혜로교회’가 벌인 신도 통제와 폭행, 강제 노동 문제를 공동 취재해 보도했다.
일본의 비영리 탐사보도 매체 ‘탄사’(Tansa)의 와타나베 마코토 편집장은 10년 전 뉴스타파 출범 당시 아사히신문 기자였다. 그는 “KBS, MBC 등 출신 기자들이 이명박 정권의 탄압에 저항해 싸웠고 한국 시민들은 이를 지지했다”고 회고했다.
와타나베 편집장은 2017년 탄사의 전신인 ‘와세다 크로니클’을 창간한 이유에 대해 “뉴스타파를 보고 용기를 얻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탄사와 뉴스타파는 2018년 인도네시아 찌레본 석탄발전소 환경 오염 문제를 현지에서 공동 취재하는 등 협업 관계를 맺고 있다. 그는 최근 윤석열 정부와 검찰의 강압적인 수사를 규탄하고, 뉴스타파에 지지를 보내는 칼럼을 보내오기도 했다.
와타나베 편집장은 취재팀 카메라 앞에서 평소 배운 한국어로 한국 시민들에게 당부의 메시지를 전했다.
“뉴스타파는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한국 여러분, 뉴스타파를 응원해주시기를 바랍니다.”